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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2월 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2.08 15:34 조회 1,199 추천 0
2015년 2월 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Feb_08)
마음결 마가복음1:29~39
<축복>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고, 그 느낌은 ‘떨림, 곧 전율’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유지해 주는 힘이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
 떨림과 전율이 있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요즘 뉴스에서 빠지지 않게 보도되는 것은 IS에 관련된 것입니다. 포로로 잡힌 요르단 공군기장을 불을 
태워서 죽였다는 입에 담기도 끔찍한 만행의 기사를 비롯하여 얼마 전에는 일본이 기자도 참수했습니다. 
  이슬람에는 크게 시아파와 수니파가 있습니다. 시아파는 비교적 평화주의 노선을 지향하지만 수니파는 
급진적인 무장단체이며, 사람을 죽이는 일은 예사 일로 생각합니다. 바로 IS는 이슬람 급진적인 무장단체 
수니파를 지칭합니다. 
  [사진자료] 그들이 참수한 일본인 고토 겐지 기자는 분쟁 지역을 돌며 그 참상을 세계에 알리는 프리랜서 
언론인입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한국계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인을 포함하여 전 세계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타깝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고, 적잖은 분노까지 치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으로 빚어진 갈등과 반목, 결국 전쟁은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실존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로인한 삶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는 결코 떼려야 떼어지지 않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인간의 운명이고, 실존의 속성이고 삶의 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숨을 
거두기까지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도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이 고통이라’고 했는지 모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고통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이고, 마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고통이고, 바라보면서 얻지 못하는 것이 고통이고, 온갖 욕망이 
발동하는 것이 고통이라 했습니다. 
  어디 불교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도 병고에 시달리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체념 가운데
 살다가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이후 마지막 희망을 품고 예수님께 찾아온 가련한 인생들을 봅니다.
 그러고 모변 이 고통의 문제처럼 예민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현실의 문제입니다. 이론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 이 고통의 의미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준다고 해서 무너진 육체와 마음들을 모두 낫게 해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때때로 목사로서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성도들의 고통의 문제가 
너무도 안타까운데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기 때문입니다. 
  IMF 시절 심방을 갔는데 아기 분유를 먹일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 당연히 대접할 것도 없었지요. 그냥 가면
 서운해 할 것 같아 냉수 한 잔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사이에 심방대원들의 지갑을 다 
털었습니다. 그리고 민망해 할 것 같아 젊은 엄마의 성경책에 몰래 끼워 넣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도깨비 방망이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찾게 
되고,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우리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수난과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와 고통의 문제를 친히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겪고 있는
 열병과 상처를 낫게 해주실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아마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은 습한 갈릴리 지역에 흔히 발병하는 일종의 
풍토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병을 무서워하면서 ‘불’ 혹은 얼마나 아팠던지 ‘뼈 속의 불’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키시자 거짓말처럼 열이 내리고 부인이 일어나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매우 감격스러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시몬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을 때, 사람들은 시몬을 미쳤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늙은 장모를
 혼자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어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더니 예수님도 시몬의 가정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고, 저녁 무렵이 되자 갖가지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병으로 인해 절망하고 있었고, 귀신이 들린 사람도 섞여 있었습니다. 
