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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월 1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6.12 13:43 조회 958 추천 0


2016년 6월 1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June_12)
< 다 내려놓고 싶을 때 >  열왕기상19:1~14


<위기의 남자, 김현수>
  [사진자료; 김현수선수] IMF시절 공주 출신의 골프선수 박세리와 야구선수 박찬호를 통해서
많은 위안을 받았고, 희망을 가졌지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유래 없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있는
많은 한국 선수들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진자료에 소개된
‘김현수선수’입니다. 김현수 선수는 국가대표 선수는 당연하고 국내 프로야구에서 정상을 달리는
선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도 진출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구단이
볼티모어 오리올스팀입니다. 그런데 시범경기 중 23타석에 들어섰으나 안타 하나를 치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구단도, 국민들도 실망을 했지요.
  개막전에서 선수를 소개하는데, 관중들이 야유를 보냅니다. 감독의 눈에 났습니다. 당연히 게임을
뛸 기회가 없었지요. 그렇게 벤치 신세를 지고 있을 때 눈치를 보고 음료수를 꺼내는 장면이 화면에
캡처가 되었나 봅니다. 그 이야기가 국내에서도 인터넷과 방송으로 회자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였지요.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따뜻하게 돌봐준 동료와 코치가 있었습니다. 그 팀의 주장인 아담 존스는 개막 전에서 보낸
팬들의 야유를 질책하며 김현수 선수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선수로 뛰어본 경험이 있는
타격 코치 스콧 쿨바의 도움으로 기회를 얻었고, 그 기회를 잘 살려 지금은 ‘팀을 변화시키는 선수’라는
극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첫 홈런도 치고, 멀티 안타도 쳐서 우승에 크게 기여했을 때 동료들이 이제 눈치 보지 말고
음료수를 먹으라고 농담을 할 만큼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남자, 엘리야>
  오늘 본문에도 잘 나가던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실망해서 누워있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파워가 넘치는 한 사람을 고르라면
성경을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엘리야를 들 것입니다. 그는 바알 선지자 450명을 칼로 벤
사람이고, 아합에게 당당하게 맞서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입니다.


  고대 페니키아에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본래 두로와 시돈은
고대 페니키아에 속한 한 나라의 두 도시인데 두 지역 사이의 지형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까
서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마치 두 나라처럼 갈라져 있었습니다. 당시 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돈은 쾌락과 우상의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 아합이 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이 시돈 왕의 딸과 정략적인 결혼을 합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왕궁에 들어오면서 비와 풍요의 신 바알을 가지고 옵니다. 마치 평화롭고 고요하던
마을이 개발의 바람을 타고 들어온 돈의 유혹 앞에서 오랜 이웃끼리 원수가 되고 동네 전체가 갈등에
휩싸이고 말 듯이 이세벨이 가지고 들어온 비와 풍요의 신 바알은 이스라엘을 온통 갈기갈기 찢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레위기 25장에서 그려주신 희년의 정신을 지켜나가는
평화로운 신앙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평등보다는 경쟁을 선택했고 서로 나누기 보다는
속이거나 사람을 죽였습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지키려다가 살해당한 나붓은
그 시대 백성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때 등장한 선지자가 엘리야입니다. 바알 숭배자들과 엘리야의 투쟁은 갈멜산에서 있었던
450명의 바알 선지자의 대결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 싸움에 앞서 엘리야는 바알주의에 이미
중독되어 버린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왕상18:21) 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납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을 기손 강가로 끌고 가서 거기에서 그들을 모두 죽입니다.
백성들은 비로소 다시 제 정신을 차립니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다스리시는 신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비로소 그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채 승리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고독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엘리야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갈멜 산에서의 그의 당당했던 기개는 사라지고 급속도로 위축되어 버립니다. 다른 성경에 서 그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소개합니다.


   “엘리야는 두려워 떨며 목숨을 구하여 급히 도망쳤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밖의 문제라기보다는 ‘내면의 문제’
곧 ‘자아’의 문제
였을 것입니다. 갈멜 산에서의 한 번의 승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내면의 빈곤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지성인들의 일탈을
보게 됩니다. 대학 교수, 의사, 판사, 변호사 그리고 거기에 성직자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아, 내면의 빈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것이 죽을 만큼 힘들었나 봅니다. 도망 길에 오른 엘리야는 남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도착합니다. 그는 그곳에 사환을 두고 홀로 광야로 하룻길쯤 더 들어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향해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우리는 엘리야의 자조와 비애 섞인 말을 통해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엘리야의 이 변화가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당황스러우십니까? 아니면 공감이 가는 모습입니까?
  엘리야는 그렇게 울부짖다가 어느새 잠이 듭니다. 잠든 엘리야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 보면
한편으로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위대한 예언자의 이 인간적인 이면이
나와 너무 다를 바 없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훗날에 야고보는 엘리야의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5:17)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굴곡이 심한 삶을 삽니까? 얼마나 자주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합니까? 그러나 그게 인간임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언제나 영웅적일 수 없고,
언제나 승리감에 도취될 수 없고,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를 어루만지십니다.
다같이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를 통해 엘리야를 만나시는 하나님의 방문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걱정 마,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 라는 막연한 말로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선지자답지 못하게
이게 무슨 꼴이냐?” 하며 책망을 하지도 않으십니다. 천사는 아무 말고 하지 않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그의 머리맡에 놓아둡니다.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다시 드러눕습니다. 아직 마음의
상처가 풀리지 않은 것입니다. 천사는 얼마간 기다려줍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어루만집니다.
7절 말씀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아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


