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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월 2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5.01.25 14:57 조회 1,438 추천 0
2015년 1월 2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5_Jan_25)
한 겨울 군고구마처럼 마태복음 8:5~13
<엄마의 희생>
  [사진자료: 불길서 5살 아들 구한 엄마 치료 중 끝내 숨져]  이 사진은 지난 ‘의정부 아파트 화재 사건’
 당시 불길 속에서 5살 아들을 구하고 구조된 장면입니다. 그런데 치료를 받던 젊은 엄마가 안타깝게도 끝내
 숨졌다고 합니다. 그 엄마의 아들은 엄마 품속에 있어서였는지 큰 부상 없이 치료를 받은 후 퇴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이 갈 데가 없습니다. 그 엄마도 고아였고, 미혼모로 아들을 혼자 키워왔는데 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현재 아이는 아동보고 전문기관에 맡겨진 상태이고, 의정부시에서는 아이를 
앞으로 보호할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합니다. 아이를 키워줄 천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엄마의 나이가 22살이라고 하는데,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불길 속에서 살린 그 
모성애는 어느 엄마보다 컸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최근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한 겨울 군고구마처럼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를 
찾아보았는데, 찾기 어려웠습니다. 신문과 인터넷 기사를 몇 번 둘러보아도 마땅한 것이 없었습니다. 반면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는 사건 사고와 관련된 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갑질 관련 기사, 어린이집 폭력교사, 
안일한 세금 정책 등.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감동의 이야기들이 많아야 
살맛나는 세상이 될텐데,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만, 그래서 오늘 설교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누군가에 한 겨울 군고구마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감동을 전해주라는 말씀으로 들으시면 
더욱더 은혜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
  복음서를 읽다보면 깊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렸던 가나안 여인이 그렇고
(마15:28), 나병에서 해방된 후 주님께 돌아와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마리아 사람이 그렇고
(눅17:18),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백부장이 그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그 앞에 나아와서 간곡하게 말합니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반응을 간결하게 드러냅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성은 우리에게 다음에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말은 다소 장황하다 싶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은 주님을 집으로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셔도 종이 나을 거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부하들이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종의 병이 물러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막무가내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철저한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신앙의 모범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냅니다. 그 백부장의 믿음 앞에 설 때 자신들의 믿음을 따라 올 수 없다고 
자부하며, 타성적인 신앙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백부장은 어떤 사람이길래 예수님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신앙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을까요?
  먼저, 그는 공감(Sympathy, 동정)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공감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열어놓은 상태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서보는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릅니다. 장례가 난 상가에 가서 
서럽게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들은 자기 슬픔에 겨워 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이입입니다. 공감이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는 점에서 감정이입과 
비슷하지만,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이 본문으로 성경공부를 하던 중 목사님이 “왜 이 백부장은 종의 병에 이렇게도 깊은 관심을 가질까?” 하고 
묻자, 한 청년이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병이 나아야 빨리 부려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 청년을 향해 목사님도 다소 장난스런 마음으로 “세상을 너무 각박하게 살아온 거 아냐?”라고 했더니 모두
 한 바탕 웃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하고, 무서워서 이유 없는 친절이 서로에게 불편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을 쓴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피에르 신부의 말을 우리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
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이다.”
  백부장은 종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습니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따뜻한 피를 가진 진짜 사람이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란 어떤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요? 도덕적으로 파탄 지경에 빠진 사람을 우리는 얼핏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타락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림으로써, 동료들과의 결속 감정을 상실한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칭찬은 고사하고 늘 말이 차갑습니다. 
