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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월 2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6.29 12:24 조회 1,419 추천 0
2014년 6월 2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Jun_29)
팔이 밖으로 굽으시는 하나님   사도행전10:24~35

 세월호 침몰사고에 대해서 아직도 진상 규명이 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 세월에 묻혀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앞섭니다. 그 중에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검찰과 경찰의
 능력입니다. 청해진해운의 실질적인 운영자인 유병언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그의 행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조소가 나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말씀드린 대로 선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에 있는 선원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나왔다는 것, 
그것도 부상당한 동료 직원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했다는 것은 상식을 갖고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짐작하는 바가 있지요. 바로 구원파입니다. 구원파에서 유병언을 신적인 
존재입니다. 그를 비호하고 피신하도록 돕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바꿀 만큼의 충분한 가치와 
신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방패막이로 기꺼이 감옥에 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선장과 선원들의 이상한 행동은 그들이 믿는 교리와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바라보는 것 이상입니다. 쓰레기로 
봅니다. 어느 연예인이 한 때 ‘쓰레기’라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는데, 설교를 준비하면서 혹시 이것도 
구원파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상한 선장과 그 일당의
 눈에는 자기들 외에는 식당에서 일하는 임시직 직원들과 승객들은 쓰레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감신대 종교사회학 이원규 선생님이 [한국교회의 사회학적 이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원래 종교적 정체감의 확신이 커질수록 자신의 세계관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게 되고 따라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로부터 타인을, 자기 종교로부터 
타종교를 분리하는 작용이 있게 된다. 이 분리 현상이 우월주의와 결합될 때, 세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 
첫째는 자기 종교 밖의 사람들을 저주의 대상이나 적으로 여기는 단죄주의, 둘째는 타종교인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지닌 지배주의, 셋째는 타종교인들을 자기 종교의 세계관으로 계도하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여기는 후견주의가 그것들이다. 경직된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은 타종교인들에게 단죄의 
태도를 보임으로써 반지성적 태도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반지성적 단죄주의는 곧 
사회분열과 분쟁을 야기시킨다.”  이런 태도는 결국 내집단은 연대감으로 타 집단은 적대감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구원파와 관련되어 있는 자들의 비정상적인 양태를 경멸하면서도 혹시 우리 안에도 이와 같은 
배타주의와 집단적인 이기주의, 개 교회주의 모습은 없는지? 교회 밖에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바라볼 때 
우리들이 구원파를 바라는 보는 비상식적인 그들만의 천국을 누리는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비추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전에 읽던 책 중에 기독교 지성인을 대표하는 한완상 선생님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
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그 책 중에서 ‘팔이 밖으로 굽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소제를 찾았고, 오늘 그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종교에 열심히 있는 신자일수록 그들의 하나님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옛날 
유대종교에 열성이었던 신자들처럼 말입니다. 종교적 선민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그들의 하나님을 
배타적인 신으로 믿고 싶어 합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그 앞이 안으로만 굽으실까요? 온갖 사이비 
종파주의자들이 굴을 파거나 숨어 살면서 종파적 이기주의를 극대화하는 것도, 그들의 하나님이 종파적 
신이기에 그 팔은 항상 안으로 굽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팔이 밖으로 굽으신다는 것을 구약의 두 가지 
사건을 들면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이방 여인 사렙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독한 가뭄의 때에 하필이면 이방의 과부였던 
사렙다 여인에게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니다.(왕상17:8~24). 그리고 사렙다 
여인의 아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되었는데, 그 아이까지 살려내셨음을 고향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이방 장군 나아만의 
한센스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두 구약의 이야기를 고향 사람들에게 들려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만 돌보시는 편협한 종족의 신이 아니라, 누구든지 올곧게 살려는 사람들을 돌보시며, 특히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경멸받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만인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팔이 밖으로 뻗으신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포함해서 선지자들은 고향에서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환영받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선지자들의 팔은 밖으로 뻗는 하나님의 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양팔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밖으로 쭉 뻗은 사랑의 팔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영광만을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에서 
‘자기’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중심주의, 독선적 이기주의를 뜻합니다. 이 이기주의와 
편협한 독선주의로 안으로 웅크린 팔을 십자가 위에 얹고 쭉 뻗어 너와 이웃을 향하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희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민족을 향하신 보편적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초대교회를 초대교회답게 만든 
두 가지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스데반의 순교 사건입니다(행7). 초대교회 젊은 집사 스데반을 헬라인입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헬라파 초대교회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간의 충돌에서 빚어진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용기 있는 말씀 증거의 핵심은 유대 조상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해왔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습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까지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갈면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죽기 직전에 스데반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감동적인 광경은 부활하신 주님이 서서 스데반을 격려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헬라 청년 스데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당신의 팔을 뻗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안으로만 굽는 종족주의, 지역주의, 개교회주의 팔이 결코 아닙니다. 

