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11월 27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1.27 14:17 조회 672 추천 0


2016년 11월 27일 예배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Nov_27)
< 희망의 촛불을 들어라 >  이사야64:1~9


<축복>
  이제 제법 망원동이 제게는 제2의 고향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먼 길 일을 마치고 망원동 초입 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평안하고 좋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러 오신 성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상하게 평안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우리의 영적인 고향인 본향과 닮을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처음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도 낯설지만 마음의 포근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영혼의 고향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살면서 힘들었던 모든 것들, 힘겹게 살면서 가졌던 긴장감, 불안한 마음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주시는 따뜻한 위로를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함께 그 길을 가고 있는 형제, 자매들인 옆에 있는 성도와 친절한 인사를 나눌까요?


  “반갑습니다. 평안하세요.”


<광장의 촛불>
  어제 서울은 촛불로 깊은 어둠에 둘러 있는 대한민국의 밤을 밝혔습니다.
서울만 150만 명, 지방은 40만 명이 모여 전국적으로 90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물론 경찰 추산은 그 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불안한 정국을 이용하는
무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 다 싶어서 조직적으로 총동원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직의 힘으로 불렀다고 하나 작금의 촛불 모임은 그 조직의 동원력을 넘어선
수치입니다. 자발적 참여를 보인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 광장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봅니다. 국민들의 절망을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에 대한 자조적인 분노와 한탄을 봅니다. 자식이 없으니 앞 선 역대
대통령들이 저지른 비리는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대통령을 믿었습니다. 가족과도 거리를 두고
혼자 사니 국민들이 염려하는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곳에서 대형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이 저들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또 하나 광장의 촛불 집회를 보면서 우리는 희망을 봅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 새로운 질서,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열망이 그들을 광장으로 모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런 일이 묻히지 않고 드러났다는 것, 전쟁 혹은 국가 전복과 같은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알려졌다는 것, 정치인들에 비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수준이 높다는 것, 지금이라도 썩은 뿌리
캐어내어 새롭게 기초를 쌓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교회마다, 교단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을 때
부르는 노래는 진정한 희망의 노래가 아닙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만 남았을 때,
그 때 부르는 노래가 진짜 희망의 노래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으로 오신 예수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싹튼 희망도 그렇게 인류에게 다가왔습니다.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그분이 바로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보면 선지자들마다
얼마나 메시아의 오심과 새 시대의 시작을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이 말씀은 남유다 아하스 왕이 치리할 때 주신 예언입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막기 위해 유다에게 동맹을 제안합니다. 아하스는 거절합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합니다. 이에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의 권유를 듣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그 나라에게
예속을 시키고 맙니다. 그 이후 이사야는 아하스 왕을 찾아가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절하고 맙니다.
  이에 이사야는 더 이상 아하스를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희망을 없음을 안 것입니다.
당시 유다의 절망이 무엇이었을까요? 시리아를 등에 업고 동족을 공격해 오던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이었습니까? 도무지 그 속을 알 길이 없는 앗수르였을까요? 새롭게 패권을
장악해 가던 바벨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의 절망은 왕인 아하스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만한 신실함이 없었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때,
더 이상 그 나라에는 희망이 없게 됩니다. 결국 이사야는 유다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유다를 향하여 절망 가운데 전한 희망의 선포가 위에 소개한 메시아에 관한 예언입니다.
아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곳, 도저히 노래가 들려올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이사야 700년 후에 성취될 일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듣지 아니하고
절망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을 간구합니다. 다시 한 번 유다 백성들을 위해
경이적으로 강림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니 분노를 그치시고 한 번만 봐 주시라고
강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그들의 상황은 앞 장의 끝에 슬프고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63:19)


  그들은 가나안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버렸고, 외세에 의해
주의 성소마저 잔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사실 책임은
모두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덧 주의 길에서 떠나 있었고, 마음이 완고해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도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63:17)


