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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1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10.11 13:48 조회 840 추천 0


2015년 10월 11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Oct_11)
들어야 말합니다. 마가복음7:31~37

<축복>
  지난 주간 교단 장단기발전위원회 회의 잘 마치고 왔습니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설악산 병풍바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집 보다는 덜 좋습니다. 집이 제일로
편안하고 좋습니다. 집이 제일로 좋은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그것은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 영원한 집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있는 영원한 집의 모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고 좋습니다. 세상의 염려, 걱정과 근심 다 내려놓고 마음과 영혼의 쉼을 얻는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식구에게 이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평안하세요. 힘내세요.” 


<앎으로 가는 과정>
  시인 이대흠 님의 작품에 보면 예순을 넘어 한글을 깨우친 수문댁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글을 배운지
몇 달이 지나자 도로 표지판을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으로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하게 되고, 광주 서울을 다 읽게 됐는데, 새로 글로 알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했더랍니다. 그동안 한글을 모를 때 수문댁은 자기나름대로의 단어를 가지고
불편 없이 살았습니다. 장흥을 자응이라고 부르면서 살아도 불편하지 않았고, 광양을 과냥이라 부르면서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글을 깨우치고 보니까 새로 읽게 된 말과 이제껏 썼던 말이 통 다릅니다.
자식 놈 전화를 받을 때도 ‘옴마옴마 그래부렀냐?’하면 되었는데, 글을 깨우치고 나니까 ‘부렀다’가 아니라 ‘버렸다’였고,
‘가새’가 아니라 ‘가위’였고, ‘쎄’가 아니라 ‘혀’였습니다. 그래서 말 따로 생각 따로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 앎으로 가는 과정이 결코 명쾌하기만 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이제까지 알고 사용해왔던 것을
머리와 습관에서 털어내고, 새로 깨우친 것을 차근차근 익혀 사용하는 것에 어찌 지나온 습관의 저항이 없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설교하시는데 모두가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은 그 은혜의 대상에서 늘 벗어나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전율’과 같은
고질적인 전통주의의 잣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부정한 자로 몰아갔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막7:14)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인격의 가장 심층부에 있는 ‘마음’을 편견과
독선에 오염된 그대로 방치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그 마음을 진리로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고 그 말씀이 마음에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대로 들려오고, 마음으로 깨달아지니 이제 혼란이 옵니다. 모르고 살 때는 괜찮은데 진리를 아니까
충돌이 옵니다. 바른 신앙이란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지난 온 날 우리에게 배어있는 고정관념, 나쁜 습관,
옛 전통 등을 말씀에 맞추어 사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들어야 말합니다.>
  마가가 전하는 이 기적의 이야기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술 방법이
다양하면서도 역동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리적 배경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긴 여행 끝에 갈릴리 호수에 도착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이방 지역에 속합니다. 그때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은 귀가 멀어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말까지 어눌해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감신을 졸업하고 연대 성악 공부도 한 노래 잘하는
목사입니다. 지금 춘천과 화천 사이에서 성실하게 목회를 잘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큰 아이가 잘 듣기 못해서 놀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고 있는 부모는 모르고 지나쳤는데, 교회에 봉사 온 미술 교육을 전공한 선생님으로부터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선생님이 그를 처음으로 이상하게 여긴 것은 다른 비슷한 또래 아이들은 잘 알아듣는데,
그 아이는 잘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별로 하지 않고,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선천적 난청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듣지 못하면 말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들어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시대가 되면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라’(사35:5~6)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할 말도, 할 노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들이 예수님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간구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환자에게 안수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유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안수는 하시지 않고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그리고는 조금 특이한 방법으로 그를 치유하십니다. 본문 33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들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그동안 이러한 동작 없이 얼마든지 말씀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인격적인 소통을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환자는 단 한 번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 사람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환자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심으로써
‘내가 지금 너의 귀를 열고자 한다.’는 뜻을 전달하셨고, 침을 그에 메마른 혀에 바르심으로써 ‘내가 지금 너의 입을 열고자 한다.’는
뜻을 전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와의 감각기관을 통한 소통에 나서신 것이고, 그의 닫힌 정신세계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환자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은 ‘하늘을 바라보시며 한숨을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고통에서 우러난 이러한 신음소리는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갈망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환자가 이제까지 겪어온
고통에서 당신의 고통을 느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에도 바로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름대로
사물의 소리를 잘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사물이 지어내는 온갖 소리와 소음을 들으면서
그 소리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소리와 소음에만 반응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듣는다고 할 때, 무엇을 일러 과연 진정으로 듣는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들음’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 ‘들음’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들음으로부터 무심하고 점점 귀가 어두운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나를 바라보며 한숨지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절)
  ‘에바다’(에파타, Ephphatha)는 아람어로 ‘열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체의 어떤 부위가 열리라는 뜻이기보다는
인간 전체가 매인데서 해방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심리요법에서 사용되는 이른 ‘언어적인 격려’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동안 너를 결박하고 있던 사탄의 압제를 부숴버리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군대 귀신을 향해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5:8)고 명령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그 뜻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5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여기에서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라는 말씀은 ‘그의 형의 결박이 풀리고’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의 세력에 매여 있었고,
그로 인해 존재 전체가 부자유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주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의지를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매우 암시적인 교훈을 줍니다. 주님은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는 사람은 믿음을 통해 자기 안에 이루어지는 주님과 소통과 구원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지만,
반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통해 해방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항상 우리 자신을 주님을 향해 열어놓고, 말 더듬는 자가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마침내 말이 분명해진 것처럼,
우리 역시 신앙의 혀가 풀려 믿음의 언어가 분명해져야 할 것입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일어난 기적은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생활 가운데서 수없이 반복되는 현재적 사실입니다.
귀가 먹기 때문에 벙어리가 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사안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신 차려 듣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혀에서 나가는 언어들이 그만 불신앙의 언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불행입니다. 복음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닫아놓은 눈을 눈 먼 이들에게 돌려주시고
죽음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할 나사로를 부활시키셨습니다. 주님은 과거에 하나의 기적행위에 불과한 작은 치유를
보여주셨지만 현재는 보다 큰 치유를 이루어주십니다. 오늘날에는 숱한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습니다.
귀 먹은 육체적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닫힌 마음의 귀는 활짝 열려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가족 여러분
  우리가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는 말과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언제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말씀을 걸러 듣는 여러분만의 거름종이, 필터를 제거해야 합니다. 유대인이라는 비뚤어진
선민의식과 고정관념의 필터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진리를 보아도 듣지 않고 보지 않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만든 것입니다. 자기 식으로 말씀으로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착각합니다. 거름종이, 필터가 필요하다면 성령이 주시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신앙의 말을 하고,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글을 배워 익히는 수문댁 처럼 선입견을 버리고 백지장처럼 말씀을 듣는 일도,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그대로 살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구하면서 성령의 필터로 걸러진 말씀을 듣고,
더듬더듬이라도 신앙의 언어로 말하고, 말한 대로 살아가기를 힘써서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영적 자유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에바다 우리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진리를 가로 막는 사탄의 역사를 물리쳐 주옵소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들은 대로 신앙의 언어로 말하게 하시고, 신앙의 행함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들어야 바르게 말하고 제대로 살 수 있음을
가슴의 심비에 새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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