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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월 3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6.01.31 13:42 조회 857 추천 0



주일예배설교(2016_Jan_31)
< 응답하라! 부르심에 >  사무엘상3:10~21


<축복>
  지난 주간 수십 년 만에 온 추위 때문에 제법 제대로 된 겨울 추위를 맞이했습니다.
가장 추운 겨울 주일 저녁에 부흥회를 시작하여 저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하나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태풍이 불어야 바다 밑까지 청소가 되어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듯이
추워야 병충들이 죽는다고 농사를 지으시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네요. 그러고 보면
우리 인생 속에 만나는 태풍과 추위도 널리 보면 뜻이 있고, 유익이 있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추위는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지금 죽을 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을 맞이했다하더라도 머지않아 지나갈 것입니다.
넘어갈 것입니다. 유월(Passover)할 것입니다. 십자가 단단히 붙잡고 인내함으로 버티면
그 과정에서 주시는 은총이 있으며, 믿음으로 이기면 어느새 우리 앞에 엘림이 보일 것이고,
가나안이 보일 것입니다. 옆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로 격려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힘내세요.”


<영혼이 무게>
  영혼에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영혼의 무게를 소제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영화 제목이 [21그램]입니다. 실제로 미국 매사추세스 병원에서는 임종직전의 말기 결핵 환자를
3시간 40분 동안 체중의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숨을 거두는 순간
그 환자의 몸무게가 1.25 온즈(35.4그램) 줄었다고 합니다. 2년 반 뒤에도 임종 직전의 다섯 환자를
똑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보았더니 역시 영혼의 평균 무게는 1온즈(28.4그램)였다는 겁니다.
  최근에도 스웨덴의 룬데 박사팀이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그 실험의 진위를 검증해보았더니
임종 시 환자의 체중 변동은 21.26214그램이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가 쓴 [살아갈 날들 위한 공부]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노동이라고 하면 건물을 짓고, 밭을 갈고, 소를 먹이는 것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영혼을 개선시키는 일이다.”


  거기에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육체적 성장이 끝나는 시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부터 영혼이 성장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우리 영혼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라는데 이것은 한 개인의 영혼이나
    모든 사람의 영혼이나 똑같다.”


  톨스토이가 얼마나 내면의 영혼을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우리는 짧은 이 글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노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의 영혼을 개선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영혼이 어린아이처럼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라>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러한 사실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엘리 제사장과 어린 사무엘의 일화가 마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들어오는데, 인생의 황혼에
영혼마저 어두워져버린 엘리의 비극과 자라면서 영혼도 함께 자라는 사무엘의 변화가 교차됩니다.


  삶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각자 독특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영혼을 자라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매우 어두운 배경에서 시작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삼상3:1~4)


  우리는 이 말씀을 대하면서 당시의 환경이 매우 어두웠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는 것은, 사사시대 말기의 타락하고 부패한
영적 상황을 매우 두드러지게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을 민감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과 선지자의 막중한 사명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게 여겨질 지경으로 그들이
영적 게으름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물론 98세라는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나이보다 훨씬 늙어버린 그 영적 노쇠, 그의 영혼의 방치를 이 말씀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영적 게으름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녀교육에 실패했습니다. 그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성서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12절) 


  그들은 행실이 나빴을 뿐만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살면서 온갖 못된 짓을
골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대하는 제사장의 규정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려고
고기를 삶고 있으면 갈고리를 들고 다니면서 냄비든 솥이든 찔러서 창에 꽃혀 나오는 것을 자기들이 먹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능멸했고, 심지어 회막 문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 사실을 알고 꾸짖기는 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13~14) 


  자식 하나 잘못 키웠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문제는 이미 엘리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회개할 의지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게으름도 정도를 넘어서면 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쓴 [회개행전]에서 엘리의 이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못 박습니다.
이 게으름은 오랜 세월을 두고 반복적으로 굳어진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근거는 이렇습니다.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그 때에 제사장 엘리는 야호와의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더라.”(삼상1:9)