 둘째, 오늘 본문의 말씀인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입니다. 고낼료는 이방인 군이었습니다. 로마군 
군대의 장교입니다. 그런데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고, 기도하며 늘 구제와 자선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베드로를 모셔오라는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베드로는 욥바의 어느 
집 옥상에서 깊은 묵상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그는 하늘에서 온갖 더러운 짐승들로 
가득 찬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천사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는 그 명령에 단호히 불복합니다. 그때 천사가 세 번이나 강조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러자 베드로는 유대중심주의 정결 신앙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종족주의의 갇혀 있던 우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편협한 종교적 
우상이 허물어지기 않았다면 초대교회는 결코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명령대로 이방인 고넬료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것은 큰 결단이었습니다. 팔이 
안으로만 굽던 유대인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에게도 팔을 쭉 뻗는 만민의 하나님께 베드로는 성큼 
나아갔습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내린다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확인한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교회 탄생의 기초가 되었고,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근거가 
되었고, 복음이 확산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둘 다 푸짐한 상으로 가득 찬 잔치와 같은 곳이랍니다. 두 곳의 
모든 사람들은 팔에 막대기가 묶여 있어서 팔을 굽힐 수 없다고 합니다. 같은 상황인데 천국의 
사람들은 얼굴에 윤기가 도는데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핏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넘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천국 사람들은 서로 대접하기를 힘쓰지만 지옥 사람들은 자신들만 먹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팔을 굽힐 수 없어서 자신의 입으로는 음식을 넣을 수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마음껏 대접할 수 있기 때문에 천국에선 서로가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기적인 지옥과 이타적인 
천국은 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천국이 되고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팔을 밖으로 뻗으며 살면 우리는 지금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남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한 흥미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발을 하라. 일주일간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여행을 하라.”고. 여행 
떠나서 일주일이 지나면 집에 오고 싶지 않으십니까? “한 달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새 집으로 이사를 가라.”고. 새 집의 감격은 한 달을 넘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결혼을 하라.”고. 허니문의 감동은 일 년 이상을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탈무드의 절정은 바로 이것입니다. “일생이 행복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이웃을 섬기라”
고. 그렇습니다. 평생을 행복하게 사는 가장 중요한 비밀 이것은 내가 이웃에게 팔을 뻗어 그 이웃을 
품고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문이고 증오는 벽’이라는 책의 제목이 있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며 살면 그곳이 천국이고, 자그마한 차이 때문에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고 살면 벽이 
생깁니다. 그 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두고, 나 스스로도 가두는 지옥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어느 교회에서 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원수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천국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목사님의 간절한 설교가 10분쯤 지났을 때 목사님은 성도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 얘기를 듣고 원수를 용서 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그러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신이 나서 다시 원수를 용서하라고 목 놓아 설교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 다시 묻습니다. 원수를 용서하신 분들 모두 손들어 주세요.” 그러자 이번엔 90%가 넘는 
사람들이 손을 들고 어떤 사람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 우는 모습을 보시며 목사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더욱 힘을 내서 설교를 계속했고,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교인 대부분이 
원수를 용서했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한 할머니만은 끝까지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왜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거죠?” “목사님, 전 원수가 하나도 없답니다.”
 그 대답에 감동한 목사님은 할머니를 단상에 모시고 어떻게 하면 원수가 하나도 없을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머뭇하던 할머니는 강단 단상에 올라와서 말했습니다. “그 개 같은 쌍년들이 모두 다 뒤졌지 뭡니까?” 

 더 이상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서 감사해야 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용서하지 못한 할머니 
권사님의 삶은 온전한 천국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정하셨던 갑자기 돌아가신 복갑순 권사님을 보니 제가 더 마음이 바빠졌습니다. 우리교회 
어르신들 하나님 부르시기 전에 적어도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미워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이 주님 
맞이하시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기회 주셨을 때, 지금 어렵지만 팔을 밖으로 뻗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서 온전한 천국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한서교회 담임목사로서 적어도 우리 한서교회 여기가 천국과 비슷한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진정으로 일생이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면 용서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해 팔을 뻗어 적은 것이라도 이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정기적으로 구제하며 
섬겨야 합니다. 구두닦이 선행천사 이창식 씨가 돈이 많아서 기부한 것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신 ‘어려울수록 남을 도우라’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렇게 살아서 누구보다도
 불행했던 그가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감동주시는 대로 결심하십시오. 천국이 시작될 
것입니다. 행복이 따라 올 것입니다. 팔을 밖으로 뻗으십시오.

<기도>
  팔을 밖으로 굽히신, 밖으로 뻗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주셨고, 천국을 누리며 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팔을 밖으로 굽히며, 뻗으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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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2014.06.30 10:08:14
팔을 밖으로 뻗으시고 나같은 사람까지
주님을 알게하신 멋지신 우리 주님
한서교회도 밖으로 밖으로 뻗어나가게
도와주심을 기도합니다
최재선 2014.07.01 09:59:12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전한 반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목사로서 감사하구요..우리 잛은 팔이지만 힘모아 밖으로 힘차게 뻗어봅시다.^^
고찬일 2014.07.01 10:32:32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총이 목사님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늘 한결 같은 주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앞에 순종하며 겸손히 낮은자로 엎드리어
섬김으로 헌신과 봉사와 충성으로
주님의 몸되신 한서교회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온 성도가 하나되어
은밀히 행하시고 이루시며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를 부여 잡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우리 믿음의 지경이 넓게 펼쳐지며 깊어지기를
소망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튼튼히 붙잡고
천국복음이 이땅 망원동위에 온전히 이루어져
회개하고 돌아와 날마다 교회부흥의 역사와
기쁨이 충만히 넘쳐 흐르길 기도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오시옵소서 화평의 왕이여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소서
구원의 주
구속의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