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2월 2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2.21 13:51 조회 841 추천 0




주일예배설교(2016_Feb_21, 사순절 2째주)
< 우리도 가야 할 길 >  누가복음13:31~35


<축복>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살고 있습니다. 사순절 신앙은 사순절의 시작을 알리는 성회수요일, 재의 수요일의
근거가 되는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창세기 3장19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지점을 생각하고 자신들의 삶을 바로 잡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고 원색적으로 표현한다면 죽기 전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기회를 선용하여 바르게 믿고,
제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중
나의 욕망과 욕심으로 퇴색되어 버린 나를 성찰하여 ‘진짜 나’를 다시 찾는 절기입니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어둠과 정직하게 대면해 그것을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내어 보내는 계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광야로 나와야 하는 다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는 평안합니다.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낍니다. 뿌듯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해합니다. 바라기는 이번 사순절이 여러분에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 진정으로 행복한 사순절의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성도에게 따뜻한 마음을 담은 축복을 나누겠습니다.  “행복한 사순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일생을 아주 짧습니다. 예수님은 겨우 33년을 사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활동 영역도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참고자료;지도] 예수님이 자라신 곳은
가나안의 북서쪽에 있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갈릴리 호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인접한 가버나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마리아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체포당하시고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성도들로부터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다른 방식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을까? 차라리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세상의 악을 제압하는 것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더 정확하고 편한 길이 아니었을까? 왜 그토록 무모하게 굳이 십자가를 지는 길을
택했을까?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고 오래 살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르칠 생각은 없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본문의 배경을 조금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출발하셔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때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절)


  우리는 이 때 예수님이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 계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을
근거로 추측하자면 예수님은 아직 헤롯의 영토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지만
아직은 헤롯이 치리하고 있는 영토 안에 계신 것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자기 영토 안에 있는 것이 항상
불편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을 읽다보면 헤롯이 예수님을 매우 불편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함이라 헤롯이 이르되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눅9:7~9)


  세례 요한은 헤롯 자신이 목 베어 죽인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님이
자기 영토 안에 있다는 것이 헤롯으로서는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헤롯은 예수님을 협박을 해서
쫓아버리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살고 싶으면 조용히 사라져라’하는 식으로 겁을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고 전해준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을 위해 그렇게 한 것 같지만, 사실은
헤롯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은 헤롯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그 사실을 전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예수님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이 예수에 의해 훼손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에게도 예수는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성전지배 체제가 예수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경은 빌라도가 주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로마의 최고위급 정치인인 빌라도가
그런 압력 정도에 쉽사리 정치적인 오점을 남길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 운동이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평화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정치, 종교 집단의 막강한 힘에 맞서서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무언가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실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견고한 체제를 이겨낼 자신이 없으면 지금 조용히 사라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혹을 넘어 협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목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볼 것은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선택입니다. 3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십니다. 여우는 랍비 문헌에서 간교함의 대명사로 꼽힙니다. 예수님이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준 협박은 헤롯의
간사한 계략만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중론이었고, 살해의 위협도
실제로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다음 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결연하게 3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본문에 대한 해석을 여러 차이가 있지만 가장 유력한 해석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오늘은 현재를 가리킵니다.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입니다. 그리고 모레, 즉 제 삼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지의 기간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 여우가 나를 살해하겠다고 아무리 협박을 해도 오늘과 내일 나는 계속해서 내 길을 간다.
    오늘과 내일은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칠 것이다. 그리고 모레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선지가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이 여행의 종착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길을 끝내 다 걸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길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부여하신 예수님의 소명이요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고마움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렇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해 전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보았을 때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심문과 십자가 처형의
장면이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차마 눈을 바로 뜨고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저 정도의 고통이라면 아마도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잠깐 멈추겠다고 해도 이해가 될 만큼 십자가의 길은 ‘Via Dolorosa’ ‘비통의 길’,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기까지 처절하게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의 기도가 비로소
더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고통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내내 한 순간도 편하지 않은 불편한 삶을 사신
고통의 생애였다는 것에 더 깊이 머리가 숙여지고 감사의 마음이 커집니다. 누군가 날 늘 노리고 있다는 것,
그것도 트집을 잡으려 하고, 깍아내리려 하고, 심지어 죽일 음모와 살해 위협을 받고 산다면 그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단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소명과 사명 때문에 그 길을 묵묵히 걸으시고 그 길 끝에서 갈등 끝에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인간이신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깊은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가고 있는 이 길에 대해 많은 부끄러움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것은 내가 먼저 솔선하기 보다는 누가 먼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익숙해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할 때는 이 일은 누군가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불평이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느슨해진 소명의 초심을 다시 조율하고, 어느새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의 마음을 빼앗겨 퇴색되어 버린 사명의 첫 마음도 다시 찾는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회 여정 중에 잊지 못할 이야기들이 있지요. 오랜 전에 카자흐스탄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합집회를 섬기고 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지 방문 대부분이 영성훈련에 버금가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처럼
저 역시도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시간이었습니다. 주 강사로는 곽전태 목사님이셨고, 저는 주로 찬양과
진행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모든 집회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자마자
어느 젊은 사모님이 감독님에게 두 딸을 위해 축복기도를 부탁합니다.
감독님과 우리 모두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그 집회는 좋은 기억의 한 자락으로 남았을 즈음 자녀를 위해 축복기도를 요청한 그 사모님의
기도 요청이 매우 특별했다는 것을 알게 한 사건 소식을 접했습니다. 청년 연합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중 교통사고로 사모님을 그 현장에서 죽었고, 선교사님은 크게 다쳤다는 것입니다.
다행이 두 딸은 집에 있어서 화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한국에 와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아이들도 한국에 와서 할머니가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날 기도를 부탁했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도 얌전한 사모님이 다른 가정에 자녀들도 많이 있었는데, 감독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던
이유가, 그 무언가의 이끄심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선교사님이 수술과 재활을 마치고 몸을 추스린 다음 다시 카자흐스탄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아픈 기억이 있는 그곳에 다시 발을 디뎠을 때의 그 선교사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는 지금도 저희 집사람 사고 난 단양 쪽으로 가기가 주저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그 선교사님이 다시
그곳을 간 것은 사명 때문이랍니다.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중앙아시아 지역과 인접한 우르무치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도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길을 걸으면서
거기에서 소명을 발견하고 계시는지요?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주님의 길인지요? ‘때로 매혹적인 유혹이 내 마음을 흔들어도, 때로 거칠고 간교한 협박이 나를 위협해도,
그러나 주님이 나에게 주신 길이라서 오늘과 내일 나는 계속해서 내 길을 간다.’는 고백과 결단이 나에게
있는지 이 사순절에 우리가 나 자신에게 물어야할 질문입니다.


<기도>
  먼저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살려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그렇게 당당하게 소명과 사명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따라 그 길을 가게 하여 주옵소서.
생은 즉 명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이 땅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 여전히 산 자로 있는 것은 하나님 부여하신
각 자의 사명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 사명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 사명을 붙들게 하셔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작지만 이루어 드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번 사순절 다시 우리의 소명과 사명을 찾는 시간이
되게 하시고, 그 사명을 위해 매혹적인 유혹이 마음을 흔들어도, 거칠고 간교한 협박이 나를 위협해도,
주님이 당당하게 선포하신 것처럼 오늘과 내일 나는 계속해서 내 길을 간다고 우리도 선포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2월 2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2월 2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2월 14일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