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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7월 1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7.19 13:43 조회 1,126 추천 0


2015년 7월 1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July_19)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삼하11:1~15

<차도 잠깐 멈춰야>
  책에서 배운 것 보다 여행에서 배운 것은 더 깊이 남는 것 같습니다. 여행에서 경험한 아주 작은 일도
설혹 잊어버렸어도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그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저장창고 같습니다.
유럽여행을 독일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에 선봉에 섰던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갔기에 당연한
수순이었을 겁니다. 대형버스로 이동했습니다. 버스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보너스로 주는 여행의 묘미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여행할 때 보다 자주 휴게소에 들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정기적으로
운행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사람도, 차도 쉬어야 안전운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겠지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요함은 멈춤에서 온다>
  "밖을 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보는 자는 깨어 있다." 스위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엡5:14)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잠에서 깨어나
구원을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융에 의하면 그 '깨어 있음'이란 내면, 즉 영혼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용기 있게 대면하는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마음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자'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상에 사로잡혀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융이 말하는 '내면을 보는 자'란 마치 자폐증을 앓듯 자신의 내면에만 침잠해 있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세계를 치열하게 살고 있으면서 자기 내면을 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자기 내면을 보는 노력을 '멈춤'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의 고요함과 마음의 평정은
'멈춤'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게서 환희 빛나기를 원한다면
혼잡한 마음을 만들지 마라. 네 안에서 조용히 있으라. '이해한다(understand)'는 '서 있다(stand)'와 관련이 있다.
서둘러 가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거침없는 다윗의 질주>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짓는다는 신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윗은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그 성전에 법궤를 모셔 들임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꾀하려는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때를 성경은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삼상7: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평안함의 순간을 '멈춤과 깨어남'의 시간으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권좌를 더 견고히 하려는 또 다른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짓고 싶어 서두르는
다윗을 눌러 앉히셨던 것입니다. 그 보다도 잠깐 멈춰서 내면을 차분히 점검하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환희
빛나시도록 해야 하는데, 서둘러 또 다른 정치적인 계획만을 꾀하였다는 것입니다.
내면이 깨어있지 못한 평안함, 그것은 오히려 자기 내면을 병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멈추지 않는 질주는, 자신의 내면을 돌보지 않는 결과로 결국 일을 만들게 됩니다.
요압장군과 병사들은 암몬 족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는 긴박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답지 모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전선에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지금 온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 성을 에워싸고 있는 전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예루살렘 왕궁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태평하게 낮잠을 잡니다.
‘잠을 잔다’라는 것 영적인 긴장이 풀려 있다는 사인입니다.
  저녁 무렵 침대에서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옥상 위를 거닐기 시작합니다. 당시 다윗 궁은 높은 시온 산에
있었기 때문에 인근 주민의 집 안마당을 훤히 볼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지붕 위를 한가로이 거닐 때
목욕하는 한 여인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안 마당에서 목욕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럴 경우
이웃집을 내려다보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목욕하는 한 여인에게 그만
시선이 멈춰 버리고 맙니다. 성서는 그때 다윗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지라."(삼하11:2) 밧세바가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슷한 표현을 창세기3장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한 나무인지라."
  지금까지 아무 느낌 없이 지나치던 나무가 왜 그날따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심지어 탐스럽기까지 했을까요?
그날따라 탐심을 품고 나무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한껏 풀어져 있던 마음이
그만 목욕을 하는 한 여인을 보고 만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도 않는다." 다윗은 저항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한껏 태만하고, 나 없이도 전쟁에서 이긴다는 자만이 정신적 영적 긴장을 느슨하게 했습니다.
  다윗의 정치적인 욕망을 향한 질주는 또 다른 양태의 욕망으로 표출됩니다. 밧세바를 취한 다윗은
치졸한 방법으로 충직한 장수인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맙니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입니다.
다윗의 많지 않는 오점 중에 하나이지요.

  다윗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멈추지 않아서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그때, 멈춤의 지혜를 알아야 했습니다. 내면, 속사람을 깨우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빛나시도록 겸손히 하늘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의 시간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내 심령 안에, 내 삶 가운데 모실 수 있는 지성소를 비워 두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의 주인이 되시도록 지금까지 나를 움직인 다른 주인들을 손님의 자리로 다시 돌려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간통뿐만 아니라 그가 간통한 여인의 남편을 청부 살해하는 장면까지 전혀 감추거나 두둔해주지 않고
적나라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후로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파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은 늦었지만 오히려 그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통절하게 회개하게 됩니다.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겠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나의 그늘을 용기 있게 대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다윗의 나약함에서 나의 나약함을 공감하고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통절한 회개로 변화되듯 우리 역시 회개와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다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다시 내 안에 하나님이 주인 되시도록,
그래서 내 안에서 하나님이 빛이 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전한 평안,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겼을 때의 그 느낌처럼 말입니다. 너무도 바쁘게 정신없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게
남들이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하나님 없이 나만 혼자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공허합니다. 불안합니다. 허전합니다. 우리는 이제 멈춰야 합니다.

