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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2부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9.20 13:42 조회 1,154 추천 0


2015년 9월 20일 2부 설교 동영상 입니다.


150920(주일)
제목: 행복, 지금 이 순간
본문: 신33:26~29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불행을 위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새로 등록한 남자청년과 함께 새가족모임을 가지면서 나누었던 이야기입니다. 나이는 30대 초반되는
청년이었는데 출판업계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
‘지금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지금 자기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누구 결혼할 상대나 교제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는데,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행복하다’라고 느끼게 하는가를 물었더니, 그냥 직장도 있고, 그래서 큰 부자는 아니어도
정기적인 수입도 있고, 차도 있고... 뭐 그래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하는 일에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냐고... 그랬더니 뭐 꼭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청년 입장에서는 청년실업 115만명 시대에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장도 있고, 고정수입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말하는 그 청년에게 다시 되물었습니다. ‘그 직장과 수입, 젊음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
잠시 있다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느냐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행복의 조건을 그 청년처럼 소박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에 만족하며 살다보면,
그런 것들이 내 삶 가운데서 사라지게 되는 때를 맞이하거나, 또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없는 환경에 이르게 될 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행복이라는 것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면서
현실에 만족해하는 삶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나는 행복하다’를
노래하면서 주어진 환경 속에 안주하게 되면, 그 이상의 것에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의 행복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부터 두 장의 사진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첫째 사진은 ‘초코렛케이크’인데,
가격이 무려 80억원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면 80억짜리 케이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누가 저것을 먹었을지도 궁금합니다.
 다음 사진은 세상에서 5대 밖에 없는 13억원짜리 휴대폰입니다. 이 휴대폰은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누가 만드는 것이고, 누가 사는 것일까요?
 요즘 신형휴대폰 가격이 거의 100만원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열심히 절약도 하고
땀흘려 일해서 그동안 갖고 싶었던 신형휴대폰을 100만원 주고 구입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최소한 몇일 동안은 그 새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러 저러한 기능들을 살펴보면서 감탄도하고 자랑도하면서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보신 13억원짜리 휴대폰이 있다는 소식을 100만원짜리 휴대폰을 사서 행복해하고 있는 사람이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연 여전히 행복해 할까요? 상대적 빈곤감, 박탈감에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그 순간 만끽하던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80억원짜리 케이크를 만들고, 13억원짜리 휴대폰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기네스북에도 올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물론 팔아서 수익을 올리는 것도 목적일 수 있겠지만, 결국 그런 것들을 통해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아직 멀었다.’ ‘이 작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좋은 것을 바라봐야 한다’라고 하는
목표지향적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고 성취하게 하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땀흘려 일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우리 개개인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이런 세상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자본, 즉 부와 욕망을 쫓아 살아가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유혹하고 채찍질하는 이 세상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을 작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빼앗아감으로써,
고된 일터로 우릴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불만이 가득한채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기만과 숱한 유혹의 함정들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오늘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모세가 말년에, 12지파를 각각 축복하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축복하며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마지막 절인 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라는 ‘행복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한 사람인지 그 이유를 앞뒤의 말씀들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시기 위해 하늘을 타고 나타나시며, 그들이 거하는 처소가 되어 주시고, 하나님의 팔이 그들을 떠받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대적을 멸하게 하여 주심으로 안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슬을 내리심으로
곡식과 새포도주가 가득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모세는 선포합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호하심과 축복 아래에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자 결론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 행복을 선언해 주신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 나와도 함께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도 이스라엘 못지 않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행복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얼마만큼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높은 지위에 올라있고 하는 것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많이 가질 수록 행복해 질 것이다’라는 막연한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예) ‘세상의 이런일...’이라는 TV프로에서 방영된 내용인데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말씀을 준비하며 알게 된 내용입니다.


