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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5월 24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5.24 13:15 조회 1,091 추천 0

2015년 5월 24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May_24)
성령강림, 말이 通하게 하다 사도행전2:1~13
<사이프러스 나무에서 성령을 보다>
  예술가는 남들 보다 특별한 감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에 
꽂혔습니다. 처음 그 나무를 본 순간 영감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사이프러스(Cypress) 나무는 프랑스 
남부에서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터키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에 자라는 상록수입니다. 1889년 고흐가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고 느낀 특별한 마음을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씁니다. “나는 사이프러스 매력이 푹 빠졌다. 나의 
해바라기 그림처럼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창조해낼 것 같기도 하구나. 
사이프러스는 마치 이집트 뾰족탑처럼 균형잡힌 아름다운 나무다.” 이후에 빈센트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두 여인,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별이 빛나는 밤 등 사이프러스는 소재로 하여 여러 그림을 
그립니다. 그중에서도 [밀밭의 사이프러스] 그림은 고후가 가장 많이 재현한 그림에 속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림의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그림을 본 어떤 이의 감상평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밀밭, 불꽃 모양을 하고 하늘로 치솟는 사이프러스,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화사하게 서로 
어우러지는 색조에서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감에 의해 빚어진 작품은 또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 고흐의 그림을 보며
 감동을 받은 어떤 성서주석가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그림에서 ‘녹색 빛깔로 타오르는 혀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사이프러스에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성령의 불꽃을 연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흐의 
그림들 속에서 감히 사람이 막을 수 없는 성장을 보았고, 억제할 수 없는 초월적 에너지가 우주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성령강림, 소통의 시작>
  오늘은 성령감림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기념하는 이 절기는
 고흐에게 사이프러스 나무 그 이상으로 영적 에너지와 삶의 역동성이 주어지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룩한 불꽃으로 타오를 때, 교회는 그 생명력을 통해 새로이 탄생했고, 그 생명력은 온 우주를 충만하게 
채우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절망과 두려움으로 움츠려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적인
 에너지와 삶의 역동성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절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강림의 사건 통하여 이루어진 변화의 증거는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일,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했습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영적이 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공회에서 공회원들 앞에서 복음을 변호합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더해집니다. 폭풍성장을 이룹니다.  
  이 모든 역동적인 변화의 증거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소통의 회복’을 들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새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하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망각하고 스스로
 개발한 새로운 능력들로 인해 다시 교만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따라
 의와 사랑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존재 의미를 망각하고, 통일된 언어 체계를
 바탕으로 인간이 고안하고 인간의 능력으로 창출해낸 그리고 인간의 힘에 의해 통치되는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힘을 모았습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이것이 하나의 의사 전달체계를 소유하고 있던 홍수 이후의 새 
인류가 세운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그들이 건설하려는 성읍과 탑을 흩으시고 맙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이 통하지 않던 사람들이 서로 말이 통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가에 의하면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하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언어란 ‘외국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껏 그들이 배우지 않은 말을 하게 함으로써 마가 다락방에 있었던 모든 외국인들이 
알아듣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감림을 통해 일어난 현상 가운데 첫 번째 일어난 현상은 바벨탑 사건으로 생겼던 언어적 장벽이
 비로소 극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의 대개가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당한 후에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맞이해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번번이 허탈감만 가슴 한 켠 안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내 조국이라고 가슴 
부풀어 찾아왔지만 돌아가는 가슴은 냉가슴이었습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조국이 얼마나 섭섭하고 
낯설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메소보다미아 사람은 메소보다미아 언어로,
 갑바도기아 사람은 갑바도기아 언어로,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언어로 들려옵니다. 그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고 기쁘고 고마웠겠습니까?    
  그런데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비단 외국인뿐만 아니라 바벨탑 사건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는 것은 서로의 말이 가슴에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그 답답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모를 것입니다. 말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말을 했는데도 소통이 안 되는 그 안타까움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통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경험에 비추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같은
 말을 쓰지만 속으로는 각각 서로 다른 계산들을 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문서답을 합니다.
둘째, 한 쪽이 진실하지 않거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나는 출마 안 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에는 절대 출마하지 않겠다고
 대국민선언을 밥 먹듯이 하고서 대통령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들이 그러니 범인들 
세계에서야 더 말할 것 없지 않겠습니까? 속에 있는 생각과 반대되는 말을 해야 손해 보지 않는다는 법칙을 
몰랐다가 뒷 통수 맞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세상이 왜 그렇게 꼬였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안 가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주질 않습니다. 오히려 "저거 틀림없이 갈거다. 가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 받겠다" 했으면 안 받겠다는 말로 들어야지 왜 "달라"는 말로 해석합니까? 바둑
 두듯이 이 말 하기 위해서 포석을 몇 차례 깔고 맘에도 없는 저 말을 해야 하며, 자기가 그러니 남의 말도 
그대로 안 믿고 몇 수를 뒤집어서 속생각을 읽으려고 머리들 짜며 삽니다. 그러니 온갖 억측과 엉뚱한 오해와
 근거 없는 소문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가 참 조심스럽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질병이 있다면 소통의 부재일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간에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와 형제간에, 이웃과 이웃 간에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들어줄 가슴이 없습니다. ‘나는 슬퍼요’하고 울어도 그 슬픔을 
공감해줄 가슴이 없습니다. ‘나는 외롭다’며 쓸쓸해 하는데 친구가 되어줄 가슴이 없습니다. ‘나는 기쁘다’
며 행복해하는데 함께 춤을 추어줄 가슴이 없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윤복희 씨가 불렀고, 지금은 임재범 씨가 리메이크해서 불러서 더 많이 알려진 ‘여러분’
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우리는 모두 마음과 마음, 가슴과 가슴을 열고 서로 소통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는 가슴의 언어를 회복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로소 소통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의 소통이 회복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만약 사람들이 영적 삶을 회복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적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적인 성장을 넘어 대인관계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저변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편협한 것이죠. 오히려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사회적 삶에서 훨씬 포용적(소통적)이어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 세상과 소통하다>
  다음에 함께 읽을 말씀은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는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답답한 심경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도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16:5~6)
  예수님은 이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떠나야 한다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중에 그 말을 알아듣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에 이어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진리의 영이신 성령
 강림을 경험하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과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실재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만났습니다. 그들 안에 모신 진리, 예수 그리스도, 내게 있는 것의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진리를 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주님과 소통을 이루었고, 세상과 이웃과 소통을 이룬 것입니다.   
  성령은 소통의 영입니다. 말이 통하게 하고, 마음이 통하게 하고, 가슴이 통하게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마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언어가 하나 되게 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게 합니다. 뜻이 하나 되게 
합니다. 생각이 하나 되게 합니다. 꿈이 하나 되게 합니다. 행동이 하나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서신서에서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늘 반복하여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4:1~4)
  선교부 총무로서 지방의 일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일이 좀처럼 어렵다는 
것입니다. 체육대회 단체 유니폼의 색깔을 정하는 일도 다 각기 다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사람의 힘과 
의지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말이 통하는 것, 마음이 통하는 것 성령의 역사만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섬기는 구성원으로서 정말 힘써 구할 것은 바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하심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성령강림주일을 의미 있고, 비중 있게 강조하며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이 통하게 하고,
 소통하게 하시는 성령강림의 사건이 없었다면 교회는 탄생되지 않았고, 교회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통의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우리 한서교회 안에 말이 통하게 하시는 성령 임하심이 샘물 같은
 역사를 넘어 강물같이 충만하게 넘쳐서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고 사람과 대화가 통하는 소통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 아버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 
안에서 사람과 소통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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