  이 ‘어루만진다’ 는 표현이 얼마나 친근합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껴 보셨습니까? 주님이 오셔서 내 영혼의 상처 난 곳, 굳은 곳을 어루만져주셔서 영혼을 따뜻하게
보담으시는 평안의 체험이 있으십니까? 우리에게는 이 어루만짐이 필요합니다. 김현수 선수에게도
어루만짐이 필요했습니다. 정상에서 살다가 음료수도 눈치를 보며 먹어야 하는, 바닥으로 내려온
비참한 현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엘리야는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리고 힘을 내서 호렙 산을 향해 갑니다. 40일을 밤낮으로 걸었다고
했습니다. 걷는 것은 우리의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혹은 중요한 사명을 맡겨야 할 때 당신의 사람들을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기로에 섰을 때도 모리아까지 사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세를 걷게 하셨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걷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도
이 걸음걸음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스름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엘리야는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엘리야는 이 솔직한 대화를 통해서 결정적인 치유를 받게 됩니다.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이 모르셔서 이렇게 물으신 것이 아니죠. 일종의 선문답입니다. 자기가 왜 이 호렙 산에까지
와야 했는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게 하시려는 물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항상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기서 그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10절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다같이 읽겠습니다.


   “엘리야가 대답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저는 언제나 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단을 부수고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예언자는 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저까지 죽이려 합니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이없이 죽임을 당하고 오히려 불의한 사람들은 멀쩡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각할 만큼 부정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태의 진전, 내 기대와 다른 사태의 결말,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었고 자기 존재의
기반이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이제 하나님이 처방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1~12절)


  여기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원래 바람이라든지, 불, 혹은
지진 같은 현상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당연히
그 현상 중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야의 편견일 뿐이었습니다.
본문에서의 바람이나 불이나 지진은 그저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중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고 놀랍게도 세미함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일개 인간 앞에서 이렇게까지 하시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단정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좁은 생각에 하나님을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 계속 반복된 표현이 무엇입니까?
‘거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입니다. 바로 이 말씀 앞에 우리 또한 내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당연히 주님이 계시다고 생각했던 그 현상 안에 놀랍게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불은 엘리야가 불과 며칠 전에 갈멜 산에서 생생하게 체험했던 것이
아닙니까? 여호와의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은 것이
40여 일 전에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필요했던 임재 방법이었습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필요한 건 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세미한 소리로 그에게 오셨습니다.


  여기서 세미한 소리라는 것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데마마 다카’ 라고 되어 있습니다.
‘데마마’는 침묵, 고요, 잔잔함, 속삭임을 의미하고, ‘다카’는 여성형으로 고운, 미세한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바늘이 떨어져도 들릴 만큼의 고요와 침묵 속에 엘리야를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란한 역사 뒤에는 반드시 고요한 평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력한 표적이나 능력에 의해서 요란하게 돌이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록 들릴 듯 말 듯한
세미한 소리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귓전에 들려올 때, 그리고 성령의 의한 깊은 내적 통찰이
있을 때 비로소 돌이켜진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갈라디아서 3장 23절~25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의 차이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신앙생활에 기준이 되었었지만, 그러나
율법의 역할은 한계가 분명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만이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온 후
즉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어떻습니까?
  역시 갈라디아서 3장 26~2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의 신앙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멜 산에서는 불’, ‘호렙 산에서는 세미한 음성’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방식이 전혀 달랐듯이,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의 우리 신분이 다르고 하나님을 대하는
방법도 전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종으로서
법 테두리 안에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혼 후로는 우리의 신분이 달라져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 밖에 종으로
있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안에 아들로 딸로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람이나 불이나 지진 같은 요란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맞은 품성을 갖추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의한 깊은 내적 통찰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내면을 어지럽히는 잡다한 상념들이 정돈이 되고, 그리스도인다운
품격이 갖추어지며,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 동안 여러분에게 바람직한 변화가 있었습니까? 엘리야처럼 나를 어루만지시는
주님의 손을 잡고 자아의 동굴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조용한 시간 주님 앞에 서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들려온 말씀이 내 마음에 믿어지시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어느덧 내 사고를 점령하고 있던 잡다한 상념들이
떠나가고 주님 앞에서 생각과 삶이 단정해진 하나님의 자녀다운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요란하지 않아도 강력하고, 애써 강요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주님의 부드러운 은혜와
사랑이 우리에게 참 변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도 엘리야처럼 죽을 만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도 불평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내면의
빈곤함 때문임을, 내 좁은 생각 때문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맞춤형으로
엘리야를 자상하게 진단하시고, 처방하여 치유하신 것처럼 우리도 치유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걸맞은 품성을 갖추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바람직한 변화, 참 변화를 우리에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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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복 2016.06.20 10:46: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