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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2월 14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12.14 15:55 조회 1,297 추천 0
2014년 12월 14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 주일예배설교(2014_Dec_14)
   예수로 살다 임마누엘로 오다   마1:18~25
<축복>
   희망과 진리와 기쁨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성탄의 은총이 사랑하는 한서의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 위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 빛을 받은 여러분들로 인하여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 온 누리에 성탄의 은총이 흰 
눈처럼 소복이 내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옆에 있는 교우에게 마음을 담아 서로 축복하겠습니다. ‘성탄의 
기쁨을 온누리에 전합시다.’

  결혼을 앞두고 선을 보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약속 장소인 다방에서 그들은 어색한 만남을 갖습니다. 먼저 
인사를 했겠지요. 남자 총각이 먼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임신중이라 합니다.’라고 아가씨 얼굴 한 번 보고 땅 
한 번 보고 쑥스럽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어 아가씨도 인사를 합니다. ‘예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오계월
이라고 합니다.’ 
  남자 총각은 임신중, 여자 아가씨는 오계월 이름만 보아도 천생연분이지요. 분명히 잘 살았을 겁니다.
  
  이 이름에 대한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있지요. 자기 것임에도 내가 쓰기 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쓰는 것이
 ‘이름’입니다. 이름은 사람이나 사물을 지칭할 때 쓰는 명칭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을 부르기 위한
 지칭의 수단이라는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이름은 부모의 바램이나 소망, 
기대감 또는 감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옛 한시에 ‘대지는 풀 한 포기에도 이름을 주어 기른다’는 것처럼 
어버이가 자식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자녀를 향한 간절하고 진실한 사랑, 부모의 마음이 베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심하게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까지 
생각합니다. 잡신에 대한 신앙이 성하던 고대에는 이름이란 제의적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즉 이름이 주어져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물을 바치고, 축사를 부르고, 씨족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이름이 주어질
 때 부터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진지하고 신중합니다.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믿었던 한 때는 ‘개똥이, 간난이, 언년이’라는 이름이 인기였습니다. 장수하는
 동물의 이름으로 길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여 ‘김수한무 두루미와 거북이 삼천갑사 동방사…’ 또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딸의 이름을 ‘말녀, 끝순이, 박차고나온 놈이 샘이나’ 등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주술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는 많다. 그 중에 만담가로 잘 알려진 장소팔씨는 그 분을 낳을 때 그 집이 몹시 
가난하여, 아버지께서 해산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시려고 장으로 소를 팔려고 나간 사이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장소팔로 지었다는 것이다.

