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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1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1.15 13:43 조회 972 추천 0


2015년 11월 1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Nov_15)
우리가 넓혀야 할 것  고후6:11~13


<심방 다녀오는 길>
  억 대 기계를 새롭게 들여와 최귀환권사님이 사업장 심방을 요청하셨습니다. 단비인 가을비를 맞으며 가을의 들녘과
가을 산이 연출한 자연의 은총을 만끽하며 향남에 있는 사업장으로 갔습니다. 새벽에 묵상 중에 주셨던 이른 비, 늦은 비의
은총이 이제 씨를 뿌려 막 자라기 시작한 사업장 위에 내려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축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어려움도 많았고, 아직은 성장을 단언하기를 조심스럽지만 기계도 늘어나고, 사무실도 늘어나고,
심방 받기로 하고 주문도 늘어나고, 내년도에는 수십억의 매출을 목표로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흐뭇하고 뿌듯했습니다. 우리 한서의 식구들이 이렇게 모든 영역에서 더 지경이 넓어지는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중에 담임목사로서 정말 간절한 바램이 있었습니다. 당회를 앞두고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사역을
새롭게 배치하고 일꾼을 세우는 일입니다. 특별히 속회가 큰 폭의 개편이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는 축제가 되고 하나님에게는 기쁨과 영광이 되었습니다. 올 해도 그럴 것이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당회에 직면해서 뿐만 아니라 목회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큰 기도의 제목 중에 하나가
성도들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에 세운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교회는 날로 성장했습니다. 매우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커지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성도간의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음행과 소송 사건 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당파들 사이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사도 바울이 보면서 갖게 된 생각은
‘조금만 입장을 바꾸어 이해하면 되는데, 마음을 조금만 넓히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것입니다.
그 심정이 백분 이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먼저 다같이 읽겠습니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언제나 열려있었습니다. 어떤 비밀도 없이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안에 어떤 문제라도 넓은 자비의
마음으로 덮고, 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마음으로 목회를 했고,
지금도 그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씁니다. 힘과 능력이나
재력으로 본다면 부모님이 아주 연로하시기전까지 자녀에게 지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는 것은 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언제 사랑이 큰 쪽이 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국은 사랑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만 표면적으로 사랑이 큰 쪽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자식에게
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 접한 글 중에 제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글입니다.
글의 제목이 ‘교인은 甲, 목사는 乙’입니다. 글 내용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은 몹시 힘든 날이었다. 너무 속이 상해 어디론지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농촌의 작은 교회는
   세상에서 회자되는 관계로 말한다면, 성도가 갑이고 목회자는 을이다. 교회 그만 나가겠다는 통보는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그 중 마음이 쓰이는 분이 윤 집사이다. 지난 주 목요일에 그는 고구마와 고추를 수확한다고 했다. 그가 부탁하기 전에
   내가 먼저 승용차로 집까지 수확물들을 운반해 주겠다고 했다. 그 집사님의 집에서 밭까지는 십 리 정도 되는 거리이다.
   그런데 그 날 손님들이 들이 닥친 데다 교회 텃밭 고구마를 캐다 보니 약속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좀 늦더라도 운반해 줄
   요량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그날 밤 늦게 통화가 되었는데 목소리가 많이 뒤틀려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일 아침 전화를 하니
   교회 그만 나가기로 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울컥 나오려 했다. 예배를 앞두고 그의 밭으로 갔다. 윤 집사님이
   막 일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에게서 무엇 때문에 교회를 그만 나오려 하는지 물었다. 그는 목사님이 되어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또 헌금 송으로 부르는 찬송가 50장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를 다른 것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주문도 해 왔다. 헌금을 은근히 강요하는 것 같아 싫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목요일 약속 어긴 것을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전화를 했는데 안 받았다는 얘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다. 헌금 송은 당장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윤 집사님이
   순간적으로 감정이 올라 목사님 속 썩인 것 같아 죄송하다며 사과를 해 왔다. 나는 울먹이며 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야말로 큰 파도가 한 번 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윤 집사님과 생각보다 긴 시간을 대화하는 동안에 성도들로부터 전화가 쇄도했다. 왜 데리러 오지 않느냐는 성화 전화였다.
   이런 연유로 주일 예배가 제 시각에 시작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봉헌 기도를 마칠 때였다. 이 권사님이
   화난 표정을 지으며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아내가 따라 나가고 밖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크고(권사님) 작게(아내)
   들려왔다. 아내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이 권사님이 대단히 화가 나셨어요.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하셔요.”
   교회에 나오지 않은 권사님 두 분은 명단이 올랐는데, 정작 교회에 나와 헌금한 자신은 빠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지난 주 헌금한 것을 착각하신 것 같다고 말씀 드려도 통하지 않고, 두 권사님은 지난주일 예배에 나오신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아닌 것을 우길 때는 뾰족한 수가 없다. 자신의 주장이 옳을 때는 목사님이
   실수했으니 더 이상 교회 나오지 않겠다고 하고, 또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경우엔 기분 나빠 교회 안 나오겠다고 한다.
   연세 드신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이다.
   예배당에서 잠시 기도한 뒤 권사님 댁을 찾아갔다. 권사님은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큰 아들 부부가 우리를 맞았다.
   이 들도 오랜만에 어머님을 뵈러 왔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을 갖고 아내는 주뼛주뼛하다가 권사님이 예배도
   끝나기 전 화를 내며 나간 전후 상황을 아들 부부에게 이야기했다.
   옆에 있던 며느리가 “요즘 와서 어머니가 그런 실수를 자주 하신다”며 “치매기가 좀 있는 것 같으니 목사님이 이해하시라”고
   했다. 농촌교회에서 많지 않은 성도들을 섬기시는 목사님 내외분의 어려움을 십분 안다고도 했다. 나는 나의 왜소한
   목회자 됨을 탄식하며 터벅터벅 교회로 돌아왔다. 나는 왜 이것 밖에 하지 못할까.”
 
