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3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3.15 11:10 조회 1,260 추천 0
2015년 3월 1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Mar_15)
제목: 네가 개척하라  본문: 여호수아17:14~18
 2008년 베이징올림픽 12위, 200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개인종합 3위... 일반 대중에게 기억될 만큼 화려한 
기록들은 아닙니다. 이 기록은 리듬체조 전 국가대표선수였던 ‘신수지’양의 현역시절의 기록입니다. 
그녀는 선수시절을 회고하면서 ‘주목받지 못한 것이 가장 서러웠다’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이져대회에서 금메달이나 따야 기억해주는 이 사회에서,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비인기종목 선수의 설음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은퇴 후 그런 마음은 더 심해져서 조울증세까지 찾아왔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방송을 통해 스포츠댄스를 접한 그녀는 부단한 노력과 연습으로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에는 프로볼링선수 테스트에 무난히 통과해서 프로볼러가 되었습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은 프로골퍼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루에 9시간씩 열심히 골프연습에 
전념한다고 합니다. 
 그녀가 체조선수로 이루지 못한 꿈을 다른 운동에서 이루겠다는 욕심에서 그런 도전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울증에 시달리던 자신의 현실을 새로운 도전으로 극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아름다운 삶의 방법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녀가 체조선수였던 그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합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시대’와 ‘광야의 방랑시대’를 마무리하고, 가나안
 땅을 새롭게 개척하여 분배받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그 이름대로 지파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중 요셉지파는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었기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름을 딴 두 지파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지파,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각각 제비뽑기를 통해 한 분깃의 땅을 분할 받지만, 그 경계가 서로 중첩되고 애매한 것이 있어서, 
두 지파는 하나의 분깃만을 받았노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들처럼 큰 민족이 정착하기에는 좁으니,
 땅을 더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요셉의 두 아들 지파가, 큰 민족을 이룬 것과 땅이 넉넉지 못하다는 그들의 상황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하나의 제비, 즉 분깃을 따로 떼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한 지파당 한 분깃이라는 
형평성이 깨어지면, 전체와의 약속이 깨어지고, 다른 지파들 안에서도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또 다른 분깃을 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각자가 뽑은 제비는, 그 뽑은 분깃이 크던 
작던, 각 지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주신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것을 인간적인 판단으로 재조정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당연히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수아는 주변에 있는 이방족속들의 산지들을 ‘너 스스로 개척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들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두 아들지파, 므낫세지파와 에브라임지파와 여호수아의 대화를 통해, 각 지파별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하는 것, 그 이상의 또 다른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는 다른 분깃을 더 요구한 요셉지파,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지파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 즉 문제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에게는 ‘게으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앞에 있는 12절과 1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수17:12~13)
 가나안 땅에 입성한 이스라엘에게는 그 땅의 정복자가 되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고,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 살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이방족속들을 멀리 쫒아버리고, 그 땅의 우상들은 모두 다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므낫세지파는 방금 읽은 말씀처럼 이방인들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이방족속들이 아예 결심을 하고 눌러 앉아, 이스라엘 백성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하고 먹고 살만해지니까, 이방인들을 종으로 삼아 자신들의 
편안함의 도구로 이용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므낫세지파가 이방인들을 쫒아내지 못한 이유는, ‘하기 싫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목숨걸고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만한 다른 곳을 분할 받으면 되지’
하는 안일한 마음과 ‘게으름’ 때문에, 의무와 역할은 생각지 아니하고 투정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5절과 18절에서 여호수아가 말하는 ‘개척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무를 베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친 삼림을 기름진 땅으로 개간하여 경작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그들은 귀찮았던 것입니다. 남이 가진 기름지고 좋은 평야를 받으면 됐지, 굳이 힘들게 산지를 받아서
