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4월 1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4.10 13:45 조회 725 추천 0


2016년 4월 10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04_10)
< 너는 내 양이 아니다? > 요한복음10:22~29


<30년지기 친구>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 수준과 같이 영화 수준도 가히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충렬 감독이
제작한 독립영화 [워낭소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보신 줄 압니다. [사진자료;워낭소리 포스터]


  경북 봉화 산골의 노인 부부와 그들이 키우는 나이 먹은 일소의 마지막 몇 년을

감동스럽게 담아냈던 영화입니다. 숙련된 배우도 의도된 시나리오도 없어서
오히려 촌로들의 투박한 삶과 언어가 더욱 돋보였고, 비틀거리는 소와 절룩거리는
할아버지의 노동이 마치 수도사의 세계를 보는 듯합니다. 이 영화가 그리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단순한 주인과 가축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30년 동안을 한 몸처럼
동행하다보니까 할아버지와 소는 30년지기 친구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리고 한쪽 다리가 불편합니다. 그런데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서 매일 산에
오르시고,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할아버지가 고삐를 잡으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소가 쓰러졌을 때 소를 살펴보던 수의사가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하고 말할 때는 정말 마음이 애잔합니다.


<선한목자, 순한 양>
  오늘 본문은 바로 이 할아버지의 심정으로 읽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 양들과 함께
들판에서 생활하는 목자의 모습은 그들 뇌리 속에서 언제나 친근하게 남아있는 삶의 원형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목자와 양의 비유로 자신을 설명하실 때 가장 잘
알아들은 사람들은 목자였을 것입니다. 목자로서의 예수님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구절로는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4절과 15절을 들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처음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기름을 부은 듯 들끓었습니다.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며 분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신 들려 미친 사람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며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분개한 사람들은 일단 예수님이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표현한 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선하다는 표현도, 목자라는 표현도 인간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데 예수님이 스스로 선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
그들은 화를 냈습니다. 목자라는 표현도 그랬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목자는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푸른 풀밭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시편 23편에서의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미쳤다며 분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분쟁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습니다. 우선은 조용히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겨울이 되면서 다시 이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수전절(시리아에 의해서 더럽혀졌던 성전을 다시 탈환하여 청소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르신 예수님이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다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솔로몬 행각이 서기관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쓰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이들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이었거나 혹은 율법학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거의 항의조로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냐’라고 다그쳤습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은
정말 그가 그리스도인지 궁금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자기들의 권위가 도전받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25절)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명해 주는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가 말을 해도 믿지 않았고,
행동을 해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 앞서서 여러 차례
당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양들이 자기 목자를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가듯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아버지에게 갈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고, 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은 사셨고,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같은 유대인이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까요?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26절)


  이 말씀은 충격적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선택된 민족,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껏 그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부심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목마르게 찾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도 충격인 것은 하나님도 사람을 거부하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를 받아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을 향해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나는 내 양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기만 하면 무조건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이 아닐 때, 예수님은 우리를 거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일단 맞다고 판단하면 예수님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그림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냥 자기 생각대로
믿습니다. 그냥 자기 성격대로 믿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성격에 맞으면 다 옳은 것이고, 자기 생각과
자기 성격과 맞지 않으면 다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양, 교회 공동체의 지체, 한 가정의 식구라는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울타리를 벗어나 자기 생각과 자기 신앙적 기준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것을 자랑하듯이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치리와 교회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상의하지 않고 주변에 이야기를 듣고 좋다는 것에 여기저기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좋으면 되는 것이지 부모가 무슨 상관이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주변의 사람이 자녀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그런 부모에 대해서 한심하게 여기는 것에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여깁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철없는 자녀이지요. 내 생각, 내 마음, 내 입장이 언제나 우선이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내 생각을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내 생각을 내려놓고 교회의 방침과 지도를 따르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부모의 생각이 다르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그 생각을 먼저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일단 맞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만들어 낸 그리스도교를 믿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빠집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내가 생각한 하나님과 다를 때, 시험에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누구를 시험에 빠뜨렸습니까?
유다처럼 스스로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중심적 신앙’과 ‘유대인 중심의 신앙’을 거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거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구원은 철저히 예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모두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높임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왜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구원의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의 문 앞에서 거부당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구원의 문 앞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예수님의 방법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양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27절)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유대인이 중심이 되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신앙의 중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중히 여겨 삼가 지키려고 애쓰고,
그 분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되기 위해 삶의 한 소절이라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르고
건강한 신앙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일주일에 한 두 번 교회에 나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예수님이 내 모든 삶에 중심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면 내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양으로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내리는 모든 결정은
주님의 뜻이 얼마나 반영이 된 것입니까? 주님의 인격과 말씀이 여러분의 인격과 삶 속에
얼마만큼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양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관심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여기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양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28절과 29절의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무서운 전쟁과 질병과 기근이 닥쳐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결코 그 생명을 잃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리와
늑대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울타리>
  기도원으로 출발하기 전 지난 월요일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습니다. 한강공원 망원지구를 출발하여
반포대교까지 가서 잠수교로 한강을 건너서 여의도까지 갔습니다. 벚꽃이 만발한 윤중로를 걸었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벚꽃 시즌에 걸어서 가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산대교 쪽으로 이동하여 다리를 건너
다시 망원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널 때 다소 긴장이 됩니다. 쌩쌩 달리는 차를 의식하고,
다리 밑 한강도 의식하고 타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 가에 있는
난간(휀스)가 없다면 얼마나 불안할까? 그 쳐 놓은 울타리가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안전을
지켜주는 것 보다 마음에 안정감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난간에 고마움을 느끼며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다리를 받치는 아치형의 지지대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더 큰 울타리를 만난 것이죠.
거기서는 넘어져도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신다는 것, 교회공동체라는 울타리,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 것이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며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할 것입니다.


  30년 지기 친구처럼 지냈던 [워낭소리]의 할아버지와 소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순한 양으로
한 몸처럼 동행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주님의 양이 되게 하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셔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생명을 지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갈 때에 내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부딪힐 때 내 생각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여 주옵소서. 큰일을 결정할 때 주님의 말씀이 우선적인 기준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과 평생 한 몸처럼 동행하는 평생의 동반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4월 17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4월 1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4월 3일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