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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2월 27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2.27 13:43 조회 946 추천 0


2015년 12월 27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송년주일예배설교(2015_12_27)
< 한 해의 끝에서 다시 배운다. >   본문 : 이사야63:7~14


<송년의 소감>
  한 해가 다 가고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종종걸음을 치며 살아왔는데, 세월은 성큼성큼 걸어
우리를 한 해의 끝자락에 내려놓습니다. 한 해를 하루에 비유한다면 섣달의 막바지는 곧 하루의 저물녘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맞이하는 느낌은 다릅니다. 하루를 보낼 때는 그렇지 않지만, 한 해를 보낼 때는 왠지 마음이 어수선하고
무언가 아쉬움이 앙금처럼 남게 됩니다. 아마 그것은 지나온 길에 대한 아쉬움이거나 이루지 못한 목표에 대한
아쉬움일 것입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면 누구나 비슷하게 이런 아쉬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흐르는 세월에 대한 소감을 그의 그림처럼 글로도 멋지게 표현한 이가 있습니다. 일본 화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우환선생님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양 팔에, 어깨에 자꾸만 쌓이는 것이 있다. 납 가루 같기도 하고 빛 조각 같기도 한,
    무언가 으스스한 것이 제법 다정하게 내 언저리에 끊임없이 내려앉는 것이다.”


 
  세월에 대한 양가감정을 참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납 가루’처럼 스산하게 무겁기도 하고,
‘빛 조각’처럼 가뿐하고 따뜻하기도 한 것이 자꾸만 어깨에 쌓이는 느낌, 으스스한 동시에 제법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세월이라 합니다. 글쟁이, 그림쟁이는 정말 타고 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돌아보면 제대로 살아내지 못한 나날이 떠올라 후회스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부족하고 연약했지만 그래도 어떤 힘이 우리를 이 자리에까지 이끌어 주셔서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한 해의 끝자락에 있게 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도 공존합니다.


<변하는 우리, 변함없는 하나님>
  출애굽 여정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출19:4)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언자는 선택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8절) 다른 성경에서는 ‘속이지 않는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악행을 행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마음 또한 알고 있습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이렇게 탄식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일러
‘속이지 않는 자녀’라고 하시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믿어주는 사랑’, ‘봐 주시는 사랑’,
‘거룩한 신뢰’
의 표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신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9절)'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고난을 받고 있어 아파할 때에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애태우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를 태우시는 까닭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애태움도 없지요.
  ‘아파하시는 사랑’, 그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어원은 ‘자궁’입니다. 생명을 품어
안고 기르는 모태로서의 자궁은 여성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남성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의 고통에 예민합니다.
그것은 그 두 존재가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로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에 모성과 관련된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본문의 말씀 9절 하반 절에도 나옵니다.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픈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또 다시 하나님을 쉬이 떠나는 우매함으로
살아갑니다. 다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도 형편이 나아지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곤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은 그래서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너희는 목이 곧아 고집이 세고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나에게서 돌아서서 멀리 떠나고 말았다.”(렘6:23)


  그렇게 자주 변하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매 해 한 해의 끝에서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또 한 번 봐 주셨다.’는 것입니다. 늘 내 중심으로 살아온 철없고, 예의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버릇없는 모습으로 대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믿어 주시고, 눈 감아 주시고, 모른척해 주시고,
덮어주고, 넘어가고, 안아주시고, 그냥 한 번 더 봐 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미어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쩌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의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에 상관없이 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되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라, 안되면 하나님과 주변을 탓하며 원망하며
살아왔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목이 곧고 고집이 세고 반역의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 다른 사람을 떠올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삶이 무겁고 우울하고, 쓸쓸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은 또
안타까우십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을 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려운 결심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매를 드십니다. 그 매는, 그 징벌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도 많이 아프시지만 우리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시는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 속에서 메시지를 가려듣는 귀가 열린 사람에게 고통은 그를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이 되기도 합니다. 삶에 고통이 없다는 하나님을 절실히 찾을까요? 고통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던 것들의
사소함을 혹은 허망함을 일깨워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열되고 있고,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노심초사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마침내
디도가 돌아와 고린도교회가 든든히 서 있음을 확인한 바울은 기쁨과 감사의 편지를 다시 보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고후7:8~9)


  히브리서의 저자는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권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리라.”(히12:5~8)


  ‘하나님의 아들 같이 우리를 대우하셨다. 아들이기에 때로는 징계하신다.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다.’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또 뭉쿨하게 합니다.  


