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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월 31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8.31 12:23 조회 1,195 추천 0
2014년 8월 31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Aug_30)
고난의 의미를 묻는 자들에게  출애굽기15:22~27

<형통할 때, 곤고할 때>
 어제 박명옥 권사님의 조촐한 칠순 축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김환규 권사님의 가정에 큰 딸 
김솔지 양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9월 달에 예약되어 있는 결혼식이 4건이 있습니다. 그중 어느 토요일은 
결혼식 2가정 그리고 저녁에는 돌잔치까지 있어서 그야말로 그날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야 합니다. 
토요일에 바쁜 것은 목회적으로 부담인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한서의 가정에 이렇게 축하해 줄이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치 않는 병과 사고로 인하여 수술을 받고 
회복 중에 있는 성도가 있습니다. 수술을 앞 둔 가정도 있습니다. 아직 확실하게 더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 양총재 목사님이 대장암 2기 혹은 3기로 오는 9월 2일에 수술을 받으셔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적잖은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자식이 아파 
부모로서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중보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주보를 보시고 참고하여 기도할 때마다 먼저 고난의 의미를 묻는 자들을 향한 특별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노래하고 춤을 추다가 우는 사람>
 오늘 본문의 말씀 출애굽기 15장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노래는 흥을 돋우고
 결국 그 흥은 춤으로 표현하게 합니다.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웠을까요? 바로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니 한순간 노래를 그치고 모세에게 
원망하며 탄식하는 백성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순식간에 그들의 노래와 춤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노래와 춤을 한순간에 멈춰버리게 한 시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지 꼭 사흘이 되던 
때였습니다.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하루에 20Km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사흘 동안 60Km를 걸어서 도착한 곳이 마라였습니다. 거기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심한 갈증을 느낀 그들은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쓴물이었습니다. 먹을 수가 없어서 다시 
토해냈습니다. 그들은 잠시 주저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합니다.  
불과 며칠 전만해도 노래하고 춤추며 기뻐했던 백성들은 막다드린 고통 앞에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인 동시에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고난의 상황 앞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의 양면성>
 아침 경건의 시간에 교역자와 상근자들은 요즈음은 욥기서를 보고 큐티 합니다. 고난에 대한 두 가지 
내용에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그 하나는 고난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전문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 36장에 보면 욥의 친구인 엘리후는 자신이 하나님에 관하여, 그리고 고난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인 
양 말을 합니다. 자신의 지식이 정당하고 온전하다고 자신의 지식을 뽐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욥은 
하나님을 찾지만, 멀찌감치 서 있는 엘리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고난당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게 됩니다. 막상 고난에 처하면 욥처럼 
하나님 앞에 질문하고 항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자를 섣불리 가르치려 들면 안 됩니다. 그냥 
그들의 곁에 있어주려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가끔 어깨 한 번 두들겨 주고 손 한번 잡아주면 되고, 
진심을 담아 기도해주면 됩니다. 고난을 대처할 수 있는 이론과 지식을 몰라서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라고 주신 고난이기에 아파야 합니다. 그 아파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알게 하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내가 아프기까지는 결국 남의 일입니다. 아픔을 경험한 자만이 아픔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함께 아파하는 자로 있어주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난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어떤 사람은 더 악해지고 더 
망가집니다. 반대로 교만한 자신을 성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느냐, 더 성숙하느냐 라는 상반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지금 아파하고 있는 우리 한서의 식구들이 고난이 주는 고통을 과정을 거치면서 고난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을 찾고, 성숙한 사람으로 성화되어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합니다.  

