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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1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0.18 13:46 조회 862 추천 0


2015년 10월 1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Oct_18)
한 사람, 두 얼굴   마가복음8:27~38


<들어야 말합니다.>
   대부분 많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순간부터 설교의 제목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지난주에 설교 제목을 기억하신다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지난주에 설교제목이 무엇일까요?
‘들어야 말합니다.’입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네요? 그것은 먼저 제가 설교를 잘했거나 혹은
성도 여러분들이 집중력이 뛰어나서 그럴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는 후자이지요.
오늘도 그 집중력을 기대해 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진정한 ‘들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귀 막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귀가 멀어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말까지 어눌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를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고치십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귀속에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십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그가 놀라지 않도록 배려하며 치유하십니다. 손가락을 환자의 귀에 넣음으로 ‘내가 지금 너의 귀를 열고자 한다.’는
뜻을 전달하셨고, 침을 그의 혀에 바름으로써 ‘지금 내가 너의 입을 열고자 한다.’는 뜻을 분명히 전달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와의 감각 기관을 통하여 소통에 나서셨고, 그의 닫힌 정신세계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려라’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느 신체의 한 부위가 열리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 존재 전체가 매임으로부터
해방되라는 실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전 존재에도 복음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괴롭히는 모든 사단의 압제와 결박이 풀어지고, 끊어지며, 사라지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들어야 역사가 나타나고, 치유가 되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른 신앙의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신앙의 행함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방되고, 치유되며, 바르게 말하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 진정한 ‘들음’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 소통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회복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살아야 우리는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를 아주 잘 보여 주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와
소통이 단절될 때의 베드로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한 사람, 두 얼굴>
  오늘 본문은 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나눴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의
변두리를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길을 걷던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가 막바지에 이른 것을 아시고 당신의 존재를 명확히 할 필요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전해드립니다. 우리는
이들의 보고를 통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28~2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28~29)


  예수님의 물음에 첫 번째 나온 대답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헤롯 안티파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와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일정 부분 겹치기 때문에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리고 더러는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견해였습니다.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8장15절에서는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평가 중에서 가장 좋은 면만을 전달한 것이지만 그러나 제자들이 전해주는 대답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정체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의 헬라어 명칭입니다. 다윗 계통의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일등 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사상은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훗날 마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더 완벽하게 기록하였고(마16:16),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축약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9:20) 아무튼 이 기록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명확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도 세 복음서가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지만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30절)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이 당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주신 후에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토록 경고하셨습니까? 이러한 이적들이 믿음을 일으키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귀가 열려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혀가 풀려 말씀을 말함으로써’ 보다
성숙해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경고도 그렇습니다.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릇된 정치적인 기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하고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 기대 안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공개하지 말도록 엄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대답이 있은 후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라는 베드로가 받았던 칭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고백은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가능하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이후입니다. 그렇게 의미가 깊은 신앙고백을 하고 감격스러운 칭찬을
들었는데, 그 감동의 분위기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호된 꾸중을 듣습니다.
다같이 본문 31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에서 예수님의 일행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진 직후에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이 수난 예고는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가 나빠지고 말았습니까? 사실 죽음의 길을 가는 스승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스승 앞에 주어진 고난의 길로부터 스승을 지켜내는 것은
제자로서의 당연한 도리이지요? 그러나 이 소박하고 당연한 도리 안에조차  사탄의 유혹이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제자에게 사탄이라고까지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과 ‘사탄의 일’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에서 주님은 사탄의 유혹을 보신 것입니다. 아무리 당연하고 소박한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다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받고 죽는 것이 메시아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거칠게 항변함으로써 예수님이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태도는
분명히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의 것과 닮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패배할 때나 수치를 겪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으로 인해 늘 승리하는 삶을 상상하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유혹이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4~35절)


  왜 베드로가 주님에게 그토록 심한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았지만 고난 받는 메시아로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이 여정의
피곤함을 미리 알고 거기에서 이탈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신앙관을
성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여러분은 이 ‘누구든지’에 여러분을 포함시키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포자기하고 자기를 학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그 분의 거룩한 사역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길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보람 있고 행복한 길이고,
그렇게 사는 길이 마침내 승리의 길인 것을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을 결국 죽음의 길이 아닌 사는 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두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최고의 칭찬을 들은 이후에 이내 최악의 꾸중을 듣고 맙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에 대한 집중력의 차이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을 때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생각했을 때 꾸중을 들었습니다.


  구약의 지혜서는 한 사람으로서 두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권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1:23)


  여기 ‘들음’과 ‘돌이킴’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들음’으로부터 ‘돌이킴’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들음’이 없이는 ‘돌이킴’도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혹여 돌이킨다 하더라도 그 돌이킴이 들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엉뚱한 방향으로 돌이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듣고 돌이키는 자에게 지혜는 약속합니다.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공동번역에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내 속마음을 부어주고 내 속엣말을 들려주련만” 만약 베드로가 주님의 속마음을 알고 주님의
속엣말을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주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당연히 말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님에게 사탄이라는 꾸중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신서에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말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는 더디 해야 합니다. 진정한 ‘들음’은 주님의 소리를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리석음과 거만함과 미련함을 버리고 매일매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우리 입이
떠벌이는 대로 놓아둔다면 우리는 필경 주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고독하면 고독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에 따르면,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고독은 회심(回心)의 장소이고,
낡은 자기가 죽고 새로운 자기가 태어나는 가지 변형의 용광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변화는 고독과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가족, 식구 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산함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그 고요함은 우리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고백 위에 나를 세우고 나의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 아닌 주님으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목사이며 시인인 서재경 님의 시 몇 구절을 소개하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아아, 가을 길은
    곱게 물든 단풍으로 너무 충분하고
    소담한 쑥부쟁이 꽃빛으로 이미 눈부시게 거록하니
    은총은 창공에 가득하고
    속죄는 길바닥에 넘쳐나니


    낙엽보다 천천히 걸어가며 조용히
    참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무처럼 멈추어서 하늘을 우러러
    찬미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깊어 가는 가을, 부산하게 걸어왔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 주옵소서.
그 소리를 들음으로 사람의 생각으로 살아왔던 것을 참회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기꺼이 주님의 멍에를 함께 지고,
주님의 사역에 쓰임 받아 닳아 없어지도록 나를 드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자에게 주시는
영적인 자유와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하시고, 그 길 끝에서 주님을 영광 중에 만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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