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1월 19일 예배 설교 입니다. (음성녹음이 안되 설교문 문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20.01.19 15:44 조회 589 추천 0

주일예배설교(2020_Jan_19)
나의 평생 소원 잠언30:1~9

<소원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살자>
  [사진자료: 손가락 없이 태어난 미 소년, Daum] 최근에 열손가락 없이 태어난 소년이 얼굴도 모르던 낯선 이들의 도움으로 손가락을 갖게 됐다는 뉴스가 인터넷에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개빈 섬너(11)는 2019년 12월 23일 성탄절 즈음에  생애 처음으로 물병 잡기에 성공했습니다. 열 손가락이 모두 없는 소년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런 기적은 한 3D프린팅 업체의 도움으로 실현됐습니다.
  섬너는 혀 등 구강부터 손과 발 등 사지까지 기형이 나타나는 희귀질환 (Oromandibular-limb hypogenesis syndrome, OLHS)때문에 선천적으로 손과 발, 혀가 정상의 40% 수준밖에 발육하지 못했습니다. 손목과 손등은 있지만 손가락이 없어 무언가를 잡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소년은 “한 손으로 컵을 쥐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간단한 일도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래도 소년은 의젓했습니다. 섬너는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을 지 없을 지 일단 시도해보도록 나를 밀어붙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고 어른스럽게 밝혔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들은 한 번도 자신의 장애를 불편해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 어머니는 “손을 갖고 싶다”라는 아들의 소원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처음으로 아들의 속내를 들었던 것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어머니는 SNS에 도움을 요청했고, 소년의 사연은 건너 건너 옆 동네 클락스빌까지 퍼져나갔고 소년을 돕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클락스빌에서 3D프린팅 업체를 운영하는 남성의 도움으로 소년의 의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 역시 모두 기업 측이 모두 부담했습니다. 소년을 도운 개발자 앤서니 이코노모스는 “몇 년간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길러왔다. 도울 수 있을 때 돕고 싶었고,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만든 의수는 손바닥을 접는 동작을 하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잡을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플라스틱은 너무 미끄럽기 때문에 접지력을 높이기 위해 특별 실리콘이 사용됐습니다. 비록 각각 3개씩 6개의 손가락으로 구성돼 있지만, 평생 손가락 없이 살아온 소년에게는 더없이 완벽했습니다.
  선물상자를 열어본 소년은 꿈에 그리던 소원인 손가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고 합니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한참을 눈만 깜빡이던 소년은 이내 제작자에게 달려가 안기며 고마움을 전했고, 가족들 품에 안겨 기쁨을 나눴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물병을 잡는 소년의 모습에 어머니와 할머니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소년은 “학교에서 병뚜껑 같은 걸 열려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의지해야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됐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소년은 “신이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면서 "나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이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장애를 앉고 태어났다면 당연히 그 장애를 이겨내기 위한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너무도 의젓한 섬너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섬너는 또 다시 새로운 소원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이제 평생소원이었던 손가락을 가진 섬너는 그의 성품을 보건데 또 다른 아름다운 소원을 품을 것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것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겠다 라든지, 자신과 같이 장애를 입고 태어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며 살든지 그런 아름다운 소원을 품고 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형호님의 <나 그대 사랑해도 될까요?> 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꼬마야 너도 아까 봤겠지만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은 짧단다.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니?
바로 소원을 항상 가슴속에 담고 있어야 하는거야.
순간순간 생각나는 소원은 소원이 아니라,
자신의 모자람을 보상받으려는 욕심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너도 소원 하나쯤은 항상 가슴에 품도록 노력해 보렴.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원이 있나요? 한 주간 지내시면서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소원 하나쯤 가슴에 품어 보도록 노력해보면 어떨까요?