 나무를 베고 땅을 개간하는 힘든 노역을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이런 나태하고 게으른 생각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앞에 주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둘째로는 ‘부정적인 시각’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너희가 땅이 부족하다 싶으면, 주변 이방족속들의 산지를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하자, 16절에서 
이런 핑계를 댑니다.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한마디로 ‘지금 개척하라는 땅도 넉넉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이미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의 무기 수준은 
우리 보다 훨씬 앞서는 무서운 족속인데, 우리가 어떻게 거기를 정복하고 개척하라는 것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꾼 열둘을 
보냈을 때, 돌아와서 보고한 열명의 부정적인 보고자들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부정적인 보고자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자아상이 아직까지 이 요셉지파 가운데 남아서 땅이 좁네, 그들의 무기가 우리보다 훨씬
 좋은네... 이런 핑계만 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싸우실 때 철병거가지고 싸우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길 때, 첨단 무리를 개발하고
 군대를 훈련시켜서 이겼나요? 여리고성을 함락할 때 필요했던 것은, 양각나팔 하나와 함성을 지를 목소리만
 있으면 가능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지파는 눈 앞에 있는 철병거와 좁은 땅덩어리만 보고, 부정적인 투정만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요셉지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받은 축복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지파는 스스로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다’ 
 실제로 요셉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이라는 큰 두 지파로 성장하여, 삼촌들의 이름으로 된 다른 지파들과 
어깨를 견줄 뿐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큰 지파를 이루는 복을 받았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도 그 두지파를 향해 17절에서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분명 요셉의 두
 아들 지파인 므낫세과 에브라임지파는 다른 지파들보다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큰 민족이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복을 인정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을 이유로 부정적인 투정을 삼을 것이 아니라, 그 주신 복을
 기반으로 땅을 개척하고 정복하는 일을 위해 활용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큰 민족이니 더 많은 땅을 주십시오.’라는 이들의 항변은 어찌보면 일이있는 투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항변이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는 주신 복을 활용해서, 하나님의 뜻인 개척과 
정복을, 순종함으로 감당한 후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주신 축복을 
활용하지 않고, 무조건 달라고만 하는 것은, 스스로가 받을 자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게으르고, 부정적이며, 이기적인 요셉지파의 말에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열 두 정탐꾼 중 갈렙과 함께
믿음의 고백을 보고했던 사람처럼, 일관된 믿음의 선포를 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라라 하였더라’
 
 ‘너는 하나님의 크신 복으로 큰 민족을 이뤘으니 그만한 권능, 즉 능력이 있다. 너의 잠재력을 활용해라.
 그래서 이방의 산지들도 네가 개척하기만 하면, 네가 하는 것만큼 얼마든지, 그 끝까지라도 네 것이 될 것이다.
 철병거? 그까짓 것도 네 능력으로 얼마든지 쫓아낼 능력이 너에게 있다. 그러니 걱정말고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 여호수아의 말이 이 시대, 이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습니다. 무엇인가 잘 안 풀리고, 돌파구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래서 변화가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그럴 때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요셉지파처럼 게을러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받은 축복을 부정한채 투정만 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은 왜 잘 보이지 않는가? 교회학교 학생들의 숫자는 왜 적은가? 중고등부, 젊은이 예배는 왜
 활력이 없는가? 우리 교회에 눈에 띄는 부흥은 언제쯤 있을 것인가? 크고 은밀한 일들은 언제쯤 성취될까?
 이런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평가는 누구라도 할 수 있고, 이미 예전부터 해왔던 
고민들입니다. 또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이 시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요셉지파의 눈이 아닌, 여호수아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주된 관심은, 그 방점을 젊은이와 교회학교에 찍고 ‘미래세대 부흥 이노베이션’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삼개월째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혹시 벌써 잊진 않으셨겠지요?
 이노베이션은 ‘혁신’이라는 말입니다. 혁신이란 ‘이제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서 관습,
 조직, 방법 등을 완전히 바꿔 새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처럼 우리 교회는 올해를, 
미래세대의 부흥을 위한 혁신적인 변화와 도전의 해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의 큰 결단으로 주일예배가 1,2,3부로 하나의 예배가 더 신설되었습니다. 새롭게 신설된 3부 
