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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7.01.22 13:43 조회 692 추천 0


2017년 1월 22일 예배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7_Jan_22)
< 그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 > 요한복음1:43~51

<축복>
  오늘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대한민국 정국도 지금의 겨울 추위처럼 더 추워져 우리의 마음을
시리게 합니다. 인간관계가 어그러져 있어서 더 마음이 차갑고 시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
마음으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따뜻한 바람을 주시는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공간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각자 성도들의 심령 안에는 불의 혀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스한 성령이 임하셔서 춥고 시린 마음이 녹아져 지극히 평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한서의 모든 가족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옆에 있는 성도에게 따뜻한 손으로
악수하며 사랑을 나눕시다. “힘내세요. 평안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감찰하신다고 하십니다. 다 아신다는 것이겠죠.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숨길 수도, 숨길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진솔하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상처를 입었으면 상처를 입은 대로, 속이 상하면 상한대로 우리 아버지 하나
님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솔직한 예배를 받으십니다. 마음을 드리는 예배를 받으
십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위로와 용서와 용기와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혼의 성장>
 톨스토이가 말년에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명상을 통해 얻은 글을 모아 발표한 책이 그의
유작(遺作)인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라고 합니다. 그는 그 책을 가족들에게 몇 번씩 읽어
주었고,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권했는가 하면, 그 자신의 삶의 지침으로 삼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도 침대에서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그 책에서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노동이라고 하면 건물을 짓고, 밭을 갈고, 소를 먹이는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것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영혼을 개선시키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말도 합니다. “육체적 성장이 끝나는 시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부터 영혼이 성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우리 영혼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라는데 이것은 한 개인의 영혼이나 모든 사람의

영혼이나 똑같다.”
 그가 얼마나 내면의 영혼을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우리는 짧은 글이지만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노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의 영혼을 개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소개한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은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의 내면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을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


  애초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의 예수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습니다.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것이 그가 시큰둥한 이유였습니다. 나사렛은 종교적
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나사렛을 거론한 곳이
없으니 나다나엘의 그러한 반응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서 무엇을 보신 것일까요?
 요한복음 1장에는 이런 예지(豫知)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29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어린 양을
보았다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그의 내면을 통찰하셨습니다. ‘너는 참 겉과 속이 같다.’는
겁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을 가리켜 ‘간사하다’라고 말합니다. 간사하다는 것은 트로이 전쟁 때
목마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트로이 목마>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는 트로이를 둘러싸고 10여 년간 전쟁을 벌였으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30여 명의 군사를 그 안에 매복시켰습니다. 그리스가 이 목마를 버리고
거짓으로 퇴각한 척하자 트로이 사람들은 목마를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고 기뻐하며 성 안으로
들여놓습니다. 그날 밤 목마 속의 군인들은 성문을 열어 그리스 군대를 성 안으로 들여놓았고,
이로 인해 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막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트로이 목마는 컴퓨터 악성 코드의 매명사로 유명합니다. 악성 코드 중에는 마치 유용한
프로그램인 것처럼 위장하여 사용자들로 하여금 거부감 없이 설치를 유도하는 프로그램들이었는데,
이들을 ‘트로이 목마’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너에게는 그런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도대체 주님이
그에게 무엇을 보셨기에 그토록 특급칭찬을 하시는 것일까요? 나다나엘도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절)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
.”(48절) 여기서 말하는 ‘무화과나무 아래’는 묵상(默想)의 자리입니다.
당시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뜨거운 낮에 그늘을 드리워주었기 때문에, 경건한 구도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조용히 묵상하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나다나엘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그때 내가 너를 보았다.’는 이 말씀은 단순히 겉모습을 보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내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겉과 속이 같습니까? 정돈이 잘 되어
있습니까? 주님에게 보여드릴 만한 내면입니까? 진리를 목마르게 찾는 구도자입니까? 삶의 한
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몸부림치십니까? 매일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자라는 영혼이십니까?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누구십니까?


<잃어버린 여행 가방>
  아주 오랜 전에 읽었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생각이 납니다.
  “매년 1월이면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는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
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에 올린다고 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굉장한 귀중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단 낙찰이 되면 가방은 즉시
관중들 앞에서 그 개봉되어 그 내용물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낙찰자나 구경꾼이나 같이 낄낄
대며 즐거워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나도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때 잃어버린 여행 가방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누가 그 가방을 연다면 더러운 속옷과 양말이 꾸역꾸역, 마치 죽은 짐승의 내장처럼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 나올 것이다. 루프트한자 항공이 아니었으니 경매에 붙여 개봉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모양만 보고 꽤 괜찮은 게 들은 줄 알고 슬쩍 빼돌린 속 검은 사람이
개봉을 했다고 해도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속 검은 사람 앞에서일수록 반듯한 내용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였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이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까.”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을 의식하고, 숨을 곳이 없는 밝음 앞에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고민이 있는 사람이 영혼이 자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사람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겉모습으로만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영혼 깊숙한 갈증을 보아주신 분, 예수님 아파에서
나다나엘은 모든 경계와 무장을 해제하고 맙니다. 오늘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이 만남의
표준입니다. 마음과 마음을 알아보는 만남, 내면의 영혼과 영혼이 만나는 만남, 거기에는
영적인 떨림이 있고, 잔잔하지만 묵직한 감동과 감흥이 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갈증을 읽어내고, 그 갈증에 다가서는 것에 진정한 만남에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따뜻한 감정이 ‘공감’이지요.


  제가 최근에 읽은 [천년의 내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문고전의 글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혈구지도(?矩之道), 공존하고 공감하기에
인간이다.’ 혈구지도란 곱자를 가지고 재는 방법이라는 뜻으로,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성찰하니 부족한 것이 많은데, 어찌 부족한
내가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제단하며 평가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헤아리는 마음
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모름지기 서로 공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자이
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함께 식사 후 차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 공감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때 이숙영목사님이 하는 말, “목사님 제가 사역하던 해 뜨는 집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들인데, 정신지체가 있습니다. 그 중에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증)의 성향을 보이는 환자도 있는데, 그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증상이 바로 공감능
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며 새롭게 배우기도 했고, 극히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자
기감정에만 집착되어 있으면 상대방이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아픈지, 힘든지, 고통을 당
하고 있는지 상관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상대방의 내면, 영혼에 관심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죠.
  옛날 사극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지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것이 공감능력입니다. 이
공감이 있는 자가 인간이고 사람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공감할 수 있는 자가 참된 크리스천
입니다. 제자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내면의 영혼을 가꾸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관심을 가지
시는 곳에 저와 여러분도 있기를 권합니다. 새벽, 늦은 밤 기도의 자리, 아침에 드리는 깊은
말씀 묵상의 자리, 일상 속에 나만의 지성소의 자리,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을 자리입니다. 나
다나엘을 보신 것처럼 주님을 우리를 보십니다. 혹 우리가 잊었다하더라도 주님을 기억하십
니다. 그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 간사함이 없는 우리,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우리를 칭찬하십
니다. 그리고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더 놀라운 신비로운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십니다.


 “어떻게 나를 아느냐고 물었느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47절) 이 특급 칭찬의

말씀을 매일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예수님과 공감하고, 한 식구로 묶어주신 한서의 식구들과 공감하고, 이웃과 공감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결단하여 각자의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를
찾아 내면의 영혼을 아름답게 자라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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