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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3월 2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3.20 13:42 조회 791 추천 0


2016년 3월 20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Mar_20)
< 인간다움 >    마태복음20:20~28


<축복>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승리와 아름다움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것을 근거로
부활주일을 한 주 앞둔 주일을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메시아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날이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더불어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겸손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우리도 더 결연한 마음으로
따라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삶의 한 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알파고가 할 수 없는 것>
  지난 금요 늦은 밤 기도회 시간에 나눈 말씀이 제게는 너무도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이 말씀을 사순절을 보내고, 고난주간을 보내는 모든 성도와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보완해서 한 번 더 전하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세상의 이목을 온통 집중시켰던 것은 바둑 기사인 이세돌 9단과 알파고(AlpaGo)의
대결이었습니다. 시작하기 전만 해도 아직은 기계가 사람을 이길 순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가 아주 달랐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고도의
연산 능력을 가진 1200여대의 컴퓨터를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영화나 소설의 소제가 되었던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기는 시대가
왠지 불길한 파국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대국과 관련된 여러 신문 사설과 인터넷에서 제공해 주는 자료를 찾아보니
인공지능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금물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인간이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설정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역사상 수많은 기술이 인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사회 혁신을 이끌어 왔던 것처럼
인공지능 또한 변화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인공지능은 현재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수 있도록 인류가 지혜를 모아 나갈 필요가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조금 위안이 되시나요?


  아무튼 이 세기의 대국을 통해서 인공지능(a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고 있고,
바둑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둑도 잘 모르고, 인공지능도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대국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유심히 지켜 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세돌 9단의 가족이었습니다. 공부를 위해 캐나다에 살고 있던 부인과 딸이
응원하러 왔습니다. 그 가족의 응원에 큰 힘을 얻는 이세돌 9단의 모습이 저는 크게 와 닿았습니다.
이겼을 때도, 졌을 때도 그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인공지능이 아직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 이길 수 있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일부러 져 주는 것,
알고도 속아 주는 것, 타자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세돌 9단에게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 것은 졌지만 대국의 과정에서 보여 주었던 인간미, 기계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고쳐서 온전하게 하신 일이 첫째이고,
벽을 무너뜨려 서로 소통하게 하신 일이 그 둘째입니다. 예수님을 병든 사람은 물론이고
온통 자기에게 사로잡혀 다른 이들에게 반응할 줄 모르는 이들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피가 돌고
따뜻한 온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들을 무너뜨려 서로의 얼굴을 보게 하셨고, 만날 수 없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안에 잃어버렸던 인간다움을 다시 찾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교만이라는 욕망이 들어오기 전까지 서로를 아껴주며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멋진 사랑의 세레나데와 같은 고백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것,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아담과 하와는
서로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서로를 위하며 아껴주며
사랑하는 것이 지금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였습니다. 아름다운 인간다움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교만이 죄를 불러왔습니다.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인간다움을 상실했습니다.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져주는 길, 손해 보는 길, 죽어주는 길입니다. 인간다움의 모본과 극치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새벽 시간과 저녁 시간에 성경을 묵상하며
얻은 교훈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를 따집니다. 실과 득을 계산합니다. 그래서 ‘아니다’ 싶으면
내어 칩니다. 포기합니다.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다 알지만 모른 척 해 주십니다. 때로는 져 주시기도 합니다. 급기야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주십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하여 고통 당하셨고, 찢기셨고,
채찍에 상하셨고, 피를 흘리셨고, 죽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피 흘려 지나가신 자리에는
화평과 화해와 관용과 용서와 용납과 이해와 배려와 섬김과 나눔의 꽃이 피었습니다.
인간다움을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허리 굽혀 사랑하신 그 은혜를 입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좋은 일의 변화는 더딥니다. 아주 완만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야 정상입니다. 때로는
그냥 넘어가 주기도 하고, 져 주기도 하고, 참아주기도 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품어 주려고 하고,
마음은 아니어도 함께 하려고 하는 노력과 애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스스로에게 물어 볼까요? 나는 어떤가요? 내게 인간다움이 있나요?
이기려고만 하는 알파고, 기계인간은 아닌가요?


<누가 더 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소개하고 있는 화두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는가?’ 입니다.
치맛바람이 거센 아주머니가 제자들이 다 보고 있는데 자기 두 아들의 출세를 위하여
예수님에게 청탁을 합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겨서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기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러르고 존경받고 섬김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이기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해가 안 되는 비현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확실하게 깨는 말씀을 이으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고 합니다. 심지어 남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아들의 입신양면을 위해 청탁하러 온 아주머니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후에 잠시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온 통 세상을 이기려고만 합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만 합니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만합니다. 조금만 손해 보아도 참지 못합니다. 누가 내 차선에
끼어들면 참지 못하고 보복운전을 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누군가에게 서운한 일을
당했다고 느끼면 없는 말을 만들어서라고 보복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기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패거리를 이루는 사람들을 가리켜 니체는 헤르덴멘쉬(Herden-Mensch),

곧 짐승 떼와 같은 인간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어야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 인간다움을 지닌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구약의 율법의
법령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갚으라.’ 이것은 사람의 보복 심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의 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당한 것 보다
더 크게 복수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윤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약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원수마저도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대로, 가르치신 대로 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인간다움을 다시 찾는 길은 지는 길이고, 죽어주는 길이고,
섬기는 길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영상자료 하나를 보겠습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며 부끄러움에 울컥했습니다.
13살짜리 두 아이의 레슬링 시합 장면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는데,
한 선수가 조금 특별합니다. 뇌성마비의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입니다. 아마도 레슬링을
꼭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시합이 이루어지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상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영상자료; 이기지 않아도 괜찮아]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 이길 수 있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일부러
져 주는 것, 알고도 속아 주는 것, 타자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가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끼며 함께 울어 주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누구보다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후회할 일을 참 많이 합니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닌데, 작은 일이든
혹은 큰일이든 이기려고만 합니다. 내가 이겨 자신은 성취의 축배를 들 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고, 공동체에는 전혀 무익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져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알면서도 받아줍니다. 때를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실에 성심을 담고, 진실에 진심을 담아 마음을 다합니다.
궂은 자리에는 그 사람이 항상 있습니다. 드러나는 자리에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인간다움을 지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킵니다. 이 시대와 교회 공동체의 진정한 리더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주간만이라도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져주면 어떨런지요. 옥합을 깨는 손해를 보면 어떨런지요. 죽을 만큼 힘든 일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죽어보면 어떨런지요.
  사순절의 남은 기간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히 엎드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감동하셔야 비로소 우리는 사람다움,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손해보고, 져주고, 죽어주며 그렇게 살아봅시다.
남은 사순절 동안 그리고 남은 우리의 생애 동안….
 
<기도>
  사랑의 예수님, 욕망에 눈이 어두워 기계와 짐승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내 안에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처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그만 이기려고 하지 말고, 이제 졌다고 하여
속상해 하지 말고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기꺼이 제물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지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사순절 남은 기간, 이 고난주간 완악한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 가신 길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기꺼이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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