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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월 1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6.19 13:37 조회 974 추천 0


2016년 6월 1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June_19)
< 여호와 앞에서 >  사무엘하6:12~22


<어린이가 된 마술사 할아버지>
  우리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라는 찬양을 부를 때면 항상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마술사 할아버지 성도님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뒤 늦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어떡해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늘 생각하며 공적인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령의 감동이 되어서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마술이니, 이 마술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것 같아 예배당의 문을
잠그고 강단 앞에서 마술을 시작합니다. 신문으로 꽃을 만들어서 보여드립니다. “하나님 예쁘죠?”
또 꽃을 만지는가 싶더니 비둘기 한 마리가 어느새 나타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놀라셨죠?”
  마술사 할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서 재롱을 부리듯 자기 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잘 하는 마술을 한껏 뽐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생각에 더 없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생애 공연 중 가장 멋진 공연을 멋지게 마무리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고 기뻐했던 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너무도 친근한 다윗입니다. 헤브론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룬 다윗은
도읍을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궁전을 건축한 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법궤는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 법궤를 통해 가나안 정복 사역을 친히 진두지휘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왔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정복이 다윗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시내 산 언약에서 명시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이때 비로소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중차대한 사안임에도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지나가는 듯이 끼여 있는 사건이지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을
한 번 집어주고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깊이 공감할 것입니다.


  다같이 사무엘하6장 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바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이것이 왜 실수였을까요? 더군다나 헌 수레가 아니라 생각해서 새 수레에 싣고 운반했습니다.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궤를 존중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법궤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습니다.(출25:14~15, 민3:30~31)
다윗이 이렇게 실수 한 것은 그가 율법에 대해 정통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당시의 블레셋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했는데 다윗이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이 실수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실수로 인하여 ‘웃사’ 라는 젊은이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후 진정으로 회개하고
율법에 의거해서 레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하게 합니다.(대상15:11~15)
이때의 장면을 성경은 매우 흥겹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사무엘하6:4~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납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그야말로 축제입니다. 수금은 ‘칸노르’ 라고 하는데 신약성서에서는 거문고라고 불렀습니다.
비파는 하프의 일종이지요. 양금은 박자를 맞추고 흥을 돋우는 탬버린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연주하더라’ 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사하크’‘뛰놀다’, ‘즐거워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악기들로 단지 연주만 한 것이 아니라 온통 축제 분위기에 젖어 뛰놀며
즐거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여호와의 궤를 최선을 다해 모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3절) 신학자들은 다윗의 이 제사를 ‘육보제(六步祭)’ 라고 말합니다.
‘여섯 걸음을 행한 후’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치 불가에서 삼보일배를 하듯이 여섯 걸음을 가고 매 번 제사를 드렸다는 뜻인지,
여섯 걸음 후 한 번만 제사를 드렸다는 뜻인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립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다윗이 그만큼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이 이 말씀의 절정, 크라이막스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14~15절)


  다윗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춥니다. 우리는 너무 좋으면
서로 얼싸안고 껑충껑충 뜁니다. 그러다가 울지요.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이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했고, 기뻐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사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온힘을 다해 몸으로도 표현합니다. 이때 다윗은 베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베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격식을 갖춘 에봇이라기 보다는 당시 운반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이 입었던 세마포 겉옷이나 양털조끼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왕복을 벗고 에봇을 둘렀던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한껏 자신을 낮춘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에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의미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경멸스럽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딸 미갈입니다.
본문은 이 미갈을 다윗의 아내로 소개하지 않고 사울의 딸로 소개합니다. 의도가 있습니다.
이 미갈이 다윗의 신앙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법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아버지 사울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춤추는 다윗을 경멸합니다.
아무리 신앙적인 열정과 감격에 겨워 한 행동이라고 해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왕복 대신
베옷을 입고 맨살을 드러낸 채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행동이 왕의 체면과 품위를 손상시키는
철없는 행동이라고 본 것입니다.


  논어의 학이 15장에 보면 자공이 묻습니다.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으며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그러자 공자선생님이 답하십니다.
  “그것도 좋지만 가난하되 즐거워하며 부유하되 예를 갖추는 것만 못하니라.”


  가난하되 아첨함이 없는 것도 체면이고, 부유하되 교만함이 없는 것도 체면인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내면에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미갈은 내면의 기쁨 보다 외적인
체통이 중요했고, 다윗은 외적인 체통보다 내면의 기쁨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도 기쁘고,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신 다윗도 기쁘고, 성군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기쁩니다. 이제 다윗은 춤을 멈추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에게 축복합니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고 떡 한 개, 고기 한 조각,
건포도 떡 한 덩이씩 손에 들려 보내는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했을까요?


  그러나 미갈의 마음엔, 여호와의 궤를 모시는 것에 대한 기쁨도,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행복도, 백성들과 떡과 고기를 나누는 감격도 없었습니다. 미갈에게는 오로지 왕의로서
점잖지 못한 다윗의 행동에 대한 거슬림뿐이었습니다.


  옷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체통을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허울의 감옥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다윗은 체통을 벗고 하나님 앞에 있었지만,
미갈은 사람 앞에서 체통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멸하는 미갈 앞에서 다윗이 강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21~22절)


  다윗이 여기에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입니다. 다윗의 춤은 하나님 앞에서의
행동이었습니다. 그에게 계집종 앞에서의 체통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순수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의 아내로 살지 못하고 사울의 딸로서만 행동하고
맙니다.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가 보다 사람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나아갈 때에 주시는 영적인 기쁨,
내면의 감격을 이해하지 못하니 비난한 것입니다. 결국 그녀의 다윗을 향한 멸시와 비난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녀는 하나님이 다윗의 가문에 내리신
복의 반열에 들지 못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세상과 사람을 향해 서 있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 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주시는 감동에 따라 순수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향해 춤추는 삶을 살아가시기
축원합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이 고백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순수한 감동과
행복을 회복하게 됩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신경 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 춤을 추며 찬양하는 그 감동과 행복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우리 다같이 에베소서1장 3~6절까지의 말씀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이토록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육신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자신의 체면을 지켜주는 것도 아닌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 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 그것이 무엇이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찬송하는 이유는 오직 그거 하나였습니다.
  미갈이 왜 불행한 여인인지 아십니까? 믿음의 사람 다윗의 아내이면서도, 여전히 사울의 딸로서
분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다윗의 순수한 신앙을 경멸하다가 끝내 불행한
일생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고 맙니다. 체통의 노예가 되지 말고, 허울의 감옥에서 평생 지내지도
말고, 하나님을 향해 춤추었던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해 찬송했던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사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서면 어린아이가 됩니다. 내 영혼이 노래를 부르고,
어느새 춤을 춥니다. 그렇게 평생 찬양하며 기뻐하며 행복하게 사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앞에서 평생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주옵소서. 단지 사람의 자녀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향해 선 존재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늘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고백하는 찬양이 넘쳐나는 행복한 매일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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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복 2016.06.20 10:45:4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