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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9일 예배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10.09 13:40 조회 716 추천 0



주일예배설교(2016_Oct_9)
< 그 얼굴만 대하면 >  빌립보서2:1~4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
   “진정으로 굳은 결속(하나됨)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책에서 만난 글귀입니다. 참 좋은 글입니다. 한 번 읽은 글인데 생각 속에서 떠나지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어야 친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말을 해야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언어가 있습니다. 마음의 언어입니다.
마음이 통하니까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압니다. 느낍니다. 믿어줍니다. 동의해줍니다.
따라갑니다. 침묵이 불편하지 않는 사이의 사람, 이런 사람이 여러분과 저의 주변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옆에만 있어줘도 힘이 되고, 얼굴만 바라봐도 웃음이 나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 얼굴 >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 앉아 바라보고 싶은


  함석헌 선생님은 그 얼굴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한 평생을 살면서 그 얼굴을 만난다는 것,
그 어느 복보다 가장 큰 복일 것입니다. 우리를 한서의 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묶어 주셔서
한 가족으로 살게 하신 것은 지체 서로에게 이런 얼굴이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얼굴만 대하면 많은 말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습니다. 웃음이 나오고 손이 갑니다.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고, 평안하고, 희망이 일어납니다. 당장 죽을 것처럼 힘든 한 주간을
보냈다하더라도 그 얼굴만 보면 그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분노와 화로 가득 차
당장이라도 큰일을 낼 것만 같은 사람이 교회에 와서 그 얼굴만 대하면 그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립니다. 참 희한한 일입니다. 참 신비로운 묘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낯설지만 저와 여러분을 한서의 한 가족으로 묶어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복된 날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겸손을 배우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로 그 '얼굴’ 이었습니다. 정말 행복한 목회자이지요.
편지 앞부분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빌1:3)


  누군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떠오른다는 것은 그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있는 것이지요.
내가 누군가의 감사를 떠올리게 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것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이 담긴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되던 첫 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기쁘게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내일의 기대와 확신을 갖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특별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마지막 그 날에 그 모든 선한 일을
    확실히 완성하실 것입니다.”(빌1:6)


  ‘선한 일’은 물론 구원에 관련된 일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고,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한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안전한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다소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때로는 손해도 보아야 하고,
때로는 애매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어느 때는 심지어 욕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나’로부터 해방되어 그 모든 것을 다 수용하기에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 끈질기게 머문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다양한 욕망이 충돌하고,
생각하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다른 이들과 충돌하다보면 서로를
꺼리게 되고,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해지고, 심지어는 미워하는 마음이 깃들기도 합니다.
  빌립보 교회 역시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욕구, 자기가 중심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충돌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곤 합니다.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기를 들어내려는 욕망을 줄이고, 주님을 높이고, 타자를 높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알토의 존재감>
  지난주에 김주혁권사님의 아들 김성진집사의 연주회가 있어서 모처럼
예술의 전당을 다녀왔습니다. 독일 퀠른대학 출신 동문들이 주최한 연주회였습니다.
성악과 현악 두 장르로 수준 높은 연주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성악에서는 김성진집사가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어 가장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악 5중주와 3중주의 연주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연주를 들으면서
제 취향은 멘델스존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현악 연주를
듣는 중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매료되었습니다. 저음부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도드라지진 않지만 그 소리가 다른 소리를 품어서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서울시 오페라 단장인 이건용 선생님이 쓴 <알토의 존재감>이라는 칼럼을 읽으면서도
공감하였는데, 그 글이 떠올랐습니다. 합창에서 주선율을 맡으면서 음악을 리드하고,
그 음악의 표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소프라노입니다. 베이스는 저음이지만
음의 틀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잘 들립니다. 테너는 물론
높은 소리이기에 당연히 잘 들리지요. 그에 비해 알토는 선율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화성 진행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알토의 존재감이 좀 적습니다.
그런데 이건용 선생님에 의하면 알토는 전체 합창 소리를 풍부하게 만드는 협력자입니다.
소프라노 혹은 테너와 협력하여 화성을 완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토는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감이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이든, 공동체이든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하나 됨을 위해 협력하는
역할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낮은 섬김이 아름답습니다. 음악이든, 공동체이든 자기를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싶은 이들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지만 사람이 완벽하지 않듯, 교회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의 비뚤어진 경쟁의식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저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빌2:2-3)
하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성령 안에서 서로 깊이 사귀는 것, 누군가를
돕기 위해 협력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조금 직접적으로
지적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빌2:3-4)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 원리는 '겸손한 마음' 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입니다. 이 마음이 없어 교인들이 서로 상처를
받기도하고, 주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와 무관한 이가 없는 곳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선물로 주려는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개의치 말고 나 보다 높게
여기는 존중의 마음과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대우를 했든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으로 사랑만을 주겠다는 겸손으로 대하면 그 얼굴에서 예수님이
보일 것입니다. 그 얼굴만 대하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평안하고,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일어납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소통을 이루기 위한
억지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공감합니다.
그래서 침묵이 전혀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곁에 있음이,
함께 가고 있음이 든든하고 좋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못난 놈’은 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상대방과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살피는 사람입니다. 제 잇속만 챙기는 깍쟁이가 아닙니다. ‘얼굴만 봐도’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잘 생기고 못생기고를 떠나서 그 사람의 영혼의 풍경이 새겨져 있는
얼굴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 생기지는 못했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잘 생겼지만 왠지 정이 가지 않는 얼굴도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은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얼굴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은혜의 통로, 생명의 통로,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에 보면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된다고 하더군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줄 알았는데, 너무도 쉽게 무정하게
떠나버리는 얕은 사랑을 풍자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역으로 ‘남’이라는 글자에 ‘나’를
드러내려는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낯설지만 우리는 한서의
한 식구로 묶어 주신 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으로 겸손히 나를 지워서
얼굴만 바라보아도 좋은 사랑하는 ‘님’으로 함께 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한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겸손하게 삽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삽시다. 그래서 그 얼굴만 대하면
감사하게 되고, 미래가 기대가 되고 구원의 완성에 대한 확신을 주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를 한서 공동체라는 한 식구로 살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낯선 우리를 한 가족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하옵소서. 겸손히, 남을 낫게 여기며
사랑의 빚만 지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 얼굴을 바라보는 이에게 감사와 희망을 전하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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