<아굴의 두 가지 소원>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소원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잘 살펴보면 그 소원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격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듣기 생소한 아굴이라는 사람의 소원을 살펴볼 것입니다. 짧게 소개되어 있지만 아굴은 인생을 통찰한 현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것에서 교훈을 찾고, 늘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한계 있는 나약하고 부족한 자인지를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개미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우고, 거머리에게서는 탐욕을 깨닫습니다. 또한 사자의 갈기에서 제왕의 위엄을 보고, 사반 즉 너구리에게서는 협동심을 배웁니다. 그런가 하면 남녀의 동침의 자리를 통해서 인간의 음흉한 끊임없는 욕망을 보고, 종이 임금이 되는 것을 보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봅니다. 삶을 관조하는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 보다 어리석다고 여겼으며, 총기가 없고, 배움이 모자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짐승과 같다고 까지 표현하며 겸손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그였기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두 가지 소원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굴의 두 가지 소원은 먼저 헛된 것과 거짓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 달라는 것과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소원을 아뢰는 순서에서도 우리는 아굴의 지혜를 봅니다. 현실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지켜야할 삶의 자세를 구합니다. 옳음을 위해 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 가져야할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이 근본이 기초가 되지 않는 눈에 보이는 성공의 탑은 언젠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할수록 아굴의 기도는 단순하지만 참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겉으로는 부와 명예로 권세로 성공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보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믿음의 기업가들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의 추한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지금의 정부와 언론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깨끗하고 정직한 삶으로 청부를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말하면서, 남이 안보는 가운데 부를 몰래 축적하고 있는 이중적인 삶이 드러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것을 알고 있는 아굴은 그래서 먼저 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옳은 길을 가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아굴이 이런 기도를 먼저 드린 것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이루어주시는 기도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평가하시는 기준 두 가지 있다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입니다. ‘너는 누구의 길을 따랐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느냐?’ 안타깝게도 북쪽 이스라엘의 19명의 왕들은 이 질문에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 ‘사람은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참되신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진실하지 못한 말이나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시편15편 2절에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자는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행위 가운데 진실하지 못한 것을 쉽게 감찰하십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의 눈만 의식하는 거짓된 기도를 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신 다윗의 기도를 살펴보면 왜 하나님이 그를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는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같이 시편 17편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하는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다윗도, 아굴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되지 않게 드리는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굴은 인생에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을 때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본성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것과 거짓말을 서슴없이 행하게 될 경우 그 마음속에서 이를 거부하는 반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5) 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거짓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당당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정직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굴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께 가장 먼저, 가장 큰 소원으로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굴의 두 번째 소원, 그의 기도 또한 인생을 깊게 통달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는 지나친 부와 극단적인 가난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9절에 보니 ‘혹 내가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라는 말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일반적으로 물질이 풍성하고 배부르게 먹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은 하나님께 물질의 복을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재물이 많아지고 부요하게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자만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어려운 시절은 생각하지 않고 없는 사람을 멸시합니다. 다윗 시대의 마온 땅에 살던 나발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을 향하여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라고 폭언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삼상25:10~11)
  가난할 때 오는 문제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조심스러워 합니다. 옛말에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배고픔은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생계형 범죄’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너무 가난하여 가족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면 원치 않는 과오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빈부가 섞여 사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소유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이나 인격을 비교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존심이 상하고 좌절감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에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아굴은 꼭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소원한 것입니다.  

<모자람의 풍성함>
  철학자 플라톤(Plato)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고 합니다. 첫째, 생활하기에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조금 떨어지는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치지 않는 말솜씨를 들었습니다.
  플라톤이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은 전부 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약간 모자란 듯한 삶, 어쩌면 여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야 나의 모자람을 인정해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도에 넘치는 부와 소유욕, 분수에 넘치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릅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감사를 모르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진정한 최고의 영성가 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고 닮아가는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지금 품고 있는 소원이 여러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굴의 두 가지 소원을 한 주간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주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드릴 평생의 소원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기를 다짐하고 새롭게 남은 생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아굴의 소원을 되내어 봅니다. 가슴에 새겨 봅니다.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여 주옵소서.’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도 올 해와 이제 남은 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갈 소원을 주시옵소서. 다윗처럼, 아굴처럼 하나님이 인정하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소원을 품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한서의 성도 모두는 언제나 당당하게 하시고,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시고, 언제나 감사를 고백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1월 26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1월 19일 예배 설교 입니다. (음성녹음이 안되 설교문 문입니다.)
▼ 다음글 : 1월 12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