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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월 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기기상의 문제로 음성이 나오지 않게됨을 알려드립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8.02 14:03 조회 995 추천 0


2015년 8월 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Agu_2)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요한복음6:24~35

<목양기도>
  [찬양] 나의 염려를 주님께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4~18)
  한 달을 맡기며 진실하게 간구한 한서의 성도 모두의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한서 성도의 모든 가정 위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무더운 여름을 영육의 강건함으로
잘 이기게 하옵소서.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구하는 가슴으로 드리는
절규와 부르짖음을 외면치 마시고 응답하여 주옵소서. 진실한 참회와 영적 갈망으로 드리는 이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깊은 찬양과 기도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치유와 회복과 사명을 위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다지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기념하여 지켜 행하는 성만찬을 통하여
거룩한 신비를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식사의 의미>
  오늘 우리에게 식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식사’하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십니까?
대개는 맛있는 요리, 분위기 있는 실내장식, 아니면 좋은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등을 떠올리겠지요.
프랑스 사람들은 테이블 위에 장식을 상당히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테이블 위에 장식은
식사라는 ‘의식’의 한 부분이자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사람의 삶의 지평을 떡 이상의 것으로 확장시키셨습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식사는 육신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혼자 먹을 수 있는 것이지도 하지만 사실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 일이기고 한 것입니다.
  영어에서 동료나 동료들과의 교제를 뜻하는 ‘company’ 혹은 ‘companionship’이라는 단어가
‘함께’라는 라틴어 단어 ‘cum’과 ‘빵’을 뜻하는 라틴어 ‘pan’이 합성된 단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company’나  ‘companionship’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누군가와 함께 교제가 있고
나눔이 있는 빵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식사란 그저 ‘배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일 겁니다.
  실제로 로버트 파빙은  『참된 양식』이란 책에서 ‘함께 빵을 나누고, 자신을 공유하는 것’, 이 두 개념이
식사의 참 의미라고 단언합니다. 식사는 생물학적 음식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이고 심리적이고 지적(知的)이고
영적인, 그리고 나아가 사회적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식사는 일종의 ‘작은 휴가’를
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까지 말합니다. 식사는 편안히 쉬는 가운데 우리의 자아를 되찾는 짧은 시간으로
인식되고 이해되고 또 그렇게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병이어의 식사>
  우리는 오병이어로 수만 명이 들판에서 식사를 나눈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 식사는 단지 밥을 먹은 것 그 이상의 사건이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 먹어서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짧은 순간 예수님의 영적 여정에 동행했던 것이고,
예수님의 사회적 사건을 경험한 것이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나라 식탁을 거기서 맛 본 것입니다.
  세계적인 투자자이자 재벌인 워런 버핏이 자기와 식사할 수 있는 기회를 1년에 한 차례씩
경매로 내놓는 것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 경매의 낙찰가가 2011년에는 262만 6,411달러였고,
2012년에는 346만 달러로 우리나라 돈으로 약 40억 6천만 원이었다고 합니다.
전 워런 버핏 보다 더 궁금한 사람이 그와의 식사를 경매로 산 사람입니다. 단지 사회적인 명망가와
한 끼 식사를 나누기 위해 거액을 투자한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합니다.
아마도 워런 버핏을 만나 식사하는 것이 그 액수를 투자할만한 이익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 이상 워런 버핏에게 배울 것, 얻을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겠지요.


<밥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단돈 1원도 내지 않고 식사를 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단돈 1원을 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저 한 끼를 때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4절에서 26절까지 말씀을 저와 교독하겠습니다.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에 실재하는 거의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몰이해’를 접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군중들 사이에 계속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한데 이상하리만큼 메워지지 않는 어떤 간격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베푸신 오병이어 기적은 단지 배고픈 그들을 먹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다 내면적인 진리로 이끌기 위한 표적, 즉 사인(sign)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징을 통해 그들이 진실하게 찾기를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이상(理想)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들의 의미를 단지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알아들으려고 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을 배부르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군중들의 반응에 속이 상하였는지
홀로 산으로 가셨다가 물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제자들을 만나시고 가버나움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제자들만 가버나움에 온 줄을 알았는데 예수님도 같이 계시는 것을 보며 군중들은 놀랍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속내를 표현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이유는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실망감이 묻어 있는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표적에 담긴 영적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배부름의 느낌만 가지고 좋아할 수 있는냐? 어떻게 나와 나눈 식사에서
떡만 기억에 남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에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다분히 이런 동물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겉포장은 상당이 영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굉장히 동물적이고 육적이고 물질적입니다.
다같이 2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양식이 있습니다. 썩을 양식과 썩지 않는 양식입니다.
썩을 양식이란 뭐겠습니까? 인간의 배만 채우는 양식이지요. 이 양식은 먹을수록 배가 고픕니다.
그래서 이 양식은 계속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의 평생을 바쳐 이 썩을 양식을 위해 생존 경쟁을 치릅니다.
다큐로 다루는 동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면 동물들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면 그들의 초점은 단지 하나입니다.
무섭도록 집요하게 먹을 것을 찾습니다. 사자나 표범들이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이유는 오로지
먹을 것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오로지 먹을 것과 종족 번식 두 가지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도 사실은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썩을 양식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도록 하라.’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은 썩을 양식이 필요하지만 우리 영혼은 영원한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육신을 위한
양식을 준비하는 데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대할 때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하나 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반사적으로 그렇게 여겼을 겁니다. 더구나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이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그러면 율법 외에 또 다른 어떤 것을 행해야 하는가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어떻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 차이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요한복음 6장의 나머지 맥락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가 되었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군중들은 지금까지 그들이 행해왔던 신앙의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행해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먼저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가장 큰 일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만나 또 다른 만나>
  사람들은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먹고 배불렀던 경험으로만 기억했습니다. 그 만나의 한계를 우리는 봅니다. 먹고 돌아서면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자 그들은 하나님보다 만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만나에 집착된 그들의 내면은 끊임없는 원망과 탐심을 낳았습니다. 만나에 집착하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만나의 기적을 이룬 장본인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나는 참된 떡이 아니고 생명을 주는 떡이 참된 떡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그 참된 떡,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나에서, 오병이어의 식사에서
육신을 배불리는 양식을 넘어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 일을 믿는 것이 썩지 않는 양식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 하늘에서 내려 주신 만나를 먹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만나, 또 다른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바라는 썩을 양식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그 만나를 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진정한 축복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초청하신 거룩한 식탁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 이 식탁은 영혼을 위한 식탁이고,
사회적 의미를 갖는 식탁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감사하며 썩을 양식을 위하야 살지 말고 영혼을 건강하게 살찌우는 생명의 양식을 얻는데
이제 남은 생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을
믿음으로 감사히 받고, 썩을 양식에 집착된 삶을 벗어나 생명의 양식을 받는 자로 이제 남은 우리의 생을
예수님처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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