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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6월 2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6.22 12:21 조회 1,346 추천 0
2014년 6월 2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Jun_22)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로마서8:31~39

 법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증인 심문과 최후의 변론에서 드러나는 검사와 
변호사의 긴장감 넘치는 대결 그리고 배심원과 판사의 최종 판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범죄와 법이 존재하는 한 재판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법정이라는 공간은 인간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재판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지도자 모세가 광야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백성들의 송사를 듣고 
해결해주느라 지쳐있을 때 장인 이드로가 여러 명의 재판관을 임명하여 역할을 분담할 것을 제안하는 
이야기가 생각날 것입니다(출18:13~26).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놓고 다툴 때 지혜롭게 판결하여 진위를 가렸던 솔로몬 왕의 이야기 역시 
유명합니다(왕상3:16~28).
  시편 72편의 시인은 왕에게 주의 판단력과 의를 내려주셔서 그가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시72:1~4). 그것이 왕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을 심판할 성도들이 서로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 
법정으로 가지 말라고 충고한 것도 법정에 관련하여 생각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고전6:1~11)

 사도 바울이 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하나님의 법정이 등장합니다. 아주 짧고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재판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이 재판은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33절에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의롭다 하신 이’로 
지칭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재판을 진행하시는 방법이 아주 특이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32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판사의 절대적인 위엄과 
힘으로 유?무죄를 선고하시기 전에 말없이 자기 아들을 내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었다는 말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던 아브라함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대신 내어주고 그 결과와 영향력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재판, 이런 재판을 본 
일이 있습니까?
 죄에 대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피고인을 구명하기 위하여 그가 받을 죄의 값을 이미 치르고 나서 
재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려주기로, 용서해주기로 작정을 한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신 것, 그로 인해 우리의 죄가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어진 것, 
우리는 이것을 십자가의 비밀, 구원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지라 그 사랑에 스스로 져서 허리 굽히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목사로서 장례 집례 시 제일 어려운 것은 믿음이 확인되지 않고 돌아가신 경우입니다. 실제로 제가 
홍제교회 부목사 시절 당시 담임목사였던 서형선 목사님의 기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은 매사 
솔직하신 분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애매했던 고인의 장례식에서 기도하시기를 ‘오늘 고 000님이 
천국에 갔는지 안 갔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너무 솔직한 기도에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틀린 기도 또한 아니었습니다.
  대심방을 마치고 성도들의 근황을 묻는 중 정순자 권사님이 지금 94세 되신 친정 어머님이 요양원에 

계시는데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안타까운 심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을 넘겨서 이제는
 일반실로 옮긴 상태인데, 권사님이 꾸준히 돌보면서 복음 전했고 그 복음을 잘 받아들이셨다고 이어 
말했습니다. 그리고 임종 시 기도 중에 돌아기시를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에 대심방과 조찬모임과 이른 아침 수술환자 심방 등의 목외적 
스케줄이 정말 부담이 되었지만, 죄송스러워서 표현을 하지 못하셨지만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드리려
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간절한 바람을 모른 척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고 손영애 
장로님이 원장으로 섬기셨던 효도로 요양원으로 가서 정순자 권사님의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곡기를 끊으신지 오래 되셔서 많이 야위어 계신 모습으로 옆으로 모로 누워계셨습니다. 들으시든 
듣지 못하시든 하나님께, 그리고 어머님의 영혼을 향해 조용히 찬양을 드리고 짧은 말씀을 전하고 정말 
어려웠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저에게 주신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넓으신 사랑하심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받아주시고, 안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용납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제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목사로서 사명을 
다했다는 뿌듯함과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을 의지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감동을 주신 성령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위안을 얻은 정권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참 잘왔다는 생각을 하며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제 전도사님을 통해 보고 받기를 아침7시30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르신을 받아주셨다는 마음에 확신이 들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복효근 씨가 쓴 시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건기가 닥쳐오자 /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 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 누우를 찍어 포식하는 동안 /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 그 중 몇 마리는 저 쪽 강둑이 아닌 / 악어의 입 쪽으로 
발을 옮길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 그렇습니다. 우리는 넓으신 사랑 때문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빚진 목숨입니다. 물론 위의 시를 예수님의 십자가와 비교한다는 것은 조심스럽고, 무리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자기 목숨을 내어 놓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 그 
하나가 비로소 죽음으로써 모두에게 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넓으신 사랑으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우리 위하여’라는 말로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강해 설교자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는 로마서를 
성경 속의 다이아몬드로 비유한다면 오늘 본문은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확신과 소망, 위로와 최후 승리의 원천은 오직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에 있습니다. 그 사랑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점점 피치가 올라가는 교향곡처럼 
수사학적인 질문들을 반복해 사용하여 법정에서 최후의 변론을 하는 것처럼 재판을 받아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그 죄의 값을 모두 갚아 주시고 무죄를 선언하시는 그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누구도 정죄할 자가 없다는 확신에 찬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정죄할 고발 자가 없다면 본문의 이 재판정의 고발 자는 누구인가요? 바울은 세 
번에 걸쳐 묻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누기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33절), 누가 정죄하리요?(34절)’ 이 질문의 뉘앙스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모두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수사적인 것들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고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각각 일곱 개(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와 열 개(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그 외 피조물)의 
요인들을 언급하면서 그것들조차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혹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자신 있게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과 하늘 위에 있는 그 무엇도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 질문은 바로 나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고발 자가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를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 때로는 ‘나’를 세워주신 
그분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흔들리는 ‘나 자신’말입니다. 재판에서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완전히 녹아서 없어져야 하는 이 사람은 바로 
‘못난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편이신데, 내가 내 자신을 대적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튀빙겐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한스-요아킴 에크쉬타인의 묵상 글 한 토막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해달라고 그분께 기도하면서 내가 내 자신을 
가로막고 있다면 하나님도 어쩌시라는 말인가? 내가 내 자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면 다른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은 바로, 내가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서 아무 제한 없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나에게서 단지 어떤 것, 곧 나의 잘못과 죄의 짐뿐만 
아니라 또한 내 자신, 곧 죄인으로서 나라는 짐까지 덜어주심으로써 자기에게로 오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은 채’ 그분께로 갈 수 있도록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나를 그분에게서 갈라놓는 모든 것을 제거하셨다.”

