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11월 13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1.13 13:34 조회 659 추천 0


2016년 11월 13일 예배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Nov_13)
<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  누가복음18:9~14


<축복>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가 더 커져만 갑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시국 선언문에 이름을 넣어야 하는지?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이 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착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미국 대통령 45명 중에
하나에 불과합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18명 중에 하나입니다. 흘러갈 것입니다. 넘어갈 것입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선하시고 진실하신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래도 감사할 일’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처럼 부정의 기운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이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신앙의 언어, 긍정의 언어로 그래도 희망이 있음을 전하고 알려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 차별되었다고 보기에는 부끄럽지만 우리 믿는 이들 만이라도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고, 거짓말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기독교인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며,
내가 해야 할 일 앞에 더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때에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와서 기도하면
더욱 좋지만, 그럴 수 없다면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 각각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들은 매우 비교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리새인은 매우 정돈된 삶을 살아왔고, 그의 지나온 이력은 자랑할 만합니다. 반면
세리가 살아온 인생은 매우 지저분합니다. 그는 매우 혐오스러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성전에 들어갈 때도 매우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과 따로 서서 매우 당당한 어조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렇게 서서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 즉
    사기꾼, 죄인, 간음을 행하는 자와 같지 않고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칩니다.’(11~12절) 


  우리는 바리새인의 이 기도를 보면서 그가 살아온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욕심 없는 삶을 살았고, 불의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음탕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성실하게 드리고 있었습니다. 613개의 율법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 그는 늘 자신을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의인이라고 자신하고
있었고,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또 한 사람, 같은 시간 같은 성전에 올라갔던 세리는 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걷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에
들어간 것처럼 성전에 들어가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뜸한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 사람은 그럴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이 그를 의식하면서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기도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악인이고 사람들이 경멸하는 대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로마 정부와 결탁해서 동족의 희생을 먹고 살아가는 매국노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그를 대하는 것도, 세리 자신도 사람들을 의식한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에 대해서 심각한 갈등을 느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리 역시
기도하는 장면에 대해서 매우 섬세하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13절)


  세리는 성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멀리 섰습니다. 멀리라는 것은 지성소
가까운 곳까지 차마 가지 못하고 멀리 이방인의 뜰에 서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기도 자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리는 일반적인 기도 자세조차 취하지 못할 만큼
심각하게 자기 죄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는
행동은 슬픔과 회개를 나타냅니다. 그의 마음의 상태를 짐작하게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차마 하나님 앞에서 입을 떼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염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기껏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대표적인 참회시인 시편 51편으로
그는 자기의 마음을 대신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반전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정작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바리새파 사람보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4절)


  어떻게 이렇게 상식을 파기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문제는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다른 사람을 멸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의로웠을
것입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구나 세리와는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고 있었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 때문에 그는 그만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겸손이 없는 의로움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그 의로움을
길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의로운 사람이 그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할 수 있다면 그의 의로움은 결코 변질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의의 경지에 이르거나, 세상적인 인기와 권세와 권력을 가진 자의
겸손은 정말 어려운 가 봅니다. 전 민정수석 우영우 씨의 기자 인터뷰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보여 주었던 거만한 모습이 국민들의 분노를 더 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겸손은 어려워’ 라는 노래를 부른 조영남씨는 과한 욕심으로 대작 논란으로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남들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겸손하게 사는 것이 참 어려운 가 봅니다.
우리는 아마도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겸손과 교만 사이에서 끝까지 싸워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을 보십시오. 신앙과 경건의 영역에서조차
자기가 무엇인가를 이루었다고 여겨질 때 겸손하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경건을 자랑거리고 삼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있지만 사실은 사람을 향해 돌아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경건함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이 그랬습니다.
그는 이미 기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다른 사람과 따로 서서 기도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우월감을 그의 태도로 나타내고 있었고,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기도함으로써 그의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세리가 워낙
죄인이었기 때문에 세리처럼 살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속에 담긴 멸시의 감정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신의 기도와 공적이
아무리 크다 해도 교만 하나로 모든 것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봉사를 하고 선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가 교만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얻지만 교만은 하나님을 잃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세리와 비교가 됩니다. 세리가 죄인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와
한자리에서 기도하기를 꺼려한 것도 사실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세리가 잘 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저질러 온 행실 이면에 하나님을 향한 겸손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개를 떨구고 용서만을 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디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마음을 나눌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약함이, 부족함이 오히려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인간의 의라는 것이 사람의 눈으로 보면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촛불을 들면서 그 빛으로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이 옳습니다. 비선정치라는 것에 자유롭지 못한 야당을 포함
모든 정치인들의 성찰이 먼저이어야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정작 중요한 기준은 교만하느냐, 겸손하느냐 입니다. 교만하면 결국 하나님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겸손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드러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칭찬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사람은 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될 때 마음속에
분노의 똬리를 틀게 됩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이런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자기 자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존경받고, 존중을 받는 사람의 인격은
자신이 자랑하지 않아도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인정이나 명예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 결코 자기 능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예수님 닮기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에만
우리의 마음을 쏟는다면 우리의 영혼을 빈약해질 것이고 그 영혼은 병들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인정받기만을
바란다면 그는 항상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림으로서
자기가 높아질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가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기도했다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을 금기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고, 겸손한 자를 최후에 높이시고, 겸손한 자를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우리의 교만을 일깨우십니다. 잊을만하면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셔서 가르치십니다.
교만한 사람의 끝이 어떤지를 보여주십니다. 지금 대한민국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겸손해 지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큰 용기를 내어서 겸손을 선택할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정직하게 살피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 하십니다.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지만 교만하며 하나님을 잃기 때문입니다.
  내가 겸손에 가까운 사람인지, 교만에 가까운 사람인지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먼저 인정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나를 먼저 인정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의 인격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내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가급적 모두가 좋은 쪽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자기 생각이 절대 기준입니다.
내가 항상 옳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 속에는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함께 있죠. 교만과 겸손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산다는 것이 정확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고민이며,
숙제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은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짓말로 사람의 마음을 살려고 하는 사람과 힘이 있다고 그 힘을 교만하게
떵떵거리며 산 자들의 끝이 어떤 것인가를 생생한 교훈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으로 살지 말고, 세리로 살아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라.”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마지막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더욱더 겸손하게 삽시다.


<기도>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역시 세리만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겸손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존경심을 갖고, 마지막이 아름다운
진정한 축복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11월 20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11월 13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11월 6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