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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월 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8.09 13:33 조회 996 추천 0


2015년 8월 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Agu_9)
먼 길 함께 가는 동반자 에베소서2:16~22


<가족이 있기에 내가 있다.>
  사회, 정치,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간 신문을 보거나, 인터넷 정보를 검색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사이클링을 할 때는 ‘신동호의 시선집중’이라는 시사 프로그램을 듣습니다. 그 프로에서 언급한 말인데
매우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그 주간 이슈가 될 만한 화제 거리를 ‘말과 말’이라는 코너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입니다.
 
  “볼썽사나운 롯데가(家)의 돈 전쟁이 찬 물을 끼얹었다.”
  연일 머릿기사를 차지하고 있는 롯데 그룹의 가족 간 분쟁에 대해 여야 정치권이 함께 비난의 목소리를 냈는데요,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온 국민의 노력’을 무색하게 한 사건이라며 한 말입니다.
서 최고위원은 “롯데는 국민 삶에 밀접한 기업으로 국민으로부터 큰 혜택을 본 기업인데 오너 일가의 가풍은
국민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고 비판했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최재천 정책위의장은
“정부가, 재벌이 살아야 경제가 살 것처럼 잘못된 신호를 줬다, 급한 건 ‘노동개혁’보다 ‘재벌개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가족과 브리티시오픈 우승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가족이다.”
  LPGA 브리티시오픈 대회 우승을 차지한 박인비 선수가 한 말입니다. 재벌가의 부자간 형제간 독기 어린 싸움으로
온 세상이 시끄럽지만, 박 선수는 “그 동안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가족을 떠올렸다, 가족이 있기에 내가 있다”라고
우승 소감을 밝혔습니다. 수 년 동안 캐디백을 멘 아버지, 대회마다 식단을 챙겨준 어머니, 샷을 점검하고 지도해주는 남편,
그리고 8년 동안 경기를 함께한 호주 출신 캐디, 이들 4명의 숨은 그림자가 박 선수의 대승을 이끈 보석 같은 가족입니다.


  박인비 선수는 이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함으로써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시즌에 상관없이 4개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주어지는 영예입니다. 세계 7번째이고,
아시아, 한국에서는 첫 번째로 달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 영광을 가족과는 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 적절한 비교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우리는
‘주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내려 오셨고, 극기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벽을 허물고 화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은총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을 덧입은 우리 모두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위 수직적 화해, 수평적 화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외부적으로 이단의 방해가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과 반목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할례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외면적인 차이를
표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노골적인 차별을
드러내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의 죄의 담을 허무셨지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막힌 담도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는 이제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한 식구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
그 보혈의 공로로 죽었던 우리는 살았고,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잘못된 패배의식으로 서로 담을 쌓으며 반목했던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가족은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늘 주변에 머물며 잘하나 못하나 구경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족의 일을 언제나 남의 일처럼 말하는 사람은
한 식구가 아닙니다. 가족의 문제를 지적만 하는 사람 역시 온전한 식구는 아닙니다. 가족은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기쁨도 함께하고, 슬픔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 보다 더 기뻐하고, 더 아파하고 더 안타까워합니다.
부족한 것 어떡하든 감싸주려고 하고, 덮어 주려고 하고, 해결해 주려고 백방의 노력을 합니다.
그게 한 가족, 한 식구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그런 곳입니다.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한 식구라는 말입니다. 그런 한 가족 같은 교회는 따듯하고
포근하고 평안하고, 그래서 성도들이, 이방인들이 머물고 싶고 계속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한서교회는 참 정이 많고 따듯한 교회입니다. 서울에 있지만 시골 교회의 깊은 사랑과 정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지난 주 중고등부 수련회를 잘 마쳤습니다. 그 이전에 유치부, 아동부 성경학교도 잘 마쳤습니다.
강단에서 크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우리 성도님들이 사랑을 모아 주셨습니다.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넉넉히 풍성하게 여름행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몇 주 전에 어느 성도님이 조심스럽게 저를 잠깐 보자며 많이 헤진 봉투 하나를 내미십니다. 사람들이 볼까봐
황급히 ‘카자흐스탄 선교지’를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서십니다. 나중에 보고를 받으니 무려 100만원 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 돈 액수의 가치를 압니다. 일반인 천만 원 같은 백만 원이었습니다.
헌금 봉투는 오랜 동안 땀 같은 액체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해서인지 많이 낡았습니다. 그렇게 한 푼 두 푼을 모으고
또 모은 것입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설교 원고를 쓸 때도 그 때의 감동 때문에 또 눈물이 났습니다. 재산 전부인
두 렙돈을 드렸던 성서의 여인이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따뜻한 정을 담고 있는 교회라는 것을 그 분을 통해 알려 주시는 것 같아서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라고 완벽할 수는 없지요. 가끔은 사도 바울의 목회적 염려를 저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자유롭게 비난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솔직히 우리 같은 예수쟁이들이
더 옹졸할 때가 많다는 비판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집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담과 벽을 허무셨는데, 여전히 반목과 갈등 속에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어른이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단순해서 오해도 많이 하지만
풀기도 잘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쉽지 않은가 봅니다. 가끔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어떻게 보려고 그러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둔 밤 오기 전에 지금 풀고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특별한 대상에 대해서는,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십자가 은총의 대상이 아닙니다.
용서와 용납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회만 있으면, 건수만 생기면 지적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말을 옮깁니다.
  이런 저런 대의명분을 갖고 정당성의 논리로 주장하지만 늘 거기에는 사적인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니 당연히 기쁨이 있을 리 없습니다.
있다면 성경이 거짓말 하는 것이겠지요. 이웃과 화목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를, 자기반성과 회개와 애통이 없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기쁜 척, 은혜 받은 척 하지만 진짜는 아닌 것이죠. 그러니 영혼이 편치 않습니다.
그것을 숨기려고 해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나타납니다. 차갑습니다. 냉정합니다. 때로는 무섭기 까지 합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얼굴은 괜찮은지? 
  그 얼굴 괜찮아지려면 이제 그만 담을, 벽을 허무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제자의 삶, 24시간 주님 바라보기를 통해서 뭐하자는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도 그 길을 가라는 것이지요. 가까운데 있는 가족부터 챙기고 사랑하며 사세요.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의 기본은 나를 다스리고 가정을 잘 돌보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 기도 중에 제가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면
사는 중에, 이 동시대에 70억 명이 넘는 사람 가운데 우리를 한서의 가족으로 묶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섭리 중에 섭리요, 기적 중에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사람하고 가끔 이런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살 줄 어떻게 알았나?’ 생각할수록 신기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식구로 묶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한 가족, 한 식구로 묶어주셨으니
한 가족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각 자의 가족을 돌보는 마음으로 서로 섬기며, 배려하며, 이해하며, 용서하며,
용납하며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감시자로, 재판관으로, 구경꾼으로, 평가단으로 사는 것은
한 가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 가족을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가족입니다. 