 첫째,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는 시험과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모두 경험했겠지만,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고 시험이 기다려지고, 내 인생에 시험처럼 기분 좋은 일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은 필요 없다. 시험을 없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입니다. 시험을 즐기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없습니다. 
학생은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래야 그 시험을 통해 자기의 객관적인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보완할 때 그 학생은 성장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떤 의도로 시험하셨던 것일까요? 그들은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 그들은 마라의 쓴물을 마시고 맙니다. 여지없이 그들은 철없는 백성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어떤 
상황에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시험에 합격했더라면 광야를 유리하지 않고 일주일이면 갈 가나안에 직행했을 것입니다.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 가운데 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그 분이 주시는 복을 경험했고, 신앙을 갖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동기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사실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거나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 차원을 넘어서 그 분이 해 주신 것 때문에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내가 준 복 때문에 사흘 전에 춤추고 노래했는데 그 기적이 계속되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도
 너희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광야에서, 이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나를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니?” 이것을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끊임없이, 합격을 받을 때까지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쳐올 때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성도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고난의 양면성 중에서 더 성숙한 방향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둘째, 고통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고통이 복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통을 통해서만이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반응을 보인다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이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마라의 쓴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그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단물이 얼마나 맛있었을까요? 쓴물이 아니고 단물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쓴물과 단물을 비교하기 위하여 단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마도 단물은 우리가 지금 먹는 
일반 물일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물이 단물로 느껴진 것은 쓴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지요. 인생의 쓴맛을 본 사람은 지금의 아무 일 없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압니다. 
그러므로 쓰디쓴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일이 없다고 느끼고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이라는 것을 아파야, 없어봐야 아는 것입니다.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축복이 비로소 
축복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보이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안 좋은 
물을 먹은 자들의 염려가 있습니다. 혹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와 걱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10가지의 재앙을 본 자들입니다. 그러니 병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의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을 권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가 염려하는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비전을 전하십니다. 그리고 강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하나님의 치료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치료함에 있어서 의학적인 
방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도록 가르치신다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물속에 던짐으로 고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비슷하게 여리고에 있는 물을 
고치시기 위해 엘리사에게 소금을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또 히스기야를 고칠 때 이사야에게 무화과 
반죽을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비위와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했습니다. 현대 의학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치료의 방편입니다. 이것을 잘 선용하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의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라의 쓴물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비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마라의 쓴물을 경험했기에 단물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의 
고쳐주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담으신 비전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 마라의 쓴물은 변장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복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고통 저 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축복의 자리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의 기적을 경험 한 후 하나님의 비전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비전이 가벼운 약속이 아니라는 것을 엘림을 주심으로 확인시켜주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밖에 되지 않습니다. 엘림은 사막의 오아시스입니다. 하나만 있어도 
소중한 물샘이 12개나 있습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나무 한 그루도 보기 어려운데 무려 70그루의 
종려나무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엘림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다 끝장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엘림이 있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최후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아침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마라의 쓴물을 경험하는 상황에도 든든히 붙잡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엘림도 준비하시고 가나안도 준비하십니다. 지금 안 보인다고 
엘림이 없고, 가나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신뢰와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기적을 베푸시고, 비전을 주시고, 엘림을 주시고, 가나안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조금 있으면 추석 명절이 다가옵니다. 명절 때 우리 부모님을 뵈면 제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몰래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자식은 지금 가장 힘들어 하는 자식입니다. 한서교회 
담임목사로서 늘 가장 많이 마음이 가는 곳은 지금 고난의 때를 보내는 교우들입니다. 새벽마다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지금 
고난의 의미를 묻는 성도들에게 오늘의 말씀이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고난의 양면성에서 더 나빠지는 쪽으로 가지 말고, 오늘 주신 말씀을 부여잡고 더 나은 쪽으로 
서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시험입니다. 잘 통과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변장된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최소한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치료자가 될 것입니다. 엘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
 지금 너무 힘들게 어려운 때를 보내며 고난의 의미를 묻는 자들에게 오늘 말씀이 진리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로 들리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사랑하게 하시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고난 속에서 기적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전에 들을 수 없었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볼 수 없었던 엘림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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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일 2014.09.01 13:41:42
할렐루야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란 날에 피난처 심이니이다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니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59:16~17)

하나님의 은혜아래
아름다운 한서교회에 기름부어 세워주신 귀한 종
담임목사님을 주님의 권능의 오른 손으로 붙드시어 하나님 말씀을
귀를 열어 세밀히 알아 듣게 하시며 깨닫게 하시고 엘림을 보게 하시니
주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에 진심을 담아 섬김에 섬김으로
온성도가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충성하며 헌신하며
이웃과 함께 서로 서로 믿음과 소망 사랑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퍼져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 믿음의 능력안에서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감당케 하시며
인내케 하소서 강한 새힘을 주소서
여호와 라파 치유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 승리의 하나님
임마누엘 하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 높이어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