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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2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2.15 14:52 조회 1,348 추천 0
2015년 2월 1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Feb_15)
탕자의 귀향 누가복음15:11~24

<축복>
  명절이 있는 주간입니다. 오가는 길 안전하게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보고 싶었던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족을 섬기며, 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주변을 살펴서 고향을 
찾지 못하는 이웃도 돌보는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교우들과 먼저 따뜻한 마음을 나눕시다. 인사합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명절 되세요.”   

<수구초심(首丘初心)>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 정호승 선생이 쓴 ‘사랑’이란 시가 있습니다. “강가에 초승달이 뜬다/ 연어 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 길가에 엎드려 있다/ 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 뜨겁게 산란하고/ 고요히 숨을 거둔다.”
  정호승 선생은 죽음에 이르는 인생 여정의 가정 중요한 모티브를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비유를 연어 떼의 
귀향에서 발견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연어는 ‘모천 회귀성’ 어류입니다. 연어는 귀소본능과 모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나 수 천리, 수 만리 넓은 바다로 여행을 떠나 그는 물새와 숭어 떼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산란할 때가 되면 그는 그가 가진 예민한 후각을 사용하여 모천의 냄새를 따라 정확하게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탕자의 귀향>  
  이번 주에도 고향과 부모님이 계신 곳을 찾는 연어 떼와 같은 귀성 행렬은 여느 때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고향 
길을 향하여 가는 한 아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본문의 주인공을 둘째 아들로 보았고, 그래서 그 둘째 
아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접근하여 그 속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일반적인 해석으로도 둘째 아들 탕자의
 회개, 집에 있는 탕자 큰 아들의 질투, 아버지의 용서라는 은혜와 도전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지난날의 배은망덕했던 과오를 
따지거나 묻지 않으시고 품어 주신 아버지의 넓은 품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보게 하셨습니다. 탕자까지도 품으신 
사랑의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도 용납하시고, 받아 주신다는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집을 떠난 인간이 돌아가야 할 영원한 본향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것을 우리 인간의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라고 했습니다. 본향이란 지리적인 
공간 이상의 의미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 온 인격적인 관계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힘들어도 고향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우리네 인생의 여정 자체가 바로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길이도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가장 깊숙한 그리움을 가리켜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Father hunger)’라고 주장합니다. 
현대인들이 불안해하는 정신적 방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진정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고향이라는 것, 우리의 안겨야 할 영혼의
 자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대를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향민처럼 방황하는 이유는 고향이신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향을 생각하는 명절을 맞이해서 우리의 궁극의 고향, 본향을 찾은 백성인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아직도 본향을 찾지 
못한 수많은 실향민들에게 고향 찾는 길을 알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깊게 새기는 고향 찾는 길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탕자의 비유, 새로운 해석>
  설교 준비를 위하여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삼은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 헨리 나우웬의 
대표작이라는 이유를 읽으면서 깨달을 만큼 그 감동의 여운이 꽤 깊었습니다. 자기 성찰의 진솔한 이야기여서 더 큰 공감을 가졌나 
봅니다. 
  일단 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서 헨리 나우웬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1957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구요. 1966년 부터는 노트르담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의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 인기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안정된 교수직을 내려놓고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지체장애자 
공동체를 섬기는데 일생을 바치다 1996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성가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 불안과 염려, 기쁨과 우정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감동을 준 상처 입은 
치유자였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했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인간의 마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은 참 진솔하고, 진솔한 만큼 감동을 줍니다. [탕자의 귀향]이 그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림, 탕자의 귀향] 화면에 소개된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소재로 하여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에 매료됩니다. 이 그림을 통해 주는 영적인 인사이트를 얻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그림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품에 끌어안는 따뜻한 장면을 보는 순간, 방황하는 둘째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품에 얼굴을 파묻은 탕자를 처음으로 대하는 순간, 한때는 두려울 것이 
없을 만큼 당당했으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그토록 애써 끌어 모은 온갖 영화가 모두 헛것이었음을 아프게 깨달은 한 
예술가의 초상이 어쩔 수 없이 겹쳐보였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차츰 상실감과 분노에 찌든 생각과 감정으로 지내던 자신이 첫째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질투와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만한 독선이 눈에 들어옵니다. 얼마나 불평을 입에 달고 지냈는지, 얼마나 적대감에 
찌든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평생 집을 떠나지 않았을지라도 길을 잃고 방황하기는 매한가지인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혹시 우리 안에 큰 아들의 모습이 더 짙게 베어 있지 않은지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잘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나의 자의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았는지를 물으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주신 온갖 특권에 감사하기는커녕, 어느새 세상에 나가 우여곡절을 다 겪고 돌아와서 따뜻한 환영을 받는 형제자매, 
지체들을 시샘하는 원망만 가득한 사람은 아닌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늘 자신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갖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의 조그만 
관심에도 질투와 시샘을 하는 기득권자가 아닌지를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선한 행실로, 믿음의 보상으로 받은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지 않은지 똑바로 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자신들의 기준을 절대화하여 진리를 왜곡하여 예수님이
 그렇게도 경멸하셨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아닌지를 집 안에 있는 탕자 첫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까지의 해석은 그래도 많이 알려져 있는 접근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전혀 새롭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의 모습을 넘어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평생 감당해야할 소명을
 받아들입니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에게서 구부정하게 서있는 아버지로 우리의 신앙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작은아들이라고 생각하든 큰아들이라고 생각하든 우리는 궁극적으로 아버지처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집으로 돌아온 자녀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아버지가 되라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가야 하는 패턴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사명의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저희 아버님 팔순감사예배를 드릴 때 제가 아버님에게 전해 드린 감사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잘못된 것을 
다 아시면서도 아들을 한결 같이 믿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도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서 크게 와 닿은 것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절제된 감정을 묘사한 얼굴의 표정이었습니다. 잃었던 아들, 죽었던 아들을 다시 찾기까지 잃어버린 슬픔,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모진 아픔이 기쁨과 함께 교차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것 따지지도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두 손으로 아들의 
어깨를 보담을 뿐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할 신앙여정의 마지막이 바로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애들을 키워보니 그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깊게 베어 주름진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사명의 길도 배우고 올 것입니다. 

<기도>
  고향을 찾아가는 길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할 본향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버선발 벗으시며 우리가 오는 것을 반가이 맞이해 주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야할 사명의 길을 찾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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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2015.02.17 10:46:10
아멘, 아멘
고찬일 2015.02.17 17:21:30
샬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명절에 목사님가정에
늘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들의 자신을 드려 감사와 찬양으로
온전하신 하나님께 영광만을 돌려드립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으로 임하시고
우리에게 모든것을 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주님께 회개의 마음으로 나아가오니
주님 용서의 마음을 주시고
우리들에게 마음에 화평을 주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달아 앎으로
신실하시며 진실하신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
본향을 향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참복음을 들고 나아가게 하소서
임마누엘 하나님
역사하여 이루소서
구원의 하나님
구속의 하나님
주님의 뜻을 온땅위에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