<라피끄, Rafik>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퀴즈를 냈습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두둑한 상금 욕심에 많은 사람들이 응모에 나섰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물리학자, 수학자, 설계사, 회사원,
학생들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기발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답안이 이러했습니다. “좋은 친구와 함께 가는 것”
  사람의 인생길은 맨체스터로 가는 길 보다 훨씬 더 멀고 험합니다.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날들이
숱할 것입니다. 그 길을 무사히, 행복하게 가자면 가족, 친구, 동료와 같은 여행의 동반자가 있어야 합니다.
  ‘라피끄(Rafik)’라는 단어는 먼 길을 함께 할 동반자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좋은 동반자의 필수 조건은 공감입니다. 공감은 어두운 터널 안에 있는 사람에게 터널 밖으로 어서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꺼이 터널 안으로 들어가 묵묵히 옆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비를 맞고 있다면 함께 비를 맞아 주는 일입니다.
  악성 베토벤의 성공에는 이런 공감의 동반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천둥이 치는 어느 날,
소년 베토벤이 마당에서 혼자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나뭇잎에 스치는 비와 바람의 교향곡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게 집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아들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비를 맞으며 “그래,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함께 들어보자.”고 했습니다.
아들은 신이 났습니다. 그러고는 흥분하여 말합니다. “엄마, 새소리가 들여요. 저 새는 어떤 새죠? 왜 울고 있어요?”
어머니는 폭우처럼 쏟아내는 아들의 사소한 질문에도 다정하게 대답을 해줍니다.
위대한 교향곡은 아마 이미 그때 밀알처럼 싹이 돋아 이후에 완성했는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동반자를 원합니다. 인생길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비책이 있습니다. 바로 나 스스로 좋은 동반자가 되는 것입니다.
홀로 비를 맞는 상대에게 조용히 다가가 함께 비를 맞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묶어주신 한 가족입니다. 한 식구입니다.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아닙니다.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 서로 채워주고, 잘못한 것은 용납하고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먼 길 함께 갈 동반자입니다.
아니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들입니다. 먼저 터널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비를 맞고 있는 성도에게
먼저 다가가 지긋이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가족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그림입니다.
기억하십이오.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먼 길 함께 갈 동반자입니다.


<기도>
  지금 동시대를 살고 있는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대한민국, 서울 망원동 한서교회에
한 식구로 살게 하신 것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요 인도하심인 줄 믿습니다. 한 식구로 살게 하셨으니
각자의 가족처럼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먼저 다가가 먼 길을
함께 갈 동반자로 되어 서로 행복한 여행, 의미 있는 순례의 여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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