마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일러줍니다.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막1:33) 세상은 생각보다 중병에
 걸려있고 고통은 그만큼 보편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든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는 구경삼아 모인 사람들도 있었고, 
할 수만 있으면 꼬투리를 잡으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보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하나님이 주시는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가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인 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1~13) 심지어 악한 인간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병을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아끼시고 
사랑하시고,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아침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게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5:45)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시는 하나님은 사랑 밖에 없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죄인이라고 내쳐지고 
소외된 사람들이 그 절망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내 뜻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감격스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40:27)
 마치 시편44:24에서 시인이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하며 하나님의
 무관심을 섭섭해 하듯이,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에게 섭섭해 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의 고생 같은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으시고, 나에게는 눈길도 주시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불만에 섬세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여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8~31) 
  하나님은 그들이 당신의 사랑을 잊었다고 내치지 않으십니다. 다시 한 번 그들에게 설명해 주시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그 어떤 질문도 타박 없이 예수님은 문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병든 몸을 고쳐주시고, 상처 입은 마음을 돌보아주십니다. 억눌린 영혼들을 
풀어놓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불쌍한 사람들은 형제로 혹은 당신 
자신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최후의 심판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그리고 헐벗은 자와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열거하시면서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십니다. 당대의 가장 
약하고 가난한 자 심지어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갇힌 자마저 주님은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서신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와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고린도전서9:19~23 말씀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9:19~23)
  여기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나는 기꺼이 그들과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혼자 거룩한 척, 강한 척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과 같아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도 한 영혼을 얻기 위해 자신의 중요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 무엇을 잃어 본적이 있는가?, 정말 사심 없이 한 영혼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해본 적이 
있는가?, 그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무엇을 희생하였는가?”
  
<사랑의 사람>
  설교 모두에 소개한 고토 겐지 기자를 잘 아는 사람은 그를 사랑의 사람으로 추억합니다. 그가 목숨 걸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차별 없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고토 겐지 보다 먼저 살해당한 유카와 하루나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고토 겐지는 내 아들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을 것을 잘 
아는 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겐지 씨는 전쟁 중에도 남의 마음에 다가가는 부드러움과 역한 자를 돕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오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배운 사람입니다. 마음결이 참 예쁜 사람입니다.
  마음결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나무에도 결이 있듯이 사람 마음에도 결이 있더라. 좋은 
나무는 결도 곱고 좋은 마음도 결이 곱더라. 결 고운 나무는 찾잔 받침이 되어도 곱고 찻잔을 놓은 탁자가 되어도
 곱고 탁자가 있는 마루바닥이 되어도 곱다. 마음결이 고운 사람도 그렇더라. 스스로 낮은 곳에 놓일수록 자꾸 더 
고와지더라.”    
  우리 한서교회가 포근하고 따뜻하고 시골 교회 같은 정이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마음결이 
곱고 예쁜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아픔이 있는 곳에 늘 그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우리 한서의 성도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꺼이 위로의 자리를 지켜줍니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한결 같습니다. 
그 분들을 뵈면 목사인 제가 많이 부끄러워집니다. 정말 마음결이 고운 분들입니다. 그 분들을 본받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가 네게 어떻게 대하든 그저 사랑만 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내 시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팔을 밖으로 뻗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허리 굽혀 내려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헌신으로 내가 알고 모든 사람들을 사심 없이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곱고 예쁜 마음결이 내 영혼에 새겨지도록 날마다 주고도 남음이 있는 넉넉한 사랑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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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일 2015.02.11 11:01:00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할렐루야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며 생명이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질서위에 다스리시어 역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과 겸손으로 이땅위에 이루신 예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삼위일체 되시는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온전히 돌려드립니다
사랑의주님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긍휼히 여기심으로
우리를 구원의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십자가 보혈의 피로 죄악을 씻겨주시어
정결하고 성결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며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들의 마음의 결을 곱고 아름답게 다듬어 주시어 주님의 향기가 되게 하소서
아름다운 주님의 몸된 한서교회를 이땅 망원동에 세워주시고
주님의 부름받아 영적 지도자로 세워주신 최재선 담임목사님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으로 강하고 굳세게 붙들어 주시어
말씀에 능력에 능력을 넘치도록 충만히 부어 주시어 역사하소서
우리 모든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며
주님의 사랑안에서 믿음이 더욱 성숙되고 변화되게 하소서
예수님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옵소서
진정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뢰와 소통으로
예수님 마음을 본 받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사랑으로 이웃을 향하여 섬김과 나눔으로 나타나게 하소서
우리의 꿈과 희년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주님
온 땅위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 이름 높이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은숙 2015.02.12 12:22:21
악의 세력이 언제까지 유지될까요
정말 슬픔니다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