  지난 일 년, 삶에 심한 멀미를 느낀 분들이 계십니까? 가혹한 시련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분이 계십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오지 않고, 시린 가슴에 깃든 쓸쓸함만을
길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사람들은 묻습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삶을 해일처럼 엄습하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모두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시련과
고통이 의미 없이 허비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성찰하라는 초대입니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사자성어는 ‘昏庸無道’입니다. 혼용무도는 나라 상황이 마치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입니다. 혼용은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를 가리키는 혼군과 용군이
합쳐져 이뤄진 말로, 각박해진 사회분위기의 책임을 군주, 다시 말해 지도자에게 묻는 말입니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는 “연초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온 나라의 민심이 흉흉했으나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보여줬다.”며 정치지도자의 무능력을 신랄하게 꼬집었습니다. 메르스의 확산을
차단하고 줄이는 것이야 정부의 책임인 것은 분명하나, 그러나 솔직히 그 병이 발생하고,
사람과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근본적으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한 해의 큰일들을 뒤돌아보며 다시 한 번 믿음의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게 넘어가는 2015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깊게 헤아려야 합니다.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버이, 우리는 아들과 딸>
  한 해의 끝에 이른 지금 우리가 다시금 염원해야 하는 것은 ‘아버지이신 하나님, 어머니이신 하나님’과
관계회복입니다. 이사야는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달라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사63:16)


  한 영성집회에 참석했던 여성이 신앙 경험을 나누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창녀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가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10대부터 교회학교에 나가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사랑도 깊이 체험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진학했고, 거기서 멋진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곧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결혼까지 했습니다.
남편은 멋진 사람이었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습니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부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다는 강박관념적인 생각이 그를 지배하는 순간부터 단란했던 가정의 행복에는
검은 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확인하고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간청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9개월 전 엄마의 손님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보세요.”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것도 기억해 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접시를 닦고 있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과 고뇌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눈물이 흘러내렸고, 마침내 크게 소리쳤습니다. “오 하나님, 누가 나의 아버지입니까?” 그때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 음성이 너무 또렷해서 혹시 누가 와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금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너의 아버지였다.” 그 순간 그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으려던 강박적 욕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창조 이전부터 택하시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하는 일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일의 성과가 크면
뿌듯해 하고, 성과가 적으면 주눅이 듭니다. 또 사람들은 그것이 재산이든 학력이든 명예든 자기의 소유물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갈 것들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남들 앞에서 우쭐거리지도 않고
주눅이 들지도 않습니다. 잘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신 것입니다. 한 일이 적어도,
가진 것이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일 년을 결산해보면 아무 한 일도 없이 허송세월한 것 같아 속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냈고,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이라도 당신의 알곡 창고에 거두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다시 배웁니다. 잘 했어도, 잘 못했어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의
아들과 딸입니다. 우리는 변했어도, 변함없이 봐 주시고, 참아 주시고, 같이 아파해 주시고, 넘어가 주시고,
믿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여기 있게 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또 한 해 주신 이 기회를 희망으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눈물겨운 하나님의 사랑, 받을 수 없을 만큼 한 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기에, 그 사랑에 힘입어 새해를 시작하고, 그렇게 시작하여 마무리하는 2016년의 끝에서는 어깨에 얹히는
‘납 가루’같은 무게는 사라지고, ‘빛 조각’이 훈장처럼 내려앉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2015년 한 해의 끝자락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아들과 딸로 불러 주셔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마음과 같지 않게 많이 부족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어주시고, 참아주시고, 봐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까지 왔음을 깊이 인정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한 해의 매듭을 잘 짓고, 여전히 우리를 아들과 딸로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더 잘 믿고, 잘 살아 보겠다는 희망찬 결심을 갖고 새해를 맞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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