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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월 3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8.30 14:16 조회 847 추천 0


2015년 8월 30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Aug_30)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 요한복음6:56~69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
  알베르 까뮈가 쓴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삶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어느 날 애꿎은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독방에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다가 천장에 뚫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과 푸른 하늘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마치 난생처음 보는 듯 아름다웠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하늘을 보았지만 하늘이 하늘로 보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뫼르소는 분노와 절망이 사라지면서 가적 같은 환희를 맛보게 됩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들어오는 세끼 밥도 그냥 밥이 아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감격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그렇게 사형 집행일이 다가왔습니다. 관례대로 한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인도하려 그가 있는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그는 이 신부에게서 사물에 대한 어떤 자각도, 순간을 깊이 바라보는 삶의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뫼르소가 보기에는 이 신부야말로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위해 성사를 드리려는 이 신부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이 든 것입니다.
뫼르소는 성사를 거부하고 신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신의 신념이란 여자의 머리털만한 가치도 없다.
당신이 죽은 사람 모양으로 살고 있으니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조차 없지 않은가?”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과연 살아있는 자인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언가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이 하늘로 느껴지고, 햇볕이 햇볕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행복한 느낌이 들 때 행복으로 반응하며,
아픔에 대해서는 아픔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아도 벅참이 없고, 행복을 보아도 행복이 없고, 아픔을 보아도
가슴이 아프지 않다면 필경 우리는 죽어 있는 것일 것입니다.


<빵과 말씀, 기적과 진리>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생명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게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환호했고, 그때부터 그들은 맹목적일 만큼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이해도 수용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빵을 원했지
말씀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원했지 진리를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4~55절)
  예수님은 여기에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을 사용하셨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신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먹는 것과 마시는 개념을 사용하시는 것에는, 보다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 12장 23절에 따르면 피는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실 때 그 말씀은 당신의 생명을 마셔야 한다는 보다 절실한 뜻으로 읽혀지고, 당신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 또한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리라는 절실하고 간곡한 표현으로 읽혀집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믿는 자 자신이 자기가 신앙하는 그 대상 안으로 일치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영적인 먹고 마심이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들이고 내가 그분과 일치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입니까? 이 살을 먹음으로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입니까? 이 피로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한 번 더 강조합니다.
56~5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이암아 살리라.”(56~57절)


  그런데 불행하게도 본문의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빗발치듯 의심과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절)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60절)
  왜 이들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밖에 반응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지금껏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현재’를 채워주고
‘육신’을 채워주는 눈에 보이는 떡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향해 품어왔던 반감을 폭발시키면서
하나씩 등을 돌리고 주님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본문의 조명은 제자들을 비춥니다. 하나씩 예수님의 곁을 떠나는
제자들의 표정과 그들의 심리 상태를 비추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이 이야기하는 제자들이란 12명의 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70명의 제자들이 따로 있었음을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그 제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어렵도다.’ 이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거칠다’, ‘딱딱하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구약에 하갈을 내쫓으라고 사라가
요구했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설명할 때(창21:11),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이 주인의 굳은 마음을 설명할 때(마25:24),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사울의 마음을 설명할 때(행26:14) 이 단어가 적용됩니다.
그러고 보면 ‘어렵도다.’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다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뿐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예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그들의 마음이
옥토 밭이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거칠고 딱딱한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의 문제는 두뇌가 아닌 가슴의 문제였고, 지식이 아닌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분위기를 감지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 말의 뜻은
‘이것이 너희를 화나게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표정 속에서 분노를 읽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가뜩이나 화를 내고 있는 제자들에게 매우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이 보시는 바로 그 눈으로 신앙을 통찰할 수 있도록
강하게 대응하십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 나름대로 보고 판단해왔던 습관을 벗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너희가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에도 너희가 지금처럼 화를 내겠느냐?”는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63절) 이 말씀은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과 유사합니다. 너희의 이성과
지성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는 바로 그 눈으로 신앙을 통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끝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맙니다. 요한은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
  사람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다가 더 이상 예수님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지자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적이고 육적인 것을 추구하고 믿는 사람에게 영적인 진리는 언제나 귀에 거슬리는 듯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자아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한에서만 진리를 허용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돌아서버리고 맙니다.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 말씀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마침내 분위기는 어수선해졌고 아직 남아 있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너희도 저들처럼 가고 싶으냐?, 너희도 저들처럼 떡이 더 중요하냐?” 그런 뜻일 겁니다.
예수님 마음이 느껴지시나요?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나의 경제적인 기적을 보장하는 투자 가치가 있는 대상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흔들림 없이 주님의 곁을 지키며
나 아닌 그분의 가치로 살겠습니까?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기 위하여 기꺼이 우리의 빵과 기적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믿음에는 흔히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과 ‘인간 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버거워도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믿음은 싫으면 내가 떠나는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실 때 베드로가 매우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로리이까”(68) 베드로는 아직 예수님을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어는 순간 자신도 주님을 떠나버리고 맙니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부딪혔을 때 그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주님과 마주쳤던 시선조차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고 맙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그렇게 허약했다면 우리가 한 번씩 흔들리는 것쯤은
애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생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을 떠나고 그가 다시 주님에게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몸살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주님의 수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활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로 찾아왔을 때도 그는 쉽게 주님 앞에 나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교회들을 보고 오늘의 성도들을 보면 수많은 교회와 성도가 그날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떠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순종하지 못한 말씀들은 우리가 주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실천되지 않은 말씀들은
우리가 떠나버린 주님입니다. 우리는 ‘내가 순종하지 못한 말씀들’ 속에서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애절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빵입니까? 말씀입니까? 기적입니까? 아니면 진리입니까?
  말씀이 나를 이끌고, 진리가 내 안에 언제나 꿈틀거리는 자라야 살아있는 신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인은
늘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살기를 소원하며 삽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겸손히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다스리심으로 채워주기를 바라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따르는 길이
손해 보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갑니다. 이유 없이 오른 뺨을 맞아도 왼 뺨도 내 줍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기꺼이 십리를 가줍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줍니다. 다른 사람 다 주님을 떠나도
묵묵히 끝까지 주님의 곁을 지켜 드립니다. 갑자기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외친 역설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가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나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5~10)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말씀이 나를 이겨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빌러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말씀이 나를 이기는 삶, 말씀에 순명함으로
주님이 나를 이기는 삶, 그래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예수님, 부족하지만 평생 주님을 닮아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빵이 아닌 말씀 때문에, 기적이 아닌 진리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살아가는
행복한 순례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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