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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4.21 14:36 조회 1,540 추천 0
2013년 4월 21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셰프Chef, 하나님  열왕기상19:1~8

  동막골 마을을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로 만드는 힘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잘 먹여서 만족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을의 촌장은 바로 잘 먹여주는 사람이며, 이것이 행복한 마을을 만들어 
가는 지도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도 우리를 먹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한 모든 조건과 환경이 구비된 완벽한 유토피아였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30절 말씀
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
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
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
라”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풍성한 먹거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먹거리를 주심으로 우리를 먹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하여 결국 죄악으로 버림받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를 비롯한 족장들을 먹
여 살리십니다. 야곱의 일가를 흉년으로부터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그야말로 반전의 
반전 드라마입니다. 요셉을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쳐 애굽으로 보내시고 총리로 세우십니
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요셉의 입술로 고백하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생명을 흉년에서 건져주시기 위
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7절~8절 말씀을 소개합니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
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우리를 먹여주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바로 ‘만나’입니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떠나온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 주셨습
니다. 그것도 40여년 동안 매일, 약 200만명 분의 먹을 거리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미 들은 이야기라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깊게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
운 일입니까? 우리는 매 주일 2~3백명 식사 때문에 여선교회 회원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습니
까? 앞으로 있을 교회행사에 초청한 사람들의 식사문제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 한 끼 식사가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을 보내신 어르신들은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인사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아실 것입니다. 
  매일 2백만명의 식사문제를 완전식품인 ‘만나’로 해결해 주셨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그들은 매일 기적을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78편 23절~25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
합니다.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이 만나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광야와 같은 열악
한 환경 중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시고, 가나
안, 본향에 이르도록 끝까지 인도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먹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
명을 보전해주셨고, 우리를 지켜주셨고, 여기까지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 시대에 걸 맞는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 만나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먹여주시는 하나님의 자상하신 모습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에도 소개하고 있습니
다. 황송하게도 그 영광의 친히 하나님이 셰프, 요리사가 되셔서 차려주신 밥상을 대한 영광의 주인
공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성경에서 소개하는 인물 중 아마도 가장 세찬 기운을 가지고 산 사람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합 왕 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시
돈 왕 엣바알의 공주 이세벨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세벨은 많은 혼수품과 함께 바알 신앙을 
가지고 왔습니다. 풍요의 신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사람들은 평등공동체 수립이라는 출애굽
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풍요’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은 우정과 환대 그리고 돌봄과
나눔이라는 공동체적 가치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흉허물 없이 지내던 마을 공동체
가 개발의 바람을 타고 들어온 돈 때문에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아합이 다스
리던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힘을 가진 이들은 약한 이들을 윽박지르거나 속이거나 살해함
으로써 자기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한 나봇은 
그 시대 민중들이 처해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인간 세계의 소통이 막히면 자연조차 황폐해지기 마련
인가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흘러야 할 사랑의 기운이 막히면 땅도 하늘도 막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한 예언자가 엘리야입니다. 그는 일찍이 아합에게 나가 여러 해 동안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왕상17:1b)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삼년 가뭄이 있은 후 엘리야는 다시 
아합과 만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누가 과연 참 
하나님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곳에 모인 백성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결단을 촉
구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
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18:21) 그러나 백성들은 예언자의 시선
을 피하며 묵묵부답입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들은 어느 분이 참 하나님인지를 한번 따져보자
고 합니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을 
내려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은 응답해 주십시오’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응답이 없자 그들은 제단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피가 흐
르도록 자기 몸을 찌르며 광란 상태에 돌입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제단 가까이 불러 모으고, 이스라엘 지파 수대로 돌을 모
아오게 해서 무너졌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나뭇단 위에는 각을 뜬 소를 올려놓았습니다. 제
단 둘레에 두 세 말 들이 곡식이 들어갈 수 있을 넓이의 도랑을 파고는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채
워다가 제물과 나뭇단 위에 쏟으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일을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아시는 바대로 
4는 땅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고 3은 하늘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12통의 물이 부어
지자 도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한 일임을 사람들이 
깨닫게 해달라고, 그리고 주님만이 주 하나님이시고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떨어져서 제물과 나뭇단과 돌들과 흙을 다 태웠고, 도랑 안
에 있던 물까지 다 말려버렸습니다. 백성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하고 외쳤습니다. 신적 분노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붙
잡아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손 강가로 데려가 모두 죽였습니다. 그런 후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일곱 번 기도하자, 바람이 일고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람과 구름과 비를 다스리는 것은 바알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임
을 넌지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을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옛날에 벌어진 일의 도덕적 정당성을 묻는 일은 적절치 못합니다. 이 이야기는 그 당시 이
스라엘의 정체성이 얼마나 크게 흔들렸는지, 그래서 출애굽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이 
필요했는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은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합
니다. 만일 그를 내일 이맘때까지 죽이지 않는다면 신들에게서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고 말합니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에게 적용된 단어들을 보십시오.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게 인간입니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이 찾아올 때
가 많습니다. 엘리야가 그렇습니다. 그는 고독합니다.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그는 로뎀 나무 그늘 아래 앉습니다. 그는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4)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던가요? 잠은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그의 마음에 틈을 만들어줍니다. 팽팽하게 곤두
섰던 그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때 한 천사가 그를 깨웁니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
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
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든 동안 주님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듯 그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고 계셨을 겁니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
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감동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지 않으셨습니다. 꾸짖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의 절망과 두려움까지도 품어 안으시고 그에게 꿈조차 없는 단잠을 주셨습니다. 그리
고 그를 위해 말없이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마치 중력처럼 그를 절망으로 잡아당기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겁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이 장면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셰프가 되셔서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납
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하여 극기야 생명의 떡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
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보혈의 은총을 먹으므로 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
~51절 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
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
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
니라 ”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의 셰프, 요리사이십니다. 우리를 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먹여주시는 하나
님 때문에 우리의 육체도 영혼도 살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가 지쳐 있을 때, 무기력하
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 때에 친히 찾아 오셔서 푹 자게 하시고, 밥상을 차려 주십니다. 그 하나
님이 지금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지친 삶의 현장에도 찾아 오십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심령 가운에 오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희망을 가지십시오. 다시 용기를 내십시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지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게 드려진 때를 사는 성도가 있습니다. 광야처
럼 삭막하고 척박하고 메마르고 건조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한 때 용기백
배하여 기운찬 삶을 살다가 무기력한 도망자 신세로 사는 성도도 있습니다. 사랑이 무한하시고, 너무
도 자상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을 찾아와 주시길 원합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사 저들의 셰프가 되어 주시옵소서. 만나를 주시옵소서. 저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
옵소서. 저들을 살려주옵소서. 다시 일으켜주옵소서. 회복시켜주옵소서. 다시 멋진 생을 살게 하여주
옵소서. 다시 생을 불태울수 있는 열정을 주옵소서. 진정으로 의미있고 값진 행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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