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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3월 6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3.06 13:39 조회 675 추천 0


2016년 3월 6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Mar_6)
< 속정 깊은 사람 > 요한복음12:1~8


<목양기도>
- 기도제목;  3월 한 달 동안 나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조국 대한민국을 인도하여 주소서.
                 힘겹게 2월을 넘은 성도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희망으로 3월을 열게 하소서.
                 성도들에게 다윗의 마음을 주시고, 미래세대의 부흥을 주소서.


- 찬양; 오늘 집을 나서기 전 1,3절


- 목양기도;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삼하22:7) 오늘 우리가 성전에서 드린
소리와 부르짖음도 들으신 줄 믿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의 가정과 사업장과 우리 교회와 이 민족을
친히 목자가 되어 인도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아픈 성도들을 고쳐주시고, 어그러진 관계로 인해
힘들어 하는 성도들에게 화해의 은총을 주옵소서. 오늘 마음을 담아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은혜 받고 기쁨으로 사역하고, 힘차게 한 주간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사순절의 한복판을 살 3월 한 달 동안
더 주님과 가까워지게 하시고, 더 많이 주님 닮아가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하는 종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신령한 식물과 음료를 나누는
성만찬을 통하여 거룩한 신비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신앙고백을 담은 찬양을 받으시고,
영혼을 담은 간절한 기도에 오늘도 응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
  몇 해 전 힘겨운 암 투병 끝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발췌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 책을 읽으려고 신청을 했습니다.
그 글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명품 핸드백에 중독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여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녀의 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에 색깔별 모양별로 가득 차 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발행하는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하면서 새로 나온 핸드백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덕에 사람들이 쳐다봐서 남의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은데,
그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기 위해서 그 많은 노력을 불사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딸을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싫어서 엄마는
학교에 갈 때도 꼭 어린 장영희를 업고 다녔습니다. 그녀가 학교에 가기 끔찍하게 싫은 날은
비오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자기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엄마가 자기를 업고 학교에 갈 때에는 꼭 그 우산을 쓰셨습니다.
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 썼으니 그 어린 소녀의
여린 마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비오는 날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그런데 모르긴 몰라도 그때 자기가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비오는 날에
빼먹지 않고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란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들어 있을 수 있고 비닐봉지 안에도
    금덩어리가 들어 있을 수 있다.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속정 깊은 사람>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그런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본문을 들여다보면
이 두 가지의 가치관이 예수님 앞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다니에서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아마 이 자리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서 시체로 썩어가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그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에게 감사하기 위해 마련된 잔치였던 것 같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신 예수님과 죽음에서
일어난 나사로가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합니다. 이 기쁨의 잔치에 논란을 일으킬 만한 하나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리아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가장 귀한 향유 나드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갑자기 이루어진 일로 많은 사람들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 놀란 사람을 대표하여 가룟 유다가 그 마리아를 질타합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4~5절)


  누가 보더라도 이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충분해 보입니다. 마리아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마리아를 나무라는 유다의 논리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하십니다. 그리고 심지어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억하리라.”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까지 하십니다. 예수님의 칭찬에 동의하기는 우리도 힘들 것입니다. 


  본문에서 마리아가 어떤 의도로 이처럼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향유의 값이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오늘 날 수천만 원에 해당되는 돈입니다. 더군다나
이 향유는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마리아는 이 향유를 쓰려고
산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먼 미래를 위해 적금을 들어 놓듯이 무리해서 향유를 사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것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마리아는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마리아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지금 마리아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향유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그저 랍비로서 좋아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녀의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누이들이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요11:4)


  온통 오라버니에게만 마음이 가 있을 동안 마리아는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이틀 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나가서 영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 번씩이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며 섭섭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왔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비로소
이분이 누구신지를 알았습니다.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시는 분, 이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이 잔치 자리에서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쏟아 부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예배이고, 경배였습니다. 순식간에 향기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지금 자기 앞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의 이 말은 일견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의 이 말에 싸늘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절)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는 유다의 발언은 표면적인 핑계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욕망에 점령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번도 자기 죄를 예수님에게 내어놓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문제로 한 번도 주님 앞에 엎드려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핑계를
대면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
환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다는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유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유다처럼 충동적으로 자기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는 자기 죄를 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합니다.

표면적인 행동과 그 속마음이 다릅니다.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마리아를 주목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영성이 매우 예민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일행이 그녀의 집에 들렀을 때 마르다는
손님 접대로 분주한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마르다가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일에 분주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행동을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예배로 보았습니다.
헌신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한 속정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영성이 깊은 마리아는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볼 수 없었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침묵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만 했던 것처럼, 그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그들에게
그 어떤 설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던 마리아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 일을 묵묵히 행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큰 위로를 얻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3년 내내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던 십자가의 길과 그 죽음 너머에서 맞이할 부활의 역사를 이해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은 충분히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마음을 알아주었던 마리아의 속정이 너무도 고맙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인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그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렸던 속정 깊은 마리아입니까? 아니면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두르고 있지만
그러나 마음은 300데나리온에 대한 미련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룟 유다입니까?
  겉으로는 비닐봉지처럼 허름해 보여도 그러나 내면에 향유를 담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온갖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지만 내면에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라간다고 하면서 여전히 세속의 가치관에 목말라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헌신도, 기도도 300데나리온을 얻기 위한 투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 번도 자기 죄를 솔직하게 내어놓은 적이 없었다는 가룟 유다를 향한 지적,
한 번도 그런 자신을 보며 주님 앞에 엎드려 본 적이 없었다는 지적, 항상 핑계를 대면서
진정한 자기 모습을 외면해 버렸다는 지적이 계속 가시가 되어 우리의 영혼과 내면을 찌르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고,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마리아의 신앙이 사순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거룩한 도전을 줍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셔서 나사로만 살리신 것이 아니라 나를 살려주셨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고,
이제는 지금 이 시대에 바로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내게 있는 향유를 드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마리아이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바로 성도 여러분들이 우리교회,
이 시대에 마리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속정이 깊은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소중한 향유를 부어 드려도 전혀 아깝지 않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게 하여 주옵소서. 겉만 화려한 껍데기로 살지 않고 속이 꽉 채워진 알맹이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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