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10월 16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0.16 13:42 조회 698 추천 0


주일예배설교(2016_Oct_16)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사도행전18:1~4


<형제적 동지애>
  새벽에 로마서 말씀을 나누면서 깊은 공감과 은혜를 받은 내용을 먼저 소개하며
설교의 문을 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도움으로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이 이해한 세계관으로 땅 끝은 서바나, 지금으로 말하면 스페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동지들과 이렇게 당시에 먼 거리에 있는 사람끼리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방법이었던 편지를 주고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복음 전도자로 사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많은 어려움과 불편과 박해를 각오해야만
했을 당시에,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위해 투신하다가 이렇게 안부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공동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끼리 느낄 수 있는 형제애,
동지애를 보면서 저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큰 위로와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 신령한 교제의 기쁨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옆에 있는 성도와 형제적 동지애를 갖고 인사를 나눌까요?


   “00이 있어 제가 든든합니다.”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사도 바울에게 뜨거운 형제적 동지애를 느끼게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강조점을 두고 싶은 내용 중에 하나 결론적인 말씀을
먼저 드린다면 사명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종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협력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협력하여 일 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기에 서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의 동지와 친구를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기치 않은 성령의 인도로
선교의 지평을 그리스로 확장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불모지인 그리스는 성찬을
차려놓고 바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고, 데살로니가에서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피해서 베뢰아로 갔지만 유대인들은 그곳까지 원정을 와서 바울 일행을
괴롭혔습니다. 쫓기다 시피해서 내려간 아테네에서의 복음전파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아무리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던 바울이지만 이쯤 되면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극심한 마음의 동요를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때의 자기 마음의 정황을 이렇게 진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는 약하였으며, 두려워하였으며,
    무척 떨었습니다.”(고전2:3)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꼭 강철 같은 심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들보다는 때때로 흔들리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 오히려 주님의 쓰임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이 당도한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의 루시우스 뭄미우스(Lucius Mummius) 장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46년경에 율리우스 씨저(Julius Caesar)에 의해
재건된 이후 바울이 이곳에 당도했을 무렵에는 무려 60-70만 명의 주민이 사는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당시의 인구 밀도를 생각해보면 고린도가 얼마나
큰 도시인 줄 알 수 있을 겁니다. 아테네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면 항구 도시였던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여신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무려 1,000명이나 되는 창녀 겸 여사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지에서 돈이 모여들고, 신전 창녀들이 들끓는 그 도시에서 바울은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암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면 꼭 그 일을 돕는 이를 보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도시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본도(Pontus, 터키 북부의 흑해 연안 지역) 출신인 아굴라는 일찍이 로마로 이주해서
천막짓는 일을 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글라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유대인들이 로마를 떠나야 했을 때 그들 내외도 고린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고린도를 택했을까요? 대도시였으니
일감이 많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이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이 사실은 필연일 때가
많습니다. 랍비 교육을 받을 때 천막 기술을 배웠던 바울은 이미 복음을 영접했던
그들 내외의 집에 머물면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라는 낯선 도시와의 접촉점은
그렇게 마련되었습니다. 그는 주중에는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노동과 선교를 병행하다가 나중에 실라와 디모데가
당도한 뒤에는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동행의 법칙>
  바울이 또 다른 선교지인 에베소를 향해 떠날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동행하였습니다. 그들은 복음 전도자인 바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 위해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또 다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비상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밥벌이가 아니라 복음전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그들 부부는 에베소에 온
아볼로라는 사람을 데려다가 복음의 진수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미 깊은 학식과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그를 도와
하나님의 종으로 바로 세웠던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은 자기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에
그들 부부를 감사함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롬16:3-4)


  바울은 그들 부부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를 위해 생명의 위험도
무릅썼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복음의 대의를 위해 삶의 안일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과 만난 후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든든한 동행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 한 길을 걸어가는 벗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런 동행이 있습니까?


 이현주 목사님이 < 동행의 법칙 > 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왼손은 왼손
    오른손은 오른손이다.