  해가 바뀌어도 시골에 홀로 계신 부모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핑계는 분주하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그들은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생각이 
내면화되어 다른 이의 아픔에 다가서기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공감의 사람, 백부장의 행동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무한히 신뢰합니다. 어쩌면 그는 
예수님에게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애정과 돌봄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면 종의 병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확률게임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가능성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이 가능한 
것은 바로 마음에 절심함에 있습니다. 마음에 절실함이 없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1970년대 생명사랑운동을 펼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은 당대 
유명한 서예가입니다. 어느 겨울 저녁, 선생님과 제자들은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장 선생님이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름 아닌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였습니다. [사진자료; 군고구마 장사] 
군고구마를 드시고 싶으신가 해서 제자들이 여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시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군고구마’
라고 쓰여진 글자를 보며 말씀하십니다. “저기 ‘군고구마’라로 쓰여진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뜻한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듯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저 
글씨는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절실한 마음에서 진실이 나옵니다.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가 절박한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씨에서 장 선생님은 진실을 보았던 것입니다. 온갖 필법을 연마한 끝에 써내려간 일필휘지보다도 군고구마 장사의
 글씨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신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정직하고 절실한 이들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에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깊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 들일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의 역사는 바로 이런 자기 겸비와 절대적 신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그런 신뢰에 대해 명쾌한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도 간결합니다. 
  백부장의 깊은 믿음은 오늘의 우리의 영적 상황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을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이방인’이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백부장을 
신앙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것만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주님의 말씀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2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헛된 자부심이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텅 빈 그들의 영혼을 보고 있습니다. 잘 믿는다는 자부심, 이만하면 됐다는 안도감이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그렇게 의식과 형식만으로 드리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자적 메시지로 
일갈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암5:21~23)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갈망과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열린 
공감의 마음과 절박한 심정과 절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삼류 마술사>
  어느 삼류 마술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나왔습니다. 그는 교회를 열심히
 나오는 중 교회의 곳곳에서 기쁨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매우 부러웠습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하고, 어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어떤 이는 주방에서, 안내로, 각 사역팀원으로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많은 어르신인 삼류 마술사는 남들만큼 건강하지도 않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재력도 많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이 어르신은 어느 날 교회 본당에 혼자 들어갑니다. 오랜 시간 동안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자 걱정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본당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 문틈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문틈으로 본당 안을 
본 사람이 깜짝 놀라 이야기 합니다. 난리가 났다고. 울긋불긋한 여러 색깔의 줄과 여러 꽃들이 흩어져 있고,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한마디로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 하나를 보여주고는 “하나님, 
재미있으시죠?” 라고 혼자 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매우 행복해 합니다. 누가 봐도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문을 열어 확인해보니 바로 뒤늦게 교회에 출석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순수한 마음에 틀림없이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세계 오지를 여행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책을 쓴 한비야 씨는 예수님께 “애썼다”는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한 겨울 군고구마처럼 예수님과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 안에도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주시고, 절박함과 절심함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을 주옵소서. 그래서 예수님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사는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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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2015.01.26 09:42:34
주님의 말씀 순전하게 받고 그대로 행하게
 제 마음을 주관하소서
구약시대의 모세처럼....
아멘 아멘
고찬일 2015.01.27 13:54:02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편108;5)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우리을 긍휼히 여기사
언약을 온전히 이루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찬양과 기도로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주님
우리들의 마음에 문을 열어 주소서
순종과 겸손과 섬김으로 닞아지게 하시며
우리들의 영을 깨우소서 앎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귀를 열므로 들려지게 하시고
매일매일 주어지는 우리들의 삶속에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여
선한 뜻으로 나타나게 하시며 참된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진실된 마음과 진솔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동행을 이루며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게 하소서
아름다운 한서교회위에 임마누엘하시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
주님의 종 최재선 담임목사님에게 영육간에 강권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혀주사 생명의 말씀이 선포될때
온성도가 아멘으로 화답게 하시며 나아가게 하소서
사랑의 하나님
한서 믿음의 공동체위에 하나됨을 주시며
진정 주님의 사랑안에서 이웃을 향하여 나눔과 돌봄으로
선한 영향력을 이루어 참복음의 물결이 흘러가게 하소서
구원의 하나님
구속의 하나님
우리들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소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어
희년의 꿈을 이루어 주옵시고
열방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 높이어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