  이 고백 속에서 자신들이 걸어 온 길에 대한 회환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환이
젖은 목소리는 그래도 본문에서 주님의 강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자신들을 회복시켜주실 주께 대한 기대가 있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신들을 한껏 낮추는 고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대와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과 고백을
거치면서 비로소 회복의 새 기운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세월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자신감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자신감으로 인해 나라도
반으로 갈랐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 돌아오라고 호소할 때도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으며
가슴을 닫아걸고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자신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강대국들은 끊임없이 침략을 거듭해 왔고, 사람들은 하나 둘 범죄자가 되어갔습니다.
자신들의 의는 금세 더러운 옷 같아졌고, 존재는 잎사귀처럼 시들어만 갔습니다. 죄악이 바람 같이
그들을 몰아갔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주를 찾는 자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분발하여 하나님을
붙잡는 자도 없었습니다. 위기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이 내게 보이지 않을 때,
위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더 절절하게 호소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이런 처절한 절망 상황 가운데 예수님은 희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도저히 희망을
찾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 가운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이 시대 우리가 더더욱
예수님을 고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대통령인가요? 정치인인가요?
더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지도, 찾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더 이상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인 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는 세상,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교회
안에서, 밖에서 자행되고 있습니까.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할 우리마저 하나님을 모르는 것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희망이신 예수님을 더 힘차게
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만이
살 길인 것을 알려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희망이 여기 있다고 빛이신, 희망의 촛불이신 예수님을
이 땅 대한민국 가운데 전해야만 합니다.


<희망을 노래하다>
  [사진자료; 지라니 합창단] 세계 3대 빈곤 지역 중에 하나인 케냐의 쓰레기 마을 ‘고르고초’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사는 10만여 주민들은 수도 나이로비 사람들이 실컷 즐기고 버리는 매일
수십 톤씩 쏟아지는 쓰레기를 뒤지며 하루하루 매캐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면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술과 마약에 취해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야 합니다. 케냐 정부는 이곳
주민들의 삶을 방관한 채 강제 철거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냐 정부에서조차 버린 이 마을로
한국인 목사 한 명과 지휘자 한 명이 찾아갑니다. 태어나 한 번도 악보를 본 적도, 노래를 배운 적도 없는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시작된 합창단이 ‘지라니 어린이 합창단’입니다. 합창단이 생긴 이래 이 쓰레기
마을에는 잔잔한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종일 쓰레기장을 배회하던 아이들이 하루 4시간씩
노래 연습을 하는 아이가 되었고, 폭력과 마약에 노출된 채 매일 생존과 싸움하던 아이가 외국으로 공연을
다니며 음악선생님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그들의 공연을 볼 만큼 그 합창단은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 때문입니다.
분배와 나눔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다룰 만큼 심각했습니다. 지금은 잘 수습하여 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그들의 아름다운 변화와 감동적인 일상 이야기를 시진작가 신미식 선생이 사진과 글로 담아낸
책으로 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지라니 합창단, 희망을 노래하다]입니다.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곳에서, 도저히 노래가 들려올 것 같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서 노래가 들려올 때 희망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기다림의 초, 희망>
  우리는 지금 강림절, 대림절의 첫 주를 맞이했습니다. 강림절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첫 강림을 기념하며 우리 자신을 정돈하는 때이고,
마지막 날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 절기 때 매 주 초를
켭니다. 그 첫 번째 초는 바로 희망을 상징합니다. 아무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쓰레기 더미와 같았던
이 세상에 희망의 노래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습니다. 쓰레기처럼 버려진 인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전하는 향기요 편지로 쓰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지금 이 때,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들어야할 촛불은 바로 이 기다림의 첫 번째 초 ‘희망의 촛불’입니다.
쓰레기 더미와 같은 이 대한민국을 변화시키는 힘은 지금 광장의 촛불만으로 안 됩니다. 이 땅의 궁극의 희망이며,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님, 진정한 희망의 촛불이신 예수님, 인류를 구할 유일한 이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온 땅 가운데 알려질 때 멀찍이 계시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보일 때
치유와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쟁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과 개인사의 잘 됨과
막힘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만이 살 길입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고치고, 싸매고 다시 일으키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찾고 있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자들과 대한민국 백성들에서 ‘희망의 촛불’을
들어야 합니다. 알려야 합니다. 외쳐야 합니다. 진정한 희망이 여기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입니다.


<기도>
  겨울철의 사순절인 강림절,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삼가 믿음의 옷깃을 여미고 내 안에 희망이신
예수님이 계신지, 그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며, 닮아가고 있는지 엎드려 살피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이 희망의 촛불을 높이 들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희망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이 대한민국이 희망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과 역사로 대한민국 위에 치유와 회복과
부흥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12월 4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11월 27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11월 20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