 충남 홍성군, 한 편의점 앞에 있는 감나무에 최근 매일같이 50원이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편의점 주인은
이런 현상을 이상하게 여겨 50원을 따로 모았습니다. 그 개수만 벌써 수십 개가 되었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50원짜리 동전을 발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멀쩡한 나무에서 매일 50원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근처 학교의 학생들이 장난을 치는 것인지 아니면, 호수나 분수처럼 감나무에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비는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CCTV로 24시간 나무를 주시하며 50원의 행방을
쫓아보기로 했습니다. 오랜 시간 관찰한 결과, 한 아주머니가 나무를 향해 무언가를 던지는 장면이
목격됐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그 편의점에 매일 파지를 주우러 오는 분이셨습니다. 그 아주머니에게
왜 50원짜리 동전을 던지고 가냐고 물으니까... “고마워서요. 파지를 앞에 내놔주는 편의점은 없거든요.”라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파지를 모아주는 편의점 주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50원이었을까요? 아주머니가 매일같이 편의점 자판기에서 사가는 캔 커피 값은 850원.
그 거스름돈 150원 중 50원을 던지고 가신 겁니다.
‘50원’ 적은 돈일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에게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아주머니가 하루 종일 파지를 주워
버는 돈은 3,000원. 그 중 50원을 감사의 표시로 매일 말없이 던지고 간 겁니다. 몰래 던지고 간 이유도
"적은 돈이라 안 받을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 때서야 편의점 주인도 그 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감나무에 ‘행복을 전하는 50원 저금통’을 매달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물론이고 그 사연을 전해들은 동네 사람들까지 저금통에 50원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모인 돈은
파지 줍는 아주머니에게 전달될 예정입니다. 이웃을 돕는 따뜻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서 그 마을의 감나무 미스터리가
마을의 명물이 됐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행복’이라는 책에서 보면, 멕시코의 1인당 국민소득은 7천달러 정도로 호주의 5분의 1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 행복 순위’에서는 멕시코가 호주를 앞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행복연구 저널〉이라는
연구전문지에 따르면, “일단 기본적인 생활수준만 갖추면, 다시 말해 오늘날의 멕시코 정도의 수준만 되면
더 잘살게 된다 해도 행복이 늘지 않는다.”라고 연구결과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1인당 국민소득
7천달러 정도 이상이 되면, 그 때부터는 행복이 돈이나 물질적인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저금통이 묵직해지는 만큼 행복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질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렇게 많은 돈이나
물질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린 것이고 때로는 내 것을 비우는 비움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행복과 물질의 상관관계는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내가 갖고 싶은 것을
갖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루고 싶은 꿈이 성취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내 안에 부족했던 것,
즉 결핍된 상태가 극복되고, 그런 것을 채우려고 하는 욕구들이 채워질 때에 희열과 함께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결핍된 상태가 그 끝, 그 한계가 무한하다는 점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갈망하는 내 안의 결핍증은 마치 밑빠진 독처럼 채우면 채울수록 계속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말입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우리 존재 자체가 본래부터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로 창조함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족과 결핍을 채우려는 욕심과
이기성의 노예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나는 간절히 바랄 수는 있어도,
행복을 생산해 낼 수단과 방법이 내게는 원천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하지 못하다고, 나는 불행하다고 너무 낙심할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 열심히 땀흘려 수고한다고 해서, 수고한 만큼의
행복이 찾아와 주던가요? 딱딱 맞아떨어지는 수학공식처럼 땀의 양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 냉혹한 인간사회에서 매일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행복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만물을
다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는 순간에는,
내가 소유한 것의 많고 적음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순간, 모든 물질적인 개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관 속에서는 더 이상 내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진정한 만족, 진정한 충만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내 속에 있는 시커먼 욕망의 늪을 뛰어넘어, 참된 행복감으로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3절로 4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흉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진 이삭이 애굽 땅으로 내려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땅에 머물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있어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배고픔과 기근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 하면,
반드시 복으로 채워주시겠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도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의 시작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받은 축복의 말씀처럼 번성하게 되었고, 우물을 파는 곳마다
샘의 근원을 만나는 르호봇의 축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6장 12절과 13절의 말씀에서는,
그 땅에서 농사지을 때에 백배의 소산을 얻었고 창대하게 되었으며,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80세까지 살면서, 아들 야곱에게로 이어지는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래 살고 부자가 되었다고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그의 삶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행복선언의 말씀이 나에게도 주어진 약속임을 기억하고 주와 함께 하기를 소망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언제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되는 동화 한편이 있습니다. 벨기에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동화입니다. 어렸을 적에 한번쯤 읽었거나 그림책으로라도 보았을 만한
동화입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으셨을 것 같아 짧게 줄거리를 소개해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어린 남매인 ‘치르치르’(Tyltyl)와 ‘미치르’(Mytyl)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 속에서
요술쟁이 할머니가 나타나서는 ‘파랑새’를 찾아 달라고 말합니다. 두 남매는 요술쟁이 할머니가 부탁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멀리 여행 길을 떠납니다. ‘추억의 나라’, ‘죽음의 나라’, ‘과거의 나라’를 두루 다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파랑새를 찾지 못합니다. 그렇게 온갖 모험을 끝내고 꿈에서 깨어난 남매는,
자기 집 문에 매달린 새장 안에서 파랑새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이 동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복은 언제나 늘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언제나 늘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은 늘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40년의 광야 기간 동안 친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동행하시면서 물도 먹이셨고, 떡도 먹이셨고, 고기도 먹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40년 유랑기간동안
척박한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지금까지도 성령님을 통해 함께 하고 계십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잠시 잠깐의 찰라도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셨고, 우리 곁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마치 없는 존재처럼 무심할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완전한 만족, 완전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내 삶 속에서 뜨겁게 경험하고
친밀한 교제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기만적인 유혹과 내 안에서 끝임없이 솟아오르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극복하고, 완전한 행복의 세계를 만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정직함’입니다.
 오늘 26절 말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를 때, ‘여수룬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수룬’의 뜻은
‘곧은’, ‘정직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정직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보여준 모습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들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시종일관 불순종으로
일관했던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들 아닙니까? 그런 그들을 향해 ‘정직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해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11편 7절에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한치의 거짓없이 정직히 행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순간 순간 느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다른 것에 목메며
행복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만이 참된 만족과 행복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그분을 뵙는 순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결단해야 할 것은 그분 앞으로 정직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르고 올곧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엄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구걸하지 않고, 양다리 걸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만을 시종일관 바라보는 믿음, 그것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행복의 열쇠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채워주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오늘 나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헛된 욕망과 사리 사욕으로부터 나를 돌이키고, 오직 주님만을 정직히 바라봄으로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간절히 열망할 때, 그 순간부터 행복의 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영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은 ‘짐 울프’라는 알콜중독 노숙자입니다.
과거 군인이었던 짐은 어느날 노숙인의 삶을 청산할 것을 결단하고, 기독교 계열의 노숙인 재활단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이런 영상을 촬영하게 됩니다. 그의 결단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 함께 보시겠습니다.


