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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1월 30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11.30 15:00 조회 1,262 추천 0
2014년 11월 30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Nov_30)
하늘 가르고 강림하소서! 이사야64:1~9

<하나님의 침묵>
  오늘은 교회력으로 강림절(Advent) 첫 번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성탄일 직전 주일부터 거꾸로 네 주일 동안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성령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이제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느라 분주했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주님을 맞이하기에 부족함 없는 마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력에 따라서 읽어야할 성경 본문을 정리해서 알려주는 것이 소위 성서 일과(Lectionary)라고 합니다. 그 성서일과에 따르면 오늘 이사야 64장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탄식 가운데서 드린 기도문입니다. 기도자는 먼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른 번역본의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에,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3절) 

  성경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기록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조상들이 경험했던 그 엄청난 일들을 기억하면서 기도자는 마음이 갑갑해집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와 별로 다를 바 없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일을 행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70여 년 동안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후반부에 보면, 기도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주님을 찬송하던 성전, 우리의 거룩하고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탔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곳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10-11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심히 설레었을 것입니다. 거대 제국 바벨론이 신흥제국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한 것도,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모든 포로 민족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감격도 잠깐, 그들은 비정한 현실을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폐허가 된 조국을 회복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전을 보수했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생각하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자는 과거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고 산을 흔들며 나타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집트의 대군을 한 순간에 수장시키고, 매일같이 일어났던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을 기억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60만 대군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그렇게 강한 손을 펼치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강청기도도 해 보고, 철야기도도 해 보고, 금식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았습니다. 몸을 불살라 하나님의 침묵을 깰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당장 침묵을 깨고 활동을 시작하실 만도 한데,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도 아무런 말씀도, 아무런 행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63:19)

<우리가 우는 이유는?>
  지금 우리와 함께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는 주변에 교우 가운데도 적잖이 위에 기도자처럼 가슴 아픈 소리를 내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만 하실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만하면 된 것 같은데,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만 가는 성도의 가슴 아픈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먹먹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사모는 새벽에, 늦은 밤에 많이 웁니다. ‘누군가 왜 사모님은 기도할 때 저렇게 우나요?’하고 묻습니다. 성도들의 내는 가슴 아픈 소리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반복, 고통의 연속, 그 가운데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그만 말씀하시라고, 이제 손을 내밀어 주시라고, 주의 종이 드리는 기도에는 그래도 반응을 보이시지 않겠느냐는 작은 바람이라도 붙잡고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그래서 많이 웁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에서 완주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언제나 분명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머지않아 큰 위기를 당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나의 선행에 대해 항상 보상해 주시고 나의 악행에 대해 틀림없이 징벌하실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곧 실제적 무신론자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동안에 항상 경험하게 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 같은 경험은 결코 놀라운 것도 아니며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말씀하시는 경험보다는 침묵하시는 것 같은 경험을 더 많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제가 자주 인용하는 C. S. 루이스도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병으로 잃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잔인한 침묵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불면의 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 생활에 있어 피할 수 없는 일입니까?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spirit, 靈)이시고 우리는 ‘물’(material, 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언어(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은 ‘공기’, ‘바람’, ‘숨’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뜻은 “하나님은 손으로 만지거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존재인 우리에게 있어서 공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듯,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 같은 영적 무감각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영적으로 맑아지고 깊어지며 예민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항상 활짝 깨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도 그렇게 예민해지고 둔감해지기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둔감해 질 때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침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둘째,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 중에 활동하실 때 영적인 방식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방식’이라는 말은 ‘비 물리적인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조종하는 것, 강요하는 것, 위협하는 것, 굴복시키는 것이 물리적인 방식입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주로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호통치고 강요하고 때로는 때렸습니다. 반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대개 영적인 방법 즉 비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사랑하고 기회를 주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보듬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물리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보다는 어머니처럼 영적인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철없는 자식에게 어머니는 무력하고 무지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 자식은 물리적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눈치만 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자식에게 철이 들면 무력해 보였던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비 물리적인 방식으로 자식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보고도 자주 침묵하시지만, 그것은 그가 깨닫고 돌아설 기회를 주려는 뜻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고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철없는 우리에게 자주 침묵하시는 것 같고 무심한 것 같으며 또한 무력해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침묵이 믿음의 본질에 속하는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벽을 만듭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자주 경험합니다. 부모에게 걱정 끼칠만한 일을 하고 나면, 아이는 부모를 대하는 데 불편을 느낍니다. 배우자 모르게 부정을 행하면, 배우자를 대하는 마음에 금이 갑니다. 아무 일 없는 듯이 연극을 해 보지만, 관계에 금이 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하나님은 점점 더 분노한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요 심판이라고 느껴집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기도자가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5-6절)
......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9절)

