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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1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10.19 12:29 조회 1,153 추천 0
2014년 10월 1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Oct_19)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 마태복음12:33~37

<축복 그리고 열매>
  주님이 주시는 의와 평화가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마음에 
설상가상으로 판교의 대형사고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서 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일주일의 일과를 
마치고 편안하게 공연을 즐기려했는데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 보는 마지막 공연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하늘의 부름을 받은 영혼과 슬퍼하는 가족들 위에 하늘의 위로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가 인정하고 다짐할 것은 믿음의 옷깃을 여미고 생명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 철저히 의지하며, 내게 주신 이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소한 것들에게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함께 
묶어주신 가족과 교우들 더 많이 사랑하며,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에 우리의 삶을 드리며 살아가는 
사랑하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해에는 우리 교회 마당에 있는 과실수
 중 은행에 제법 많이 열렸었습니다. 반면 모과와 감은 적게 열렸었습니다. 특별히 모과나무는 서울시내 
전역에 병이 돌았는지 제대로 된 열매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올 해는 은행은 적게 열렸고, 모과와 
감은 풍년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열매가 예쁘고 탐스러운지요. 하나님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두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살도록 공평한 기회를 주시는 것 같아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무에 가득 열린 나무를 보노라면 절로 마음이 풍요로와 집니다. 시인 오세영 님은 열매라는
 시에서 시인다운 풍성한 상상력으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세상의 열매들은 왜 모두/ 둥글어야 하는가.
/ 가시나무도 향기로운 그의 탱자만은 둥글다./ 땀으로 땅으로 파고드는 뿌리는 날카롭지만/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는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는다. 덥썩/ 한 입에 물어 
깨무는/ 탐스러운 한 알의 능금/ 먹는 자의 이빨은 예리하지만/ 먹히는 능금은 부드럽다”
  땅을 파고 드는 뿌리도, 하늘로 뻗어가는 가지도 뾰족하지만, 스스로 익어 떨어질 줄 아는 열매는 모가 
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신기합니다. 탐스런 열매를 자꾸 보면 모난 우리 마음도 
둥글어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열매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지금이 열매의 계절이요, 성경에 ‘열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시편1편은 복있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다고 말합니다. 잠언은 도처에서 선한 사람은 열매를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히
 얻는다고 말합니다(잠12:14, 13:2). 에스겔은 성전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열매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겔47:12).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일갈합니다.

  인생의 보람은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들에게 유익을 준다면 우리는 복된 인생을 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합니다.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열매도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말씀을 우리 삶에 구체적인 맥락 아래 놓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같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배경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배경을 살펴 보겠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예수님께서 이런 결론을 내리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느날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심으로 
그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그런 
상황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딴죽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시고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나라가
 설 수 없을 것이 아니냐고 단언하십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영을 힘입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선포입니다. 귀신은 사람의 생명을 어떤 
형태로든 짓눌러 온전한 생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귀신은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깃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듭니다. 귀신에 들리면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됩니다.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은 듣지 못하고, 듣지 않아야 할 
것은 듣게 합니다. 귀신들림이라는 게 신화적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귀신들림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자면 현대인들은 어쩌면 태반이 귀신이 들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은 귀신에 짓눌렸던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는 사건을 보았으면서도 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일까요? 예수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기준에 
맞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고, 자신들이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율법 조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해서 이들이 신앙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특심한 사람들입니다. 보통 
일반인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한다면 이들은 두 번 이상 금식을 하며, 구제와 봉사에도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 자체가 더 깊은 신앙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특별한 그룹이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먼저 예수님이 메시아 인 것을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상식적인
 것일 텐데,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일종의 해프닝입니다. 
그런 그들이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모두가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일만큼 적대감이 컸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교회 전통이 가르친 일곱 가지의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교만, 욕망, 허영, 분노, 비애, 무절제 그리고 
인색함’입니다. 이 인색함은 물질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을 긍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하는 마음도 인색함입니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데 인색합니다. 마지못해 그를 인정한다 해도 언제나 유보조건을 달곤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기꺼이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남에게 배우려 합니다. 하지만 미성숙한 사람은 남을 깎아내리면서, 남을 비방하면서 자기를 높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잠시는 먹히는 것 같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의 얕은 마음을 하나님도
 아시고, 결국 사람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의 시도는 언제나 결과가
 실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직하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짓는 어떤 죄도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는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입니다.
 당연한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쁜 나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통절하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맺은 
열매는 위선이요, 자기 의요, 하나님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으려는 적대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술 칼을 들이대듯이 그들을 향해 외치십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매우 무섭고도 심한 
욕입니다. 욕쟁이 할머니도 이렇게까지 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듣는 당사자들도 놀랐겠지만 둘러선
 군중들은 오히려 더 놀랐을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면 왠지 주눅이 들만도 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는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위선과 불신앙을 거침없이 폭로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며 
바리새파 사람들은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성, 신앙의 영역에 대해서 
자신들을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적당히’는 없었습니다.
 두루뭉술 비유로 말씀하셔서 듣는 이도 말하는 이도 크게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평소의 청중을 향한 
예수님의 배려는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위선과 잘못된 신앙과 신념으로 가득찼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코방귀도 끼지 않을 사람들인 것을 예수님을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오염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진리를 거스리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만 보면
 예수님은 이해도, 배려도, 사랑도 없는 냉정한 분입니다.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식에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리를 전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를 포함한 지금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명심해야할 대목입니다. 그래서 저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이끄시는 목회,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진리를 분별하여 진리를 쫓는 사역이
 되기를 새벽마다 몸부림합니다. 그런데도 늘 부족함과 한계를 느낄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저희 교회도 다녀갔습니다만,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님의 간증 중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술이 가득한 사람은 술이 나오고, 돈이 가득한 사람은
 돈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죠. 사람은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혹은 들려주기 위해 잘 가려 뽑은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할 수 있지만, 결정적일 때 자신 
안에 들어있는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쌓아 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낸다.”(35절)