 십자가는 제거되어야 하는 ‘나’까지도 제거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의 옛사람이 
함께 죽고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비밀은 제대로 이해했던 바울은 확신에 차서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이 당신 편이신데, 어떻게 당신이 당신 자신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17년 동안 저능아로 살았던 한 천재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빅터 세레브리아코프인데 15세 때 한 
선생님으로부터 “너 같은 바보는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 너는 저능아다. 장사나 하는 것이 낫겠다.” 
이 말을 듣고서는 17년 동안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떠돌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늘 생각하기를 
‘나는 저능아다. 나는 바보다. 나는 무능한 인간이다.’ 자기를 천대하고 박대했습니다. 그러다가 
32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IQ 조사하는데 가서 IQ조사를 해보니까 자기의 IQ가 161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능아가 아니라 엄청난 천재의 IQ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빅터는 천재처럼 
말하고 천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천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생각을 바꿨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말을 바꿨습니다. 행동을 바꿨습니다. ‘이제는 저능아가 아니고 나는 
천재적인 IQ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책을 썼고 특허를 내고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IQ 148이상의 사람만이 가입할 수 있는 맨사 
클럽의 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가둬 놓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빅토 처럼 자기부정, 자기비하, 자기혐오에 깊게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못났다. 나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바보다. 나는 멍청이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무능력하다.’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를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 
잘못된 시각, 잘못된 믿음, 잘못된 말, 잘못된 행동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그 넓으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못난 자아까지도 용서하셔서 옛사람은 장사 지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속박하고
 읍소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옛 사람인 못된 나 자신을 다시 우리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서 안 됩니다. 
과감히 보내 버리십시오. 죽은 자는 장사 지내야 합니다. 썩은 시체 부둥켜안고 살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의 모든 것 까지 십자가 사랑으로 제거해 주신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 때문에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하거나 정죄하거나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시편에서 다윗도 이 사실을 깨닫고 자신 있게 노래했던 것처럼 다같이 고백합시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용납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힘을 주십시오.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재판의 결과는 분명합니다. 무죄입니다.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넓으신 사랑으로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가 받을 죄의 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사랑은 못난 나 자신까지도 용납하시고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리니 
자꾸 벗어버린 옛 것을 붙들고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며, 정죄해서 불안과 우울 속에 살지 말고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한 확신 속에 찬양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날마다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못난 나 자신까지도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넓으신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허리 굽히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 사랑이 아침마다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날마다 깊은 
감사를 드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영적 자존감과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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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 2014.06.23 09:25:49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구원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