  성서에서 이름은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은 그 사람의 사명과 더 나아가 운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직접 사명에 걸맞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시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낼 때 붙여준 이름입니다. 그는 이름대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속박에서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세주로 오시는 메시아의 이름을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작명하신 것을 통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가지 이름을 지어 주셨는데 ‘예수’와 ‘임마누엘’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요,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예수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다가 다시 성령을 통하여 임마누엘로 오셨고, 다시 재림에 때에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로 직접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의 비밀을 잘 살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을 ‘예수로 살다 임마누엘로 오다’로 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로 살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름에는 부모든지 그 어떤 사람이 지었던지 지은이의 소망과 
바램과 기대감이 표현되어 있다 하였습니다. 특별히 성서에서의 이름은 그의 운명, 사명과 직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바래심과 소망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배신하여 
등돌리고 있는 우리들과 화해하시기 위하여,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어야만 하는데 그 역할을 앞으로 
태어날 아가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화해를 위하여서는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하는데 그 희생의 역할을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그 생명을 구하는 대신에 누군가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젠가는 희생이 제물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 평범한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각 조차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날 
세월호 사건의 아픔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들, 딸을 먼저 앞세워야만 했던 부모의 찢어지는 가슴을 누가 
위로해 줄수 있겠습니까? 자식을 앞세우면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했는데, 그 처절한 아픔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그 상처는 대한민국 전 국민의 가슴에 크게 남아 있지요. 
  그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이해가 될까요? 차라리 모르는게 낫지 그 아이의 앞으로의 
운명을 안 아버지,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알면서도 그 
아들의 이름을 ‘머지 않아 죽을 아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이름은 구약 제사의 규례 대로라면 죄를 지은 사람을 대신하여 
대속제물이 있어야만 했는데 그 제물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 양과 비둘기의 역할을 태어날 아이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태어날 아이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절기를 잘 지키는 것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 가장 으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마냥 들뜬 기분으로 보낼수 없는 것은 바로 성탄절에 숨겨진 하나님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젊은 나이에 아들을 죽이셔야만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그것도 그 엄청난 결단으로 
보여주신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을 향하신, 어쩌면 무모한 희생을 단행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진심어린 감사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예수라는 이름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찾아야할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
 해야할 일을 하다가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 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얼마만큼 오래 살았는가를
 자랑하기보다는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얻게 되는 
교훈입니다. 옛 말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 인류의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 목적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귀신이 나갔고, 병든 사람이 
낳았으며,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를 만나주시어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며 죽였던 자가 예수를 전하는 자로, 도둑놈이 도둑을
 잡고 계도하는 사람으로, 조직폭력배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대원으로, 사람을 죽였던 자들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의 안내자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살 길을 찾았다는 것 얼마나 값지고 보람된 
일인가요? 
  목회의 길이 그리 만만치 않지만 바로 여기에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을 살리는 일, 일으키는 일 정말 
생명을 걸 만큼 매력있고 거룩하고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성직이라고 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어느 성도님이 ‘목사님 오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위한 맞춤 설교였습니다. 
힘을 얻었습니다.’라고 말에 큰 감동과 보람, 목사로서의 성직을 부족하지만 일부분 감당했다는 것에 깊은
 감사와 자긍심을 느낍니다. 저는 교회학교 선생님들에게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성장하여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 어릴 때 나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던 선생님이 있었다’라는 고백을 
듣도록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라고 권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 땅에서 ‘작은 예수’로서 나로 인하여 또 다른 생명을 
살려내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나로 인해 생명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살려내는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다시 결단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임마누엘로 오다>
  이제 또 다른 이름 ‘임마누엘’에 대하여 생각해겠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임금이 천한 천민의 집에 오신다는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분이 더럽고 추한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자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어 ‘그 분(아도나이)’이라고 부를 정도로 고결하신 분이 죄로 타락한 이 세상을 상징하는 
말구유, 말 밥그릇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신 하나님의 자기비하이신 것입니다. 우리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이요, 이 땅에서 내려오시면서까지 몸으로 
나타내시는 우리를 향하신 처절한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출애굽기 19장 이하에 보면 내려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종들을 산에서 주로 만나시어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몇 차례 산에 오르고 내리는 
일을 번복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모세에게 회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이제는 내가 너희 가운데 
내려와 너희 삶의 한복판에서 너희를 만나리라’는 인간을 만나시는 새로운 방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산 보다 더 밑으로 내려 오신 것입니다.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너희가 어디로 가든지
 너희 공동체 안에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시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극기야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 가운데 직접 찾아오신 성탄의 사건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신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은 당시의 이해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 
동네, 그것도 모잘라 마굿간 말구유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까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사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한 가운데, 우리가 지금 아파하고 있는
 고통의 그 자리에,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고뇌의 중심에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의 야곱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사기치고 도망간 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가족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어두운 빈들의 밤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실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만 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을 
완성하도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의 날, 재림때까지
 아니 저 천국에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어느새
 슈퍼맨으로 원더우먼으로, 수호천사로, 마니또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한번 더 말씀드리죠. 기도원을 다녀오는 길에 한무리의 오리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도로 큰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심결에 지나갔으면 생각만해도 끔찍한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제가 그 무리를 보았습니다. 비상등을 키고 급정거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뒤에 따라오던
차도 서게 되었습니다. 오리 가족이 다 건너간 후에 다시 출발했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것을 오리가 
알 리가 없습니다. 저보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 흔한 감사의 인사도, 해마다 그때를 기억하고 선물도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던 운전자도 모릅니다. 앞에서 무슨 일어났었는지를 모를뿐더러, 
아마도 길 한 가운데 갑자기 차를 세웠던 저에게 모르긴 몰라도 실컷 욕을 했을 것입니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네 인생과 신앙의 단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죽을뻔한 위기에서 함께 하셔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살려주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깊은 감사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한서 가족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하여 엄청난 사랑의 희생을 감수하신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숨겨진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황금과 몰약과 유황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많은 생명을 살리신 것처럼 작은 예수로서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가까운데서부터 하세요. 우리 주변에 있는 성도와 이웃에게 용기와 희망과 힘을 주는 작은
 예수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 그 상황이 어떠하든지 가장 낮은 자리, 
아무도 몰라준다고 하는 그 자리에, 내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
  예수 사시다가 임마누엘로 지금 함께 하시고, 임마누엘로 다시 오실 주님 앞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리는 성탄절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도 작은 예수로 살게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 신앙으로 오늘을
 이겨내게 하시고, 소망 중에 날마다 기쁜 축제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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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일 2014.12.15 14:55:05
호산나 호산나
구원으로 오시는 예수님
가장 낮은 이땅에 임마누엘로 오시는 주님
화평의 왕이시여 오시옵소서
오직 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원자가 되시며 구속자가 되시오니
주님 앞에 존귀와 영광을 온전히 돌려 찬양과 감사로 나아갑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아래 세워주신 아름다운 한서교회위에
주님의 뜻을 온전히 세우시어 이루시며 행하시옵소서
은밀히 행하시며 이루시며 역사하시는 주여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을 다스리사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인내케 하시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하게 하소서
야곱의 하나님
한서교회의 지경을 넓게 펼쳐주소서
하나님의 은혜아래 성령 충만함으로 은혜에 은혜로 더하소서
최재선 담임목사님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손으로 붙드시며 말씀에 능력에 능력을 더하여 주시어 
보고 듣고 깨달아 온성도가 함께 힘써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오니
이웃을 향하여 사랑의 섬김과 나눔으로 희망과 용기속에 나아가게 하소서
한서사랑의 공동체와 함께 역사하시는 사랑의 예수님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어 희년을 향한 꿈을 온전히 이루어 주소서
주님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우리의 삶속에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소서
구원자가 되시며 구속자가 되시는 예수님
생명의 부활이 되시며 소망이신 예수님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