<멈춰야 보이는 소중한 것들>
  '정리 컨설턴트'라는 새로운 직업에 대해서 들어 보셨나요?
옷부터 주방 살림살이 등을 대신 깔끔하고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사무실 정리도 해 주는 업체가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직업이 새로 생겼을까요?
내가 내 주변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것이겠죠.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라는 책을 쓴 일본 여 작가 곤도 마리에는 "현대인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것들에
둘러싸여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고 자신을 두근거리게 하는 물건만 골라 남김으로써,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 그 말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완벽함이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필요한 것을 모조리 제거하고 오직 핵심만 남겨놓은 상태,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궁극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완벽함이란 더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쌓여있는 헛된 욕망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이겠죠.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더 많이 채우고 쌓아야 완벽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노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지만,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다."

<고도원의 ‘잠깐 멈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만큼 독서량도 많지 않구요.
그런데 목사이다 보니 늘 설교에 대한 거룩한 부담 때문에 어딜 가든지 책이 늘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지방 심방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중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습관처럼 책에 눈이 갔습니다. 그중에 한권을 구입했습니다.
주일이 지나 며칠 후 책을 뒤적이는데 정말 소름이 끼칠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고도원 님이 쓴 [혼이 담긴 시선으로]라는 책에 ‘잠깐 멈춤’이라는 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보태서 과한 해석을 한다면 ‘설교 준비를 위해 책을 구입하게 하셨나?’하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그러고는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오늘 저는 그 책에 있는 내용을 빌어 말씀의 매듭을 지으려 합니다.
고도원 씨는 젊은 시절 신문기자로 일했습니다. 기자에겐 특종이 생명이라고 합니다.
‘특종’의 반대 ‘낙종’인데 낙종이라도 하는 날이면 거의 죽음 목숨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모든 에너지는 다 사라지고
한순간에 땅으로 꺼지는 듯한 자괴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을 만큼 스트레스가
매우 컸다고 합니다. 그렇게 긴장과 스트레스로 바쁘게 살아오다가 40세가 넘어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질문과 함께 잠깐 멈춤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 멈춤을 통하여 쉼과 회복과 치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렇게 잠깐 멈춤을 통하여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어떤 일에도 쉽게 동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동안 들리지 않았던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어둠이 밝음으로, 불만을 자족으로,
원망은 감사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잠깐 멈춤’은 꼭 휴가를 떠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씻는 시간에도, 차를 마시는 순간에도
잠깐 멈추면 지나쳤던 향도, 맛도, 음식을 만든 이의 마음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숨을 배로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 쉬는 호흡법 하나만으로도 멈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깊은 호흡은 분노, 화, 긴급한 상황, 돌발적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할 것입니다. 고도원 씨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독자에게 마치 이 시대의 예언자처럼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쁠수록 한 호흡 멈추어보라. 지금 서 있는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에서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
잠깐 멈추고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다. 내 영혼이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서는 인디언처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 마음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자' 그리스도인이란 그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자기 내면을 보는 노력을 '멈춤'이라는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의 고요함과 마음의 평정은
'멈춤'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환희 빛나기를 원한다면 혼잡한 마음을 정리해야 합니다.
용기 있게 자기 대면을 해서 버릴 것 아깝지만, 아쉽지만 하나 둘씩 없애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위대한 사람 다윗의 뼈아픈 실패를 보았습니다. 그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가 되지 않기 위해,
내 욕망에 겨워 뛰어가던 발길을 멈추고,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 대면의 시간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힘들지만 자신의 그늘을 인정하고 직시하고 신앙의 성찰을 통해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바쁘게 가던 길 잠깐 멈춰서 돌아보고, 바라기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주님과 함께 걷는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더렵혀진 우리의 삶과 영혼의 지성소를 깨끗하게 비우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서 빛이 나시도록 하게 하여 주옵소서.
멈춤을 통하여 주시는 고요와 평정이 우리의 내면에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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