예배는 ‘젊은이예배’라는 이름으로 12시30분부터 약 한시간 동안 청년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그리고 일부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찬양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1?2부 예배처럼 많은 성도님들이
 예배에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약 40여명 정도의 청년들과 교사, 성도님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 예배로 자리가 잡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1부 예배는 물론이고, 오전10시40분부터 시작해서 12시쯤 끝나는 2부 예배와 12시30분부터 시작하는 3부
 예배, 그리고 2시에 시작하는 오후예배에 이르기까지, 짧은 간격으로 예배가 계속 이어지다보니, 예배마다 
설교하시는 담임목사님과 사회와 예배준비로 분주한 저희 교역자들은 주일 점심을 해결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실 담임목사님 경우는 1,2,3부 설교에 오후예배 설교까지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점심은 고사하고, 
잠시 쉴 시간조차도 빠듯한 지경입니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시는 많은 성도님들의 염려섞인 말씀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교역자님들이 힘드시겠다고, 
식사도 못하셔서 얼마나 힘드시겠냐고...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여선교회에서 사무실로 식사를 배달보내 주셔서 
예배 사이 한 2분만에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미안하기도 하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저희의 수고를
 알아주시는 것도 감사하고,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요. 지금의 이런 상황들을 공치사하려고 말씀드리는 것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식사할 겨를도 없이 예배를 새롭게 하고, 찬양팀을 구성해서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하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젊은이들과 교사들을 예배의 자리로 나오게 하기 위해, 청년부 예배를 대예배로 본당에서 함께 드리는 
것,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미래세대의 부흥을 위한 혁신과 변화는 말로만으론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한서교회의 미래와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향한 꿈을, 단순히 꿈만 꾸지 않고, 주저앉아 기다리지만 않고, 
구체적 현실로 만들어 보려는 도전과 희생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를 염려해주시는 말을 듣고, ‘그럼 누가 그렇게 많은 일을 맡으래?’라고 말했다 합니다. 누가 
많은 일을 하고 싶어서 하겠습니까? 우리의 수고와 땀흘림, 지금의 헌신과 희생만큼, 우리의 미래세대가 좀 더 
부흥하고 변화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전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 미래세대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그들의 부흥을 위해 개척자의 마음으로 혁신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즈음에 여러분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의 자녀들, ‘미래세대의 부흥 혁신’을 위해 우리 성도님들은 얼마나 도전하고 희생하고 
있으십니까?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나요? 교회의 부흥을 위해 앞장선 담임목사님과 교역자들, 그리고 
몇몇 지도자들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의례것 매년 목회비전과 방향성이 정해지면, 나와는 크게 관계없는 누군가의 몫으로만 생각하고, 관망만하는 
태도로는 절대 우리의 미래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파랑새가 병들어 가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병든 희망이 보이거든 기존의 모든 것들(전통, 관습, 고정관념)을 다 내려놓고, 인공호흡을 하든 
부르짖어 기도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꺼져가는 희망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온 수치들과 통계만으로도, 우리는 위기를 느낄 만큼 느끼고 있고, 이미 약해진 우리 젊은세대와 
교회학교를 통해 여실히 절감하고 있습니다. 느낀다면 깨닫고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내 몫의 땅을 개척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요셉지파처럼 공짜로 부흥을 달라고만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저절로 되기만을 기대하고,
 나 말고 누군가 하기만을 관람하는 자세로 있겠습니까?
 자동차에는 엔진의 힘을 네 바퀴로 받는냐 두 바퀴로 받느냐에 따라, 사륜구동차와 이륜구동차로 나뉩니다. 
보통은 에너지 소모 때문에 일반 시내 주행을 주로하는 차량들은 이륜구동차량을 사용합니다. 대부분의 차량들이
 이 이륜구동차량입니다.
 그런데 네 바퀴 모두 힘을 받아 더 힘있게 달려야만 하는 사륜구동차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산악이나 거친
 비포장도로 같은 길이나 웅덩이 같은 곳에 차가 빠졌을 때는, 이륜구동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덕길이나 비포장도로도 네바퀴가 함께 움직이는 사륜구동차량으로는 쉽게 넘어가고, 문제없이 달리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전략도 이륜구동으로만은 어렵습니다. 네 개의 바퀴중 두 개만 힘을 받아 달리고, 나머지는
 그냥 앞에 두 바퀴가 굴러가는데로 따라만 가준다면,  힘든 길을 만날 때 힘에 부쳐 주저앉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바퀴들이 각자의 힘으로 같이 움직이면, 어떤 거친 길도 쉽게 헤쳐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함께 혁신합시다. 여러분들의 몫의 혁신에 도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시간을 더 
드리라고 하시면, 그 시간의 영역을 여러분 스스로 개척하십시오. 예배에 도전하라 하시면 그 부분도 개척해 
보십시오. 헌신과 봉사의 영역에 그동안 힘을 쓰고 있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 영역을 위해 여러분들이 스스로 
개척하셔서 도전해 보자는 것입니다.
 재정, 물질도 무슨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생각하지 맙시다. ‘나는 하나님께 이만큼만 드리면 돼.’라고 
스스로 정해 놓은 그 한계를 스스로 개척해 보십시오. 