    살아 있는 동안
    왼손은 왼손의 길을 가고
    오른손은 오른손의 길을 가거라.
    그러나
    따로 놀아서는 안 된다.
    사실은
    따로 놀 수도 없는 신세다.


    일을 할 때에
    작은 일 따위는 각자 알아서 하되
    무거운 항아리를 들 때에는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그래도 맞잡지는 말아라.
    두 손을 맞잡고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 말고는!


  왼손은 왼손의 길을 가고, 오른손은 오른손의 길을 가고 따로 놀지는 않는 것,
일을 할 때는 각자 알아서 하지만 무거운 항아리를 들 때는 함께 힘을 모으는 것,
바로 그것이 이현주 목사님이 생각하는 동행의 법칙입니다.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글 잘 쓰는 시인이 참 부럽습니다.


  노트르담과 예일과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라르슈(L’Arche) 장애인공동체’에서 형제들을 돌보며
진정한 자기 정체성과 행복을 알린 헨리 나우웬을 알 것입니다. 그는 그가 돌보고 있는
애덤을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시대의 석학이며 영성가가 말입니다.
애덤이 가르쳐준 것 중에 하나가 함께 일하는 것이 혼자 일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실까요?


   “나는 혼자 힘으로 해내려고 안달하는 세상에 있다 왔으나, 여기 너무도 연약하고
    무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애덤이 있었다. 게다가 나 또한 혼자서는
    애덤을 도울 수 없었다. 애덤도 나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라르슈에는 브라질,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에서 온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애덤을
    비롯한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중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애덤이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의 필요와
    연약함 덕분에 우리는 참된 사랑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워낙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인 까닭에 애덤이 거기 없었다면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약함은 우리의 힘과 구심점이 되었다.”


  헨리에게도, 애덤에게도 서로에게 선생님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멋지고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누군가 나와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동행을 느낀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안과 힘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게 되는 희망의 뿌리입니다.
  지금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나로 인하여 진리의 길을 바르게 걷고 있습니까?
함께 길을 가는 그의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에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행보가
가뿐하다면, 나는 그의 좋은 동행입니다.


<라피끄, Rafik>
  ‘라피크’라는 생소한 단어를 제가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라피끄(Rafik)’라는 단어는 ‘먼 길을 함께 할 동반자’ 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좋은 동반자의 필수 조건은 공감입니다. 공감은 어두운 터널 안에 있는
사람에게 터널 밖으로 어서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터널 안으로
들어가 묵묵히 옆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비를 맞고 있다면 함께
비를 맞아 주는 일입니다.
  악성 베토벤의 성공에는 이런 공감의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천둥이 치는 어느 날, 소년 베토벤이 마당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뭇잎에 스치는 비와 바람의 교향곡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집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아들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비를 맞으며 “그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은 신이 났습니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말합니다. “엄마, 새소리가 들여요.

저 새는 어떤 새죠? 왜 울고 있어요?”  어머니는 폭우처럼 쏟아내는 아들의 사소한

질문에도 다정하게 대답을 해줍니다. 위대한 교향곡은 아마 이미 그때 밀알처럼

싹이 돋아 이후에 완성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동반자를 원합니다. 인생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책이 있습니다. 바로 나 스스로 좋은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홀로 비를 맞는 상대에게 조용히 다가가 함께 비를 맞는 일입니다.
내가 다가가면 그도 다가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동행이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희망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특히 고통 받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가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죽어가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여 더불어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어 바울은 마음이 든든했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삶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
  신앙의 여정 중에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친구, 신앙의 동반자가
제 곁에 있어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 앞으로의 우리의
삶의 여정 중에 나로 인하여 또 다른 믿음의 동무가 길을 찾고, 희망을 갖으며,
생명을 얻는 아름다운 일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하시고, 내가 먼저 다가갈 사랑과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10월 23일 예배 설교 입니다.
■ 현재글 : 10월 16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10월 9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