  엘리가 의자에 앉았다는 것이 뭐가 문제인지, 그 다음 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나가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1:10) 지금 한 여인이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하나님께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이 여인의 입만
주시하고 있다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 그러니까 지금 엘리는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판단력도 분별력도 상실한 채 게으름 속에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시종일관
앉아 있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그가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이 또 나옵니다. 
  “그가 이를 때는 엘 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4:13)
이때도 역시 그가 앉아 있을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블레셋과 전쟁 중입니다.
그것도 전쟁에 패해 3만 4천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언약궤도 빼앗기고 자기의 두 아들마저 죽은 상황입니다.
결국 그는 의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상4장 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지 사십 년이었더라.”


  이 죽음은 그의 게으름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니라.”(10~12)


  지금 이 상황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의 죄로 인해
그 가문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를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린 사무엘은 번번이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삼상3:5, 6, 8) 문제는 그렇게 세 번이나 같은 부름이
반복되도록 여전히 엘리 제사장은 그 영혼의 어둠 속에서, 지금 사무엘을 부르시는 그 목소리가
하나님이심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번 같은 부르심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엘리 제사장이 깨닫습니다. 그가 어린 사무엘을 불러 말합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삼상3:9)


  나이가 들어 육체가 노쇠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마저 쇠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영혼을 잘 돌봐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두려운 사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게
하실 말씀을 어린 사무엘을 불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자가가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 꾸중을 들어도 자기가 들어야 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도 자기가 들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 무거운 일을 어린 사무엘에게 감당시키시는 겁니까? 하나님과 엘리 제사장 사이에
대화가 사라지고 하나님께선 이미 대화 상대를 옮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해봅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신과 자녀들의 죄악을 알았을 그때, 돌이킬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텐데 그 때 그 회개의 부르심에 응답했더라면 자녀들도,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가슴 한 켠에 새겨야 할 말씀은 엘리 제사장도
잘못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잘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돌이켜 바로 살 회개의
기회를 하나님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 회개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우리의 지금과 내일과 마지막은
아름다운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에도 기회가 있음을 아시고 찔림이 있거든,
회개의 부르심이 느껴지거든 즉시 주저말고 돌이키는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경험은 사무엘의 성장 과정과 그의 사역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영적 경험으로 하나님과 더욱 친숙해졌고, 사무엘의 영혼을 자라게
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것입니다.


   “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19절)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그 어떤 말 하나도 헛된 말이 되지 않도록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께서 세우신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에 브엘세바까지’라는 것은 북쪽과 남쪽의 영토 한계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온 이스라엘에 사무엘을 보며 여호와의 선지자로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내면이 사무엘과 같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친숙하게 여겨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익숙하게 들려와서, 매일매일 다듬어지고 북돋아지고 시와 찬미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은 거칠고 끔찍한 소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눈을 막고 귀를 막아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사건과 사고의 소식으로 온통 뉴스를 채웁니다. 거기에서 어떤 내면의 변화가 밝고
희망차게 이루어지겠는가 심히 염려가 앞섭니다. 그러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하나님과의
대화의 기억이 있고, 그 영적 경험이 우리의 전 인격에 스며들 때, 그 사랑받은 기억으로 우리의 내면도
비로소 부드러워지고 사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계속 마음에 머무는 것은 ‘육체의 성장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영혼의 성장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미숙아가 된 엘리 제사장의 마지막과 영혼을 잘 관리하여
아름답게 성장시킨 사무엘의 나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는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자에만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가 있어야 자리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의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 음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자랍니다. 깊어집니다. 그래야 사명도 거뜬히 감당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초하루새벽기도회 부터 응답하시면 어떨까요? 


<기도>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 선지자를 보며 우리의 내면을 살피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게으른 삶을 이제 과감히 청산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민하게 응답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건강하게 성장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역의 자리에서 안정된 마음과 기쁨으로 섬기게 하시고, 서로 그 마음을 합하여
우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귀 기울이게 하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그 대화의 기억으로 평생 몸과 영혼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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