 ‘앙리 사리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빠삐용’(1973년 개봉)이라는 영화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주인공 빠삐용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첫 번째 탈출에서 실패하여 2년 동안 독방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탈출에도 역시 
실패해서 독방에서 5년 동안 감금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 탈출을 시도하다가 또 붙잡히게
 됩니다. 이번에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져서 종신형의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그곳에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백발노인이 되었을 때, 마침내 그는 그 악마의 성을 탈출하고야 맙니다. 
높은 절벽위에서 빠삐용은 담대하게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탈출하기 전에 먼저 코코넛 열매들을 채워 물에 뜨는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악마의 성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부대를 절벽 아래 바다로 던졌습니다. 바다에는 식인 상어가 살고 있었고 파도가 심했지만, 이미 
그는 밀물과 썰물의 시간대를 연구해서 나름대로 기가 막힌 탈출방법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그렇게 빠삐용은 
바다위에 던져진 그 부대를 타고 유유히 그 악마의 섬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 광경을 높은 절벽위에서 홀로
 지켜보는 그의 친구가 있었는데, 화폐위조범 ‘드가’라는 인물입니다. 그 영화는 드가의 모습을 비추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빠삐용은 자유를 찾아 생명을 걸고 도전해서 그 악마의 섬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드가는 두려운 마음에 자유를
 포기하고 미래가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 안주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변화와 부흥은 행운처럼 나에게 불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심히 기도하고 땀 흘리며 도전하는 자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들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영역 뿐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요셉지파와 같은 신앙의 
자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맡겼으니 내 할 도리는 다했어’라는 식의 ‘방임의 자세’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주체가 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소한의 
우리 역할, 즉 개척해야 할 산지들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산지들을 개척하는 과정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과 축복을 이미 복으로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그 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땀흘려 개척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팔짱끼고 구경만 하지 않으시고,
 필요한 힘과 지혜를 공급하시며 응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저 성실과 긍정의 마음으로 주신 것을 활용하여
 도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비록 더디되는 것 같아도, 힘들 것 같아도 결국에는 해내게 하십니다. 
 오늘이란 삶은 어제까지의 삶에 대한 결과입니다. 내일의 삶이 오늘보다 행복하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한다면,
 오늘을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해야 할 산지, 그 과제를 거져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또 앞장선 몇몇 사람의 일로만 여기지 말고, 
‘네 몫의 태인 산지를 네가 개척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실행하기만 하면, 그 후부터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몫의 불모지를 여러분 스스로 개척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오늘, 바로 도전하십시오. 빠삐용처럼 뛰어내리십시오. 그러면 미래는 오늘보다 행복할 것입니다.

* 기도 
 우리를 이 시대의 개척자로 부르신 하나님, 지금까지 주신 복들에 안주하지 않기 원합니다. 내 몫에 허락된 
개척지를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 원하시는 뜻과 변화된 미래를 위해 오늘을 도전의 날로 삼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주를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미래세대를 
위해 오늘 당장, 지금, 결단하고 도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힘과 담대함을 주시옵소서. ‘네가 개척하라’
라고 명령하시고 또 용기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 이전글 : 3월 2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3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3월 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윤은숙 2015.03.16 13:40:53
나이는 많지만 나도
꿈을 가지고 살며 지혜롭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아멘
고찬일 2015.03.20 14:09:07
좋은 것으로 네 소원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시편103:5)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항상 우리앞에 있사오니
우리가 날마다 문설주에 기대어 말씀을 들으며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존귀하신 주남께 경배하며 찬양과 기쁨으로 감사드림으로
주님께 온전히 영광만을 돌려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말씀의 언약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주님를 신뢰함과 의지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절대믿음으로 인내하케하사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
절대긍정적인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드려지는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안고 꿈을 향한 나아갈 길에
혁신적인 도전을 주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한서교회위에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으로 붙드사
부름받아 영적지도자로 세워주신 담임목사님과 지도자님
영육간에 강권함으로 세워주시고
말씀의 권능에 권능으로 역사하여 주소서
믿음안에 하나된 우리 모두를 보호하시고 도와주소서
영적성숙을 통하여 충만한 은혜와 은총을 내리어 주소서
진정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이루어진 공동체위에
우리의 꿈과 소망인 미래세대를 축복하여 이끌어 주소서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아가게 하소서
구원의 주님
구속의 주님
참복음를 통하여 변화되어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시어
사랑의 물결이 흘러가게 하소서
진리의 빛되신 거룩하신 예수님
우리의 모든것이 되시어 인도하시며
아름다운 동행을 이루시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