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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2.05 13:54 조회 662 추천 0


2017년 2월 5일 예배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7_Feb_5)
< 너 이름이 뭐니? > 마태복음5:13~20


<축복>
  예배가 삶의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이 자리에 오신 한서의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진심을 담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사랑과 의와 평화가 오늘도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 나를 늘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셨다는 것을 다시 상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성숙한 다짐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합니다. 예배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 때, 비로소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우리를 살립니다.
위로를 줍니다. 용기를 줍니다.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 가운데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


<너 이름이 뭐니?>
 가수 양희은 씨가 후배들을 만나면 먼저 이름을 묻는다고 합니다. 요즘은 그룹 아이돌이 대세라 누가
누구인지? 그리고 연기자인지, 코미디언인지 헷갈림만 합니다. 그래서 묻지요. ‘너 이름이 뭐니?’ 양희은 씨
목소리 톤이 독특해서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재미있어 합니다. 그래서 많은 후배들이 성대모사
하며 따라 하기도 합니다.  
 이름을 묻는다는 것은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개그맨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너 뭐하는 사람이니?’, ‘너 지금 뭐하고 살고 있니?’, ‘너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말고 있니?’, ‘너 목사로서 잘 살고 있니?’라는 질문으로 들려옵니다. 소위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 혹은 자존감과 관련해서 가장 명쾌한 답을 제시해주고 있는 성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3~14절)


  사실 이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말씀도 드뭅니다. 누가 감히 세상의 소금일
수 있겠으며, 누가 감히 세상의 빛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자랑스럽기 보다는 마음 한구석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선언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의 구실을 하라.’는 말씀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라.’
는 말씀입니다. 신학에서는 이런 문장을 일컬어서 ‘직설법(Indicative)은 명령법(Imperative)이다.’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직설법 속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명령법도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소금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 우리나라와
달리 소금을 바위에서 캤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소금은 보드랍고 하얀 색이 아니고, 거의 돌에 가까운
투박하고 시커먼 색이었습니다. 레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에서 사용되는 소금에 대해서 살펴보면
소금으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2:13)


  이 말씀을 보면 그냥 소금이 아니라 ‘언약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소금이 갖는 어떤
상징적인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 소금은 고대로부터 어떤 계약을 체결하고 그 계약을 확증할 때
계약 당사자들 간의 증표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랍의 베두인족 사이에서는 상호 협약을 맺을 때, 소금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번제물에 소금을 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겔43:24) 우리는 이런 관습을 통해서 소금이 갖는 의미를 다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소금에는
 음식이 변하는 것, 즉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었고, 그 소금이 계약을 체결할 때 사용되었던
것은 그 계약이 변질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을 말할 때 ‘소금의 언약’(Covenant of Salt)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사장이 소금을 치는 이유도

제사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 관계 속에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소금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신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맛과 관련이 있습니다. 소금이 제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맛을 간직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소금이 자신의 맛을 잃게 된다면 쓸모가 없어져서 내버려져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소금처럼 멋진 것이 없습니다. 소금은 그 자체로는 아무 매력도 볼품도 없습니다. 소금은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자기 혼자서는 맛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금이 다른 음식과 만났을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기 혼자서는 짠맛밖에 낼 수 없는 이 소금이 다른 음식에 첨가되었을 때는 그 음식의 격을
높여주는 놀라운 역할을 가마당해 내는 것입니다. 아무도 음식을 먹으면서 ‘아, 소금이 참 맛있다!’라고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에 소금이 없으면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고 다른 음식을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금이 얼마나 멋진 존재입니까? 가히 사람과
견주면 성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자기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존재이지만 그러나 조용히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여러분은 이
주님의 말씀을 오늘 새롭게 들으면서 어떤 감회를 느끼십니까?


  주님은 이어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기 못할

 것이요”(14절)


  대개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이 되려 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빛나는 별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소금이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듯이 빛도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빛만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만으로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온통 빛 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한시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빛이 가장 고마울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사물을 비추어 줄 때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집집마다 등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개 방이 하나뿐인 팔레스타인
농부의 집에서 사기로 만든 기름등잔은 참으로 고맙고 요긴한 것이었습니다. 한밤중에 시골길을 걸어보신
분들은 달빛의 고마움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우리는 사람들이 희망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우리는 사람들이
옳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빛이라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비추어 주는
사람으로 살라는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사람을 비추어 주는 빛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1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여기에서 주님은 ‘너희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희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이
연관성이 있다는 것인데요. 우리의 삶 속에서 빛을 비추는 삶이란 바로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착한
일은 이 본문이 이전의 말씀과 연관성이 있는데요. 바로 팔복의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아오고,
사람들 사이를 좋게 하는 화평을 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드러난 것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이 착한
행실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그리고
이 시대 계신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을 기초로 하여 설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은 소금처럼 녹아지고, 빛처럼 자신은 정작 감추어진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화평을 심기 위해서 감당해야할 불편함과 수고를, 때로는 십자가를
스스로 자원하여 감당하는 자가 착한 행실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소금이고, 그 사람이 빛입니다.
주님을 빛내는 위대한 조연입니다.


  ‘너 이름이 뭐니?’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뒤돌아봅니다. 우리는 소금입니다. 우리는 빛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빛내고, 교회를 살맛나는 맛있는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착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비춰주기
위하여, 주님을 주연으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녹아지고, 드러나지 않는 조연을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으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있으며, 화평케 하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인가요? 그 이와 화평을 심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어떤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나요? 무슨
손해를 보았나요? 무슨 십자가를 지고 있나요? 오히려 나 자신이 드러나고, 나 자신을 뽐내고, 나 자신을 앞세우기
위하여 무정한 자로 살고, 교만한 자로 살고, 박해하는 자로 살고, 담을 쌓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
스스로 소금이고 빛이라고 속아 살고 있지 않고 있나요? 나는 나의 착한 행실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나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내가 감당해야
할 소금과 빛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주변을 살피면 소금과 빛과 같은 보석과 같은 귀한 분들이 있습니다. 소금과 빛처럼 자신을 감추길 원해서
그 약속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리 교회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은 복된 존재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로 인하여 감동을 받고, 그 분들로 인하여 우리 교회가 희망이 있다고 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약속했던 것에 신의를 지키고, 나는 녹아져 맛있는 공동체를 세워 나가고, 빛을 비추어 주님을

 드러내는 소금과 빛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주님을 증거하고, 살맛나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고, 우리 자신도 복된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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