  마음이 아팠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 목사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교인은 갑, 목사는 을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 목사님의 모습 속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관계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은 양, 목사는 목자 그리고
교인은 자녀, 목사는 부모라는 것입니다. 목자이기에, 부모이기에 품어야 하고, 져야하고, 잘못했다하고, 찾아가야 하고,
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큰 쪽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그렇게 마음을 넓혀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도 이렇게 마음을 조그만 넓히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13절) 언제나 마음을 열고 대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권하니, 제발 너희들도 서로 마음을 넓혀 이해하고
용납하여 하나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가슴에 창을 낸 사람>
  가슴을 뚫어 하늘을 나는 우리의 고유 놀이가 있습니다. 연날리기입니다. 빨갛게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연날리기하던 추억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운데 동그란 구멍이 난 네모 연을 우리가 흔히 방패연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네모난 중국 연이나 일본 연에는 구멍이 없으니 그건 방패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연에는 가운데 둥근 창이 나 있습니다.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이 연은
방패로서 제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거나 사실은 이 연이 앞뒤가 꽉 막힌 방패연 따위와는 상대가 되지 않게 잘 난다는
것입니다. 앞뒤가 막힌 방패연은 꼼꼼하게 균형을 잘 맞춰 만들지 못하면 금세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그런데 가슴에 창이 난 연은 서투른 솜씨로 어설프게 만들어도 잘 뜹니다. 비례가 좀 덜 맞아도 두둥실 자유로이 나는 것은
가슴 한복판에 동그란 창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뚫린 그 창 덕분에 돛으로 움직이는 배처럼, 가슴으로 드나드는 바람을 써서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창은 바람 길을 엽니다. 바람 길이 열리면 숨이 트이고, 숨길이 트여 소통이 잘 되면
하늘을 납니다. 연이 바람결을 써서 하늘을 나는 건 내가 네게로 들고 네가 내게로 드나드는 놀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창을 막아놓고 있지 않습니까? 내 권위를 방어하려고 이 창을 막았습니다. 내 자존심을 방어하려고
이 창을 막았습니다. 대우받으려는 집착으로 이 창을 막았습니다. 소통의 결이 열리면 숨이 트이고, 숨길이 트여 소통이 잘 되면
온 마음이 시원할 텐데 말입니다. 가슴에 창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걸림 없이 나를 드나들도록 말입니다.
내가 교만한 마음을 내버리고 겸손해질 때, 내가 완고한 마음을 내버리고 부드러워질 때 우리는 가슴의 창을 여는 것입니다.
존경받고 싶은 교만, 대우받고 싶은 교만, 군림하고 싶어 하는 교만한 마음은 끝내 사람들이 내게 드나들 창을 막고
스스로 고립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을 가장 경계해야 할 악으로 보았고, 교만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16:5),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18:12)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전7:8)


  목회하면서 목사로서 참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담임목사이니, 목회자이니 품으라는 것입니다. 찌르는 가시 때문에
상처가 나고 피가 철철 흘러도 그냥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도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품으셨기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품을 수 없다면 성직을 그만 두어야지요.
  그런데 질문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만 품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품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전할 책임이 목사에게만 있나요? 여러분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품어야할 책임과
명분이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으신 사랑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헌신의 은총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그 예수님처럼 살기를 배운 제자라고 자처하는 성도라면 더더욱 마음을 넓혀 서로를 품어야 합니다.
기름 부어 세움 받아 목회를 협력하고 성도를 일선에 섬기라고 직분을 받은 평신도 지도자라면 당연히
마음을 넓혀 일반 성도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 이의가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소그룹의 목자로서
부름 받은 속장, 팀장, 대장, 교사 역시 마음을 넓혀 품어야 할 일꾼들입니다.
  그런데, 왜, 품지 않으십니까? 왜 목사보고만 품으라 하십니까? 왜 품으려는 시도나 노력이나, 마음조차 먹지 않습니까?
  사실, 내 권위와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이 죽을 만큼 어려운 것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그 영혼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 길 함께 가는 동반자로서 한 식구라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나를 내려놓는 일도, 그 누구를 받아들이는 일도 내 힘과 의지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덧입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좁은 사람의 특징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다스림을 받을 수 없으니 마음이 열릴 리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부터 먼저 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가족 여러분!
  우리가 먼저 넓혀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조금만 넓혀도 사람과의 관계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 교회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일들이 더 넓게 일어날 것입니다. 가슴에 창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걸림 없이 나를
드나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세상에 용서 못할 죄는 하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이 땅에 용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간에 있는 일들 역시 용서 못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발 마음을 넓히십시오. 우리는 한서의 한 가족, 한 식구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품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품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용납하게 하시고,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 넓히는 일 정말 어려운 과제입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안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령님 다스려 주옵소서. 내 가슴에 창을 내게 하여 주옵소서.
권위 손상을 입고, 자존심에 상처가 나도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과 여유와 평강을 주시옵소서.
우리 한서교회가 하늘의 모형이 이 땅의 천국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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