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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2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0.25 13:45 조회 928 추천 0


2015년 10월 2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종교개혁주일, 2015_Oct_25)
옳은 것이 좋은 것  로마서12:2


<축복>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욜2:13)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이란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영적 갈망으로 드리는 자세를 말합니다. 나의 기대와 요구를 채워주어
나를 기쁘게 하는 예배가 아닌 상한 마음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십시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맡기십시오.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함과 간절함으로 말씀을 대하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십시오. 마음이 상한 자는 고쳐주시고, 포로 된 자에게는 자유를,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처럼 예배에 대한 갈망이 있는 성도에게 서로 인사합니다.


“000에게 배우겠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사진자료-종교개혁 순례 중]
  사진 자료 하나 먼저 보겠습니다. 종교개혁지 순례 중에 마르틴 루터가 1521년 3월에 보름스 대성당 뜰에서
심문을 받았던 자리입니다. 교황에게 제안한 95개조의 반박문에 대하여 루터를 소환해 그의 견해를 묻고
심의한 것이 바로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수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이에 루터는 하루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이미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문을 당할 만큼 엄청난 파장을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중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루터는 그의 결심을 담담하게 전합니다. 자신의 주장과 책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이 바로 사진자료에 소개된 것입니다. 루터는 고백합니다.
“로마신성제국과 황제 앞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입니다.


  옳은 것을 선택한 용단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이렇게 중간에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텐베르그의 인쇄술의 발명으로 루터의 옳은 것에 대한 주장은 글을 타고 삽시간에 독일 전역과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일파만파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회유가 있었을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뜻을 전달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만 두자고 적당한 명분론은
루터를 충분히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유혹을 이겨내고 옳은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개신교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옳은 것이 좋은 것>
  오늘은 바로 제498주년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타락하고
부패한 신앙에 대하여 95개 조항의 공개 토론 제목을 비텐베르그 궁정교회의 게시판에 붙이면서 신앙 개혁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개혁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신앙의 기본을
다시 회복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루터가 보기에 옳은 것이란 크게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이 신앙생활에 중심이어야 하는데 조상들의 유전과 교리가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대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속죄권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과 교황에게 도전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앙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루터는 이것이 다 성경과 대치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서1:17의 말씀을 붙잡고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수행이나 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관입니다. 타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의롭다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내 죄에 대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단어 ‘테수바 teshuvah’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섬’이고, 다른 하나는 ‘대답’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돌아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소리는 부드럽지 않습니다. 거칠고 차갑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을 향하여 프로테스탄트, 저항했던 대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항의 이유였던 그것을 지금 우리가
답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적나라한 실례가 바로 엊그제 있었던 목사 간 칼부림 사건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품에 쓰러졌던 탕자처럼, 우리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무정해진 마음, 돈과 세상의 힘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쾌락을 구하느라 팔아먹어 텅 비어버린 우리 마음을 고쳐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낮아져 엎드리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기도가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고쳐주시기 위하여
    슬픔으로 때려 상처를 내시며,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우리를 죽이십니다.


  진정한 종교 개혁은 제도 개혁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생명의 방향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의로워진 자들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하여 날마다 성결을 유지하고 변화되기 위하여 삶 속에서 성화를 이루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성령의 열매도 맺는 것이고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하나님의 전전인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신 분이지, 마리아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만인 제사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 상반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교회 안에
제사장이라면 여러분은 세상 속에 파송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지금까지도 이것을 믿지 않아요. 그 예가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부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해야 죄 사함 받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목사한테 와서 고해성사를 하십니까? 아니지요. 여러분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와서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으시지요.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목회자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분별하라.>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꼭 챙기게 되는 것이 일기예보입니다. 날씨가 그만큼 우리의 삶에 다양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기예보에 집중하는 만큼이라도 시대를 분간하고, 옳고 그름에 대하여 주목하고 분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주인의 뜻을 알고 예비함(눅 12: 47)’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사회에는 전통적으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처세술이 의식 깊이 내재해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성과 삶의 행태를
몰윤리, 탈윤리, 비윤리적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좋고 나쁨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르냐?’를 따져 묻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과 속임은 2∼3번을 넘길 수 없습니다.
진실과 정직, 옳음과 진리가 우리의 생명력을 확보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심령을 쥐어뜯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고, 오로지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눅 22: 39∼44).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옳고 바른 것’을 몸소 구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가? 지금 이 시대와 삶이 바른 것인가?’ 묻고 분간하며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2).”


  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옳은 것을 분별하고, 시대를 바로 분별하는 지혜와 믿음이 진정 ‘개혁의 길, 사는 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게 좋은 것입니다.


<기도>
  옳은 것을 따랐던 루터의 개혁신앙을 오늘 우리가, 한서교회가, 한국교회가 배우길 원합니다. 말씀 중심, 오직 믿음으로,
세상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하여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겸허히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부터 먼저 엎드림으로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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