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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1월 2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1.29 13:47 조회 806 추천 0


2015년 11월 2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Nov_29)
< 먼 길 마중 나가는 마음으로 >    이사야64:1~8 


<축복>
 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또 다시 강림절, 대림절을 맞이했습니다. 한 주기의 교회력이 끝나고 새 주기의
교회력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삶의 종말과 더불어 찾아온 새로운 시작과 그 의미를 성찰하게 됩니다.
강림절은 ‘오다’(coming) 또는 ‘도달하다’(arrival)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즉 전통적으로
4주 동안 계속되는 이 절기는, ‘이미 오셨고’, ‘또 다시 도달하실’ 주님을 향한 기쁨에 찬 기대를 담고 있는 절기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영원한 계절]에서 “북반구의 나무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소망을 잃지 않는다.”고 하며 강림절에 담겨 있는 두 가지 의미를 설명해줍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처음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 즉 예수님 탄생의 축제를
준비하는 절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림절, 대림절은 우리에게 변화된 모습을 요구하고,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그분을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기본을 다시 곧추 세우는 절기라는 의미에서
겨울철의 사순절이라고도 하지요.
  이번 강림절을 보내면서 나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정도를 가늠해보고, 어제 보다 더 많이 주님과 가까워지고,
더 넓게 주님을 알아가고, 더 깊이 주님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이 마음을 담아 옆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로 축복하겠습니다. 강림절에 켜는 첫 번째의 의미이기도 한데요.
“주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고 인사합시다. 


<기다림은 그리움>
  강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사랑의 등불을 켜고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먼 길 마중을 나가 기다리는 때입니다.
  자주는 가 뵙지 못하지만 가끔 부모님이 계신 인천 혹은 제천에 다녀올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아뵐 때
가급적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물론 집에 계신 것을 확인은 미리 하지요. 거의 다가서 전화를 드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일찍 마중을 나와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손주들과 함께 가면 더 하시지요.
  왜 그러실까요? 한시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신 것이지요. 그래서 ‘기다림’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그립고, 보고 싶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행복했던 추억의 시간도, 떠나보낸 연인도, 혹은
미래에 다가올 멋진 인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그리움의 뿌리는 하나님이 주신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하나님의 얼굴을 사람에게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 얼굴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내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그리움은 ‘하나님을 닮은 나’ 즉 ‘죄 묻지 않은 본래의 순결하고 맑았던 나’,
‘처음 창조되었던 나’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우리가 해마다 이렇게 강림절, 대림절을 보내는 까닭은 그 본래
순수한 나를 찾아 길을 떠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막13:33)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긴장케 하는 말씀이 아니라, 가슴 가득한 기대와 설렘으로 주님의 강림을 열망케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은 사르며 불이 물을 끊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지금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을 위해 경이적으로
강림해주시기를 고대(苦待)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그들의 사정은 앞 장의 끝에 슬프고 처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63:19)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철없는 아이가 마치 엄마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주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고, 주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잃은 지도
오래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호소는 그들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묘사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 나라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버렸고, 외세에 의해 주의 성소마저 잔인하게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요? 사실 책임은 모두 자신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덧 주의 길에서 떠나 있었고,
마음이 완고해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63:17) 하는 고백 속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에 대한
회한(悔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한이 젖은 목소리 그대로 본문에서 주님의 강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곰곰이 읽어보면, 자신들을 회복시켜주실 주께 대한 기대가 있고,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신들을 한껏 낮추는 고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본문 3~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 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을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 말은 자신들을 회복시켜 주실 주님에 대한 기대입니다. 5~7절 말씀은 찬양대가 먼저 읽고 그 다음 여러 성도님들이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물론 7절 말씀은 다같이 읽는 것입니다.


   “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


  이 말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은것이니다.”(8절)


  이 말은 자신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한껏 낮추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이 기대와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과 고백을 거치면서 비로소 회복의 새 기운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신감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자신감으로 인해 나라도 반으로 갈랐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 돌아오라고 호소할 때도 그들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으며 가슴을 닫아걸고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자신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강대국들은 끊임없이 침략을 거듭해 왔고, 사람들은 하나 둘 범죄자가 되어갔습니다. 자신들의 의는 금세
더러운 옷 같아졌고, 존재는 잎사귀처럼 시들어만 갔습니다. 죄악이 바람 같이 그들을 몰아갔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어졌습니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도 없었습니다. 위기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이 내게 보이지 않을 때, 위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라는 이사야의 호소는 그래서 그보다 더 절절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이사야 선지자의 절절한 요청은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만 소멸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소멸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닿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 안에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는 마침내 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래전 이사야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신
사람들은 그들 안에 있던 어둠이 물러가고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나, 죄 묻지 않은 본래의 순결하고 맑았던 나, 처음 창조되었던 나’를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이 나에게 오심으로 그리고 계심으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지금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것인가?”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베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막13:28~29)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긴장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설레게도 하는
말씀입니다. 무화과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되듯이, 우리 역시 계절과
풍경의 변화를 보면서 주님이 가까이 오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껏 주님을 외면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이 말씀은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아직 세상에 집착된 내 마음을 채 주워 담지도 못했는데 주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 하니 그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의 숨인 성령으로 나의 숨을 쉬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으로
내 영혼을 다듬으며, 어느덧 내 존재 전체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있다면, 무화과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는 것이
어찌 설레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닮은 그분이 나를 사랑해 주시고, ‘죄 묻지 않은 본래의 순결하고 맑았던 나,
처음 창조되었던 나’를 내가 만날 수 있다면 이 강림절, 대림절은 우리에게 그 어느 계절 못지않게 행복한 계절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내가 그 언저리에 걸쳐 있는 곳은 지금의 내 신앙의 자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강림절, 대림절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축제로 맞이하고, 이제 도달할 그 때를 준비하는
절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그리움의 실체인 예수님을 통해 다시 찾게 하신 하나님의 형상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보고 싶은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살다가 설렘과 기쁨으로
먼 길 마중 나가도록 해마다 이 절기를 통해 다시금 이사야 선지자의 호소와 기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진짜 나의 모습을 찾으라 하십니다. 그 기회를 다시 주신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찾으라 하십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움을 찾아 떠나는 4주의 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이 강림절, 이 대림절의 신앙과 그 의미를 어떻게 공감하게 할 수 있을까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떠오르게 하셨던 얼굴이 나의 반쪽 이상의 모습을 닮으신 어머니였습니다. 보고 싶어,
그리워 항상 아직도 도착하려면 멀었는데, 먼 길 마중 나와 기다리시는 그 마음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 없는 화려한 삶은 실상은 밤마다 닦아내는 화장과 같은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될 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강림절, 대림절을 지나 성탄의 아침을 맞이할 때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더 아름다운 얼굴로 변화된 우리는 서로 축하해 주는 멋진 성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무화과 잎이 연하여져도 아무런 깨달음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
어디에 가까이에 있는지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안에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강림절, 대림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 깨어 있음과 설렘과 그리움으로 예수님 오실 때 먼 길 마중 나가 기쁨으로 맞이하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성탄의 아침에 더 아름답게 변화된 나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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