  당연한 듯 보이지만 이런 통찰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인간의 속을 훤히 
꿰뚫고 계신 분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에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쌓은 것이 말이 되어 나타납니다. 
불평과 불만 그리고 비평의 언어만 쏟아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비평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인격 모독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가 하면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는 데도 기쁨과 
감사의 말을 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마셔도 뱀은 그것으로 독을 만들고 양은 그것으로 
젖을 만듭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로도 
구원을 보증해 줄 수는 없습니다.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는 말도 듭습니다. 그 역시 옳은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매사에 성실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상차림을 보면 주인의 살림 솜씨를 알 수 있지만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안에 있는 게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꾸 자기를 닦고 또 닦아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아주 무서운 경고로 이어집니다. 36~3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무익한 말’은 다른 성경에서는 ‘쓸데없는 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뜻은 진실하지 못한 말,
 빈 말, 검증되지 않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그것이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배우고 있는 전도서의 솔로몬의 고백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자기 다른 아테네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안다는 사실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해서 보듯이 
희미하게 볼 따름입니다. 부분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겸허히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은 씩씩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오류의 가능성도 큽니다. 그렇다고 매사에 
회의적인 자세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옳다고 판단되는 일을 확신을 가지고 하되, 내가 그릇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확신이 배타로 이어지면 안 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들과 다른 방식으로 믿고 사유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향하여 ‘악하다’고 하십니다. 한자로 ‘惡’은 ‘버금 亞’자와
 ‘마음 心’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亞’자는 본래 등뼈가 구부러진 것을 그린 것으로 처음부터 보기 싫은 것, 
흉한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에 ‘마음 心’을 덧붙인 것은 가장 보기 싫은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과 잇대어 있고, 그 하나님을 향해 꼿꼿하게 일어설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구부러져 다른 것들을 향할 때 우리는 악한 자가 되기 쉽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말이 
나옵니다. 남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헐뜯는 말은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그 악한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겉은 경건의 모양으로 위장을 잘했지만 
안에는 썩어가는 회칠한 무덤인 것을 보셨습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스스로 영적인 것을 이야기해도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늘 선한 마음을 유지하고, 늘 성화와 완전을 향해 
달려가기를 힘쓰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닮아가려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주간 많지는 않지만 주중 전도대원들이 전도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도, 
그 일에 마음을 담아서 최선을 다하고 돌아오는 얼굴과 목소리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새벽을 생명처럼 여겨 최선을 다하여 희년을 향한 제6차 1만 시간을 위해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기도의 능력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인가를 보게 하셨습니다. 평소 작은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자의 착한 마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최근에 개봉된 우리나라 역사물 영화 중에 ‘역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용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대사가 나오는데,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말씀과 연관하여 영상을 소개해 드리는데 마치 그 영화의 장면이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아서 저는 개인적으로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영상자료]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주로 어떤 말을 많이 사용하나요? 우리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나요? 
둥글고 원만하여 사람들에게 두루 기쁨을 주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평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인가요? 작은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가요? 새벽을 지키는 일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전도하자고 하는 일에, 희년을 향하여 함께 기도하자는 일에 우리는 얼마나 마음을 담고 
있나요?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 그 있는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자의 선하고 착한
 마음을 하나님을 귀하게 보십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좋은 나무가 되십시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모두 좋은 나무가 되기를 원합니다. 작은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착한 마음을 주옵소서. 그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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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일 2014.10.20 16:11:31
아멘

하나님의 은혜에 기쁨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며 나아가오니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혀 주사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의 사랑으로
성령에 열매 맺는 한서믿음의 가족 사랑에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언약 약속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
주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오며 우리를 올바른 믿음의 길로 인도하소서
때에 따라 주어진 말씀의 능력안에서 귀를 기울여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며
주님사랑안에 목사님과 지도자님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하나되어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히 낮은 자로 한서교회를 섬기며 충성하게 하시어
마중물 성도로써 직분자의 소명과 사명을 감당케하소서 새 힘을 부어 주소서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이웃과 함께 사랑의 나눔과 섬김으로
주어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에게 진리가 되시며 부활과 소망이 되시는 거룩하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재선 2014.10.21 10:42:40
늘 한결같이 말씀에 반응을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신 코멘트의 말씀 힘이 되고, 설교를 더 잘 준비하여 전해야겠다는 도전도 됩니다. 권사님이 늘 소망하시는 것처럼 예수님 많이 닮아 가시를 기도합니다.
고찬일 2014.10.21 11:10:35
댓글을 올려주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주님의 뜻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히 낮은 자로
주님의 은혜와 진리안에 섬김과 섬김으로 충성된 일꾼으로
주어진 작은 일에도 감사에 감사가 넘치게 하옵시기을 늘 기도합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삶에 작은 일에도 찬양이 늘 은혜롭습니다
아침에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