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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4.28 14:32 조회 1,417 추천 0
2013년 4월 2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회복Recover, 다시 그 자리에   요한복음21:15~20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28세에 젊은 나이에 내란음모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자입니다. 영하 50도가 되는 매우 추운 어느 겨울날에 사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형장으로 
끌려와 사형대에 묶이게 됩니다. 그 젊은 사형수에게 마지막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했습니다. 그야말로 1초 1분이 그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자기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인사를 담은 기도를 드리는
데 2분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생의 가장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을 담은 기도
를 눈물과 함께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작별 인사를 담은 기도
를 드리는데 2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동료들인 사형수들에게 한마
디씩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2분을 썼습니다. 그리고 남은 1분은 지금껏 살아온 이 세상과
의 마지막 인사로 하늘과 땅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그렇게 최후에 남은 5분여 시간을 보내면서 그 젊은 청년의 마음속에는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의 애착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남은 시간도 흘러갈 즈음 저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
는 소리를 외치며 달려왔습니다. 사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황제의 특사령을 전했
고, 그는 다시 살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게 된 그는 사형집행 직전에 주어졌던 그 5분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하루 하루를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톨스토
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트예프스키였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그는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는 근대소
설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가 남긴 대표작이 [죄와 
벌], [카르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에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쇼핑을 마친 부부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반깁니다. 그들은 기분 좋게 
음식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립니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두 사람은 맛있게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짧고 작은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랍니다. 음식 한 가운데
에 잘려진 고무장갑의 조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점원을 불러 이 상황을 이야기했습
니다. 그 점원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다는 양해를 구하고 급히 음식 접시를 주방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지배인이 와서 실수를 인정하며 사과를 합니다. “손님, 저희
가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너무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여 
그만하면 됐다고 사과를 받아들이고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배인은 다시 정중하게 “저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허락을 하자 그 지배인은 점원에게 일단 두 사람을 다른 곳으로 잠깐 모시고, 식탁에 있는 
모든 것을 모두 다 치워 버리게 합니다. 직원 모두에게 “자, 지금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
버리고 다시 시작합시다.”라고 부드러우면서도 위품 있게 말하자 일사분란하게 새로운 식
탁보가 씌워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음식이 나오고, 고급 와인까지 서비스로 제공되었
다고 합니다. 물론 음식 값도 받지 않았구요.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너무
도 고마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당연히 그 식당에 단골 고객이 되었구요.      

<다시 사명으로 살 기회를 얻은 베드로>
  오늘 말씀은 실수하고 실패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찾아 오셔서 다시 사명으로 
살 기회를 주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베드로가 있어야 할 자리로 회복시키시는 예수님
의 심방은 매우 진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실수한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십
니다. 베드로를 용서하신다는 것도 직접 말로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격 급한 베드로가 미안
해할 것 같아서 베드로를 다시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없는 말로 전하십니다. 
  고기 잡는 그 일터에 직접 심방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신 말씀에서 베
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며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를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이 요리사가 되셔서 아침 식사를 차려 주십니다. 
베드로는 그 조반을 대하면서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나눴던 식탁의 풍경과 십자가 지시
기전 그것도 수건을 친히 두르시고 자기의 발을 씻겨 주셨던 최후의 만찬이 오버랩 되었을 것
입니다.  
  밥상을 물린 다음 예수님은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조용히 꺼내십니다. 지금까지의 
일들은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 말을 꺼낼 때에도 예수님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가십니다. 베드로의 이름을 베드로라 하지 아니하고 ‘시몬’이라는 옛 이름을 부릅니다. 
15절 전반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
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시몬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베드로의 
옛 이름입니다. 
  지금까지의 베드로를 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다시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사명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배신하고 떠난 그래서 실패한 인생을 살고 있는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용
서하시고 다시 사명으로 살 기회가 없었다면 그는 평범한 어부 실패한 베드로, 시몬으로 살았
을 것입니다. 시몬으로 살아가는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사명으로 살아갈 새로운 베드로로 부
르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초대교회를 개척자, 성령행전의 주
역인 새로운 베드로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끄러져 있고, 실패했고, 넘어졌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는 넘어져 본 자만이 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미
끄러질 때 더 잡아당기고, 넘어질 때 더 밟아버리고, 쓰러졌을 때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합니
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패하여 쓰러진 자를 찾아오십니다.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자리, 꿈
을 빼앗긴 자리, 쫓겨 도망하는 자리,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리, 사업에서 실패한 자리에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처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피해도, 도망을 가도 끝까지 추적하여 끝내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옛 사람 베드로, 시몬에서 새로운 베드로로 살게 하
십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한 때 베드로와 같이 실패했고, 미끄러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으로 다시 기회를 주셨기에 이렇게 새로운 베드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
백한 것처럼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값을 수 없는 너무도 큰 사랑입니다. 다시 
사명으로 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시 사명으로 살 기회를 얻어 새로운 베드로로 살기 위하여 확인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
것은 신앙의 본질이며 사역의 동기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갑니다. 끝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여, 목숨까지 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확인하셨고, 먼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
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이 진정성이 담겨 있는 고백인지를 확
인하십니다. 동일한 질문을 연속적으로 던지신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
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 
사람들은 다른 제자를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괜찮을 수 있지만 주변의 다른 제자들은 기분상할 질문입니다. 사랑의 
크기를 비교한다는 것, 사람이 가장 기분 나쁜 것은 비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모르
실리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비교급을 써가며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마가복음 14:27-29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
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버려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
노라는 그 마음은 가상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
른 제자들을 비교해 가며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듯 장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
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누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여전히 그
런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보려고 물으신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하튼 이에 대
한 베드로의 대답은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의 대
답에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이 빠져 있음을 주목할 일입니다. 달라지긴 달라졌습니다. 그
런데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러하외다라는 말이 너무 선뜻 나오는 한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담하고서도 예수
님의 사랑을 배신했던 그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질문의 차이가 있습니다. 비교급이 빠졌습니다. 첫 번째 대답에서 비교하는 문제는 확인했습
니다. 그런데 대답은 동일합니다. 여전히 사랑을 선뜻 장담합니다. 말로 쉽게 답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를 버리는 희생을 감내하는, 삶으로 증명되는 것이어야 하기
에 말 속에는 내가 손해 보겠다는 결심까지 들어 있어야 하기에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으십니다. 이에 대답에 비로소 만족하십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을 사랑하기는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과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한
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근심하여 사랑을 조심스럽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에 이어지는 18절과 19절 말씀에서 그 근심의 실체 무엇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
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
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실체는 바로 죽음입니다. 희생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
달려 순교합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목숨까지 내놓은 희생
입니다. 비로소 베드로의 대답에서 주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위임하십니다. 새로운 베드로로 산 것입니다. 그의 이름이 하늘에도 이 땅의 교회들에게도, 성
도들에게도 영원히 기억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압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명을 위해 사는 삶에서 가능합니다. 시몬으로 살 
때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무장된 새로운 베드로로 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
게 살 때 우리는 행복하고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아직도 시몬으로 살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빼앗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주님은 우
리가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새로운 베드로의 자리, 사명
의 자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회복의 기회 놓치지 말고 새로운 베드로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시몬의 자리인지, 새로운 베드로의 
자리인지 뒤돌아보게 하옵소서. 시몬의 자리에 있으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투정하는 어리석은 인생
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회복시키시고, 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옵소서. 새로운 베드로로 
살아서 진정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고, 값진 인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도 영원히 기억되는 이름으로 사는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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