<언제나 우리와 같이 걷고 계신 하나님>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 이어지는 이사야 65장을 계속 읽어가다 보면, 기도자가 하나님을 잘 못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자는 유다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그로 인해 그분은 그들의 호소와 간구에 침묵하고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1-2절)

  아,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 때문에 얼굴을 감추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죄악 때문에 오만 정 다 떨어져
 고개를 돌리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모른 체 하고 내버려 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죄에 물들어 있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언제라도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 발이 저린 나머지 하나님에게서 떠나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은 침묵하신다고, 하나님은 무심하시다고 한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때로, 아니 자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믿는 신이 언제나 
존재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온 우주의
 우주를 합한 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에게는 때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구가 너무 커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커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주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내가 믿는 신이 언제나 나에게 말하신다면,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거나 환청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때로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말씀하기도 하시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마치 우리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바람을 때로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침묵하시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인격적이십니다. 신사적이십니다. 적당히 위협하고 협박하여 몰아세울 수도 
있는데, 잘 그러시지 않습니다.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내림굿으로 인해 
무당이 된 사람들은 그 귀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만 허사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성령은 너무도 신사적입니다. 성령은 절대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법이 없고, 성령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면 그대로 놓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도 느려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4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예로 
살았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도 느려 보였습니다. 북한의 지하 교인들에게 지난 60년은 너무도 긴 세월입니다. 지금의 미국 
경제 상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긴 터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느린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이 차이를 알았기에 모세는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시 90:4)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지,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아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기도자처럼 우리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영영 버린 것처럼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의 죄 때문에 
삐치신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지었음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기다리시며, 돌아오는 죄인을 맨발로 나와 끌어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용서는 ‘삼세번’을 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또 다시 용서하시고 참으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도 아니요, 그분이 우리 삶에 무관심하다는 뜻도 아니며, 
우리 삶에 개입하기에 무력하다는 뜻은 더 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참된 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때로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때로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침묵을 느낀다고 해도 이상해 하거나 놀라서는 안 됩니다. 대신, 차분히 앉아서 그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감정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 보일 때에도 그분의 임재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이 침묵하시는 것 같을 때에도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말씀하고 계심을 믿고, 그분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때에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일하고 계심을 믿으며, 모든 것이 제 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또한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침묵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강림절 첫 주일을 맞았습니다. 강림절은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다립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조하게,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유롭게, 넉넉하게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을 전심으로 
감당하면서 기다립니다. 언제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우리를 놀래키실 것을 믿으며, 기다립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 기도자가 드리는 기도는
 ‘하늘 가르고 강림하십시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의 눈을 가진 우리의 기도는 ‘나의 일상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환영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기다림이 있기에 희망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여전히 소망을 갖고, 기쁠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강림절에 우리 마음속에 되찾아야 할 믿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탄일을 기다리며 우리의 이웃들과 나누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목숨이 끊어져도 여전히 기다릴 것이 
있다는 소식, 세상이 무너져도 여전히 기다릴 것이 있다는 소식, 그리고 그 기다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소식, 이 소식이 저와 여러분 마음 깊이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이 소식이 희망 없는 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
  언제나 변함이 없으시고 한결같으신 주님, 저희로 주님의 침묵에 익숙해지게 하시어 침묵하는 것 같을 때에도
 주님을 믿고 찾고 의지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기에 항상 소망 중에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그 무엇을 기다리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 기다림으로 저희의 마음이 늘 설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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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일 2014.12.02 12:04:37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과 자비하심과
온유하심과 사랑하심이 이 땅위에 있나이다
주님께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찬양과 영광을 온전히 드립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아래 우리를 매여주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여 성령으로 임하소서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사 알게 하소서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심령위에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소서
주님만 의지하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인내하며 나아가오니
주님이 주시는 진리 은혜의 강물이 흘러가게 하소서
축복으로 오시는 주님
평강으로 오시는 주님
풀림으로 오시는 주님
열림으로 오시는 주님
섬김으로 오시는 주님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
주의 빛을 비추어 주옵소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아름다운 한서교회위에 역사하여 주옵소서
담임목사님과 온성도가 한마음으로 기도하오니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소서
임마누엘 하옵소서
구원의 주
구속의 주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