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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1.30 13:19 조회 684 추천 0



2017년 1월 29일 예배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7_Jan_29)

< 생각을 생각한다 > 마태복음5:1~12


<축복>

[사진자료; 복] 우리는 지금 설 명절 연휴를 보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나눈 인사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가 솔직히 살짝 편치는 않습니다. 마치 세속적인 복을 권장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새해에
주님이 주시는 축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굳이 조금 바꿔서 인사하면 조금은 편하기 하지만
그도 딱 걸맞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생각을 생각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이미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복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건강, 화목, 부요, 창대, 번영과
같은 개념입니다. 돈 잘 벌고, 넓은 집을 사고, 인정받아 승진하고,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많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힘이 있는 자리에 오르고, 인기와 영예를 얻는 것을 우리가 갖는 복에
대한 생각입니다.
  이것이 좋은데, 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에 위에서 말한 복을 빌 때 조금은 편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복에 대한 이해의 개념과 주님이 생각하시는 복에 대한 개념의 이해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로서 가짜 복에 속지 말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고,
진정한 복을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하여 말씀을 전합니다.


  복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아주 명확하게 알려주신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소개한 ‘산상수훈,
팔복’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의 공식적인 첫 번째 설교라는 면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을 먼저 하신 것입니다.
  흔히 본문을 일컬어서 ‘8복 선언’이라고 통칭합니다. 여덟 가지 복에 관한 선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이 본문은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복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즉 ‘복된
존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된 존재’라는 것은 내면과 인격과 성품과 관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어느 정도와 수준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세기 시리아의 수도자였던 성 디오니시우스는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삶을 내려놓고 지고의 아름다움인
진리와 연합하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라 하신 사람이 되는 삶, 그것이 존재의 충만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몇 차례 소개했던 박누가 의사
선생님 바로 복된 사람, 복된 존재로 사는 사람일 겁니다. [영상자료; 아픈 만큼 사랑한다.]


  이 시대 의사가 된 것만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도 명예도 인기도 때에 따라서는
권세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로 복음을 전해
영혼을 살리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기꺼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복으로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이 복된 존재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복된 존재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여덟 부류의 사람들로 분류해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도
복되고 애통하는 사람도 복되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누지 않고 통전적으로 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부터 10절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까지가 하나의 과정으로 엮어져서 일관된
연속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려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가난한 영적 상태를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즉 성화의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3절)


  이 말씀의 시작부터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우리와 셈이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가난이 복일 수
있을까요? 가난이 복이라면 우리는 너무도 절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가난이
복인 이유에 대하여 당신의 생각을 전하십니다. 위에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심령’(心靈)이 주격이 아니라
여격이라는 것입니다. 여격은 헬라어 문법에서 주로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은 ‘성령과의 관계에서 영이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하다.’
라는 말을 대할 때 먼저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영이 가난한 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단식과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신 후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61장1절을 인용해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밝히신 바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4:18)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자’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포로가 되었고, 그래서 심령이 눈이 멀고 눌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보시고 복음으로 이들의 깨진 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이 말씀과 오늘 본문을 나란히 놓아 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구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가까이 와 있다고 선포하신 천국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름 아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눈물로 받아들이고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의 가난한 심령에
천국이 임했다고 주님은 선언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사는 것만큼 행복이 어디 있으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깨달은 자만이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영이 가난한 자, 진정으로
회개한 자에게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해서도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마음을 닦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이 실패해
왔습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청결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논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깨끗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역시 존재의 물음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바로 세워져야 자식들이 밖에서 바르게, 청결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듯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세워져야 거기서부터 청결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을 비추시면 우리는 감출 수 없는 더러움이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우리의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부끄러워합니다. 아니 너무 두려워 주님이 나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이사야와
베드로의 생각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으로 인한 우리의 더러움과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회개를 드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이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삶과 신앙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속상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내 연혼의
상태가 하도 남루하고 비루하고 가증스러워 애통하며 울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애통하는 마음과
심령이 가난한 마음과 청결한 마음을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위로’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파라칼레오’(parakaleo)입니다. 그 뜻은 ‘가까이 부르다,
초청하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애통해하는 사람을 가까이 불러서 위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받은 사람에게는 어느덧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온유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너그럽고 관대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온유함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내면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 온유함이 배워서 배워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데에 신앙인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깨달아야 터득되고, 터득되어야 비로소 품어 간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우리가 무얼 깨달아야 될까요? 자기부족입니다. 진정한 온유함이란 자기의 내면을 주님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자기의 가난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도공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정성껏 빚은 도자기를 가마에서 구워낸 후 그것들을 도공은 어찌합니까? 도자기를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그러다가 조그만 흠이라도 발견이 되면 우리가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것들은
미련 없이 깨버립니다. 완전함이 무언지를 아는 도공의 냉혹한 자기 부정입니다. 그 깨어짐 속에서
도공은 진정한 장인(匠人)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이라고 다르지 않지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신 말씀이 이 산상설교의 요체라면, 그리고 그 온전함이 우리가 추구하는

성화의 목표라면, 자기가 빚어낸 도자기조차 깨버리는 도공의 치열한 자기 부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자기 부정’은 사실은 자기 영혼의 남루함을 애통해할 줄 아는

가난하고 온유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온유함으로 사는 자의 밖으로 드러난 삶의 방식은 의로운 삶으로 드러납니다. 진정으로
애통으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아파 본 사람은 죄를 멀리하고 의를 추구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삶, 그 의를 추구하는 삶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 더 철저하게 냉정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의 이끌어 주심과 가르쳐주심과
응원해 주심을 간절히 원하여 기도하고, 무릎 꿇고, 가슴을 치고, 삼가 믿음의 옷깃을 여미며 다른 사람에
대하여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할 수만 있으면 화평을 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 사람이 주님에
생각하시는 복을 받을 자입니다. 이 사람이 복된 존재입니다.


  福(복)을 한자로 풀어 보면 ‘示’(보일 시), ‘一’(한 일), ‘口’(입 구), ‘田’(밭 전)이지요. 한자로 ‘하나의 입’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은 한 사람이 자신의 밭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지금 무슨 밭을 보여주고 있나요?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떤 밭이 있기를
원하시나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출세와 번영과 창대를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얻으면 정말 행복한
건가요? 살아보시니 어떻습니까?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생각을 오늘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복이 어디에
있는지? 진정으로 복된 삶이 어떤 것인지? 누가 복된 존재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그 복이, 새해에도 한서의 성도 여러분들에게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서의 성도 모두 올 한 해에도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그 복을 많이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밭에 온유와 긍휼과 화평과 의가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올 한 해 한걸음씩 더 성화되어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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