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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2월 2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2.28 18:15 조회 726 추천 0


2016년 2월 2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6_Feb_28)
< 회개, 복과 저주를 가르는 선택 > 누가복음13:1~9


<축복>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예비하신 은혜로 강물 같은 기쁨과 평안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옆에 있는 성도와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위하여 축복을 빕니다. “하나님이 00님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
  몇 해 전에 일어난 서남아시아의 쓰나미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사건을 보며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해서 세인들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분은 치매 증상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 분의 신앙과 논리를
기준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유대인들은 사고나 재난으로 인해 사람이 죽으면 그가 죄를 많이 지어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타인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앞장의 마지막 문단과 연관해서 볼 때, 예수님은 화해에 관한 말씀을 사람들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두어 사람이 와서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이유 없이 죽인 후에 그 피를 다른 제물과 섞어서 제사로 바쳤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평범한 갈릴리 사람을 뜻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무슨 혐의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하루하루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인데,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붙잡아
죽인 것입니다. 빌라도의 이런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가 갈릴리 사람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것은 자주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더 나아가서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이 타 지역에 비해
로마에 대해 저항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갈릴리에 군사를 출동시켜서 그들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는 본보기로 갈릴리 사람 몇을 희생 제물과 함께 학살해서 그 피를 섞어
제사 지낸 것입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너희들 전부가 이런 식으로 죽을 수도 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 전체를 향해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빌라도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 사건을 대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든 고난과 죽음에 죄를 연관시키고 있었습니다. 실례로 욥기 4장 7절에 보면
엘리바스가 가족과 재산을 잃고 악창을 않고 있는 욥에게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라며 잔인하게 묻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은 욥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래서 자신과 고난이 더 비통했던 교리였습니다. 결국 그 논리대로라면 모든 고난과 죽음의 배후에는
반드시 죄라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그 논리 뒤에 숨어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끊임없이 정죄하며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평탄한 자기들은 죄가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억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을 보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 어떤 슬픔도 연민도 없이 그저 그들은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갈릴리 사람들처럼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을
부각시키면서 상대적으로 해를 입지 않은 자신들은 죄 없는 경건한 자들임을 은연중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본문 2절과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절)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나 갈릴리 사람들이나 죄인인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죽은 것이 반드시 죄 때문인 것도
아니고, 너희가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의로워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다른 예를
하나 들어 주십니다. 4~5절 말씀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4~5절)


  여기에서 실로암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는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고, 그 사건으로 인해 열여덟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한 그대로 죄의 대가라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죄인이기는 너희도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이나, 망대에서 죽은
열여덟 명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회개해야 하는 죄인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뼈저리게 깨달아야 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서
상대적으로 나를 의롭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닿으면 다른 사람을 비방합니다.
소극적인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얘기하지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순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에 정직하게 직면하는 거룩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몰아내기 위하여
진정으로 회개하셨나요?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그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나요? 비겁하게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공격하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정말 안타깝게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같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을 이어지는 비유를 들어 진리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다같이 6~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6~7절)

 
  혹시 저와 여러분은 회개하지 않은 채 땅만 버리게 하는 존재는 아닌지요? 주인은 3년을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맺혀야할 열매가 맺히지 않았을 때, 주인은 차갑게 명령합니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회고하며
인상 깊은 2개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10:6)


  여기에 보면 ‘본보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역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의 현재를
파악하게 하는 본보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역사는 ‘깨우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역사는 본보기일 뿐만 아니라 깨우침입니다. 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실제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역사, 특별히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1세기의 고린도 교회에
경고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말미암아 결국 멸망을
당했으며,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성서에 기록된 것은
깨우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누렸던 이루 말할 수 없는
특권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우선 그들은 구름 아래 있었습니다. 구름은 뜨거운 사막에서 태양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일종의
집단 세례로 보았습니다. 사람이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는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과 더불어 산다는 뜻에서 바울은 세례였다고 해석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신령한 식물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을 지닌 ‘만나’라는 하늘의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게 하여 그들에게
귀한 암반수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서 복된 역사를 일구어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고린도전서 10장 5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


  5절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남다른 특권을 누려왔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그들의 계속적인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어제의 경험을 가지고 오늘을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의 은혜가 오늘의 감격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를 누렸음에도 그러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내 탐심에 사로잡혔고,
그 탐심은 우상숭배로 음행으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고전10:7~10)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했음에도
그들은 약속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 가슴 아픈 과거의 이야기를 꺼냅니까? 역사는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웁니다. 바울은 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 긴장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놓친 사람들,
그 모습이 바로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이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열매 없이 허울만 남은
가련한 무화과나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 비교로 ‘나는 섰다.’고
치명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바리새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말씀이 무섭습니다.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찍어 버리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주님과 바울의 이 각각의 말씀이 사순절을 사는 제 가슴에는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복과 저주는 우리의 선택>
  청년부가 주관해서 드린 금요 늦은 밤 기도회 시간에 마포지방 젊은 목회자인 윤보용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느 누가 말씀을 어떤 형대로 전하든지 그 말씀 속에는 나를 향하신 레마의 말씀이
반드시 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저주도 내리시는 분이라는 메시지가 새롭게 다가왔고, 그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선택하게 된 것도 나를 향해 주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선택 여하에 따라 복을 받기도 하고,
더불어 우리가 간과하여 너무도 쉽게 생각했던 저주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적용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그 회개의 기회를 선용하여
부끄러운 나를 돌이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을 받을 것이고, 그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삼가 깊게 우리의 심비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끊임없이 다른 사람만 평가하며 살다가, 내가 좋은 신앙인인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렇게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어 살다가 어느 날 회개조차 하지 못하고 찍혀 버리는 가련한 나무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회개만이 유일한 살 길입니다. 회개해서 구원도 복도 받아 바른 회개를 통해 주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공격하면서 상대적으로 나는 의로움을 드러내며 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함도, 부족함도, 우리의 마음까지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고백하고, 그렇게 내 힘과 의지로 할 수 없는 한계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사순절, 내 내면에 있는 어둠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진솔하게 회개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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