예) 동영상자료/ '짐 울프' 영상
 
 짐이 알콜중독에 주저 앉아 있었다면, 그리고 노숙인의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인생을 포기했었더라면, 지금쯤 그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현재의 모든 삶을 청산하고,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결단했던 그 날,
그 순간이 그에게는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그럼 행복은 오늘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로
내일의 불완전한 행복을 꿈꾸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와 함께하심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선포해 주시고,
친히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럼 행복의 파랑새는 내가 아둥 바둥 쫒아다녔던 것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늘 함께하셨던 하나님과의 만남 가운데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단독자인 나’는 하나님만을 정직하게 바라봄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행복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불행에 익숙해져서는 안됩니다. 나는 불행하다고 그 어느 것으로도
나의 불행을 해결할 수 없노라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행복할 자격이 충분이 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 이곳에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행복을 선언해 주십니다.
“***야!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야! 내가 너의 곁에 있는 한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 이 하늘의 음성을 꼭 들으시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 기도 >
지금까지 내가 왜 불행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로 하여금
나는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로 하여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정직히 바라볼 때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셨으니, 오늘 깨닫게 하신 방법대로 세상에 나아가서도
하나님과의 동행하심만을 바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상에서 패잔병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늘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정직하게 바라봄으로 행복을 선포하며, 기쁨과 감사 속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선포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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