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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5월 1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5.18 12:21 조회 1,241 추천 0
2014년 5월 1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05_18)
네가 어디 있느냐? 창세기1~9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버스나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일입니다. 지난 종교개혁지
 순례여행은 종교개혁에 중심에 섰던 마르틴 루터와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영향을 주었던 얀 후스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것이 지난 여행의 테마였습니다. 그래서 독일을 중심으로 인근 체코나 오스트리아와 슬리베니아 그리고 크로아티아를 
순회하였습니다. 신기했던 것은 국경을 지날 때 크로아티아를 제외하고는 별 특별한 통관절차 없이 자유롭게 국경을 버스를 
타고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것은 핸드폰이 알려 주었습니다. 물론 가이드가 먼저 알려 주기 하지만 가끔 
놓칠 때가 있더라구요. 그러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그 나라에서 위급상황 때에 연락할 영사의 전화번호와 핸드폰 이용에 관한 
안내가 문자로 뜹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나라는 지나는 동안 우리 일행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세월호와 관련된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교회는 괜찮은지? 가족들을 잘 있는지? 
여행하면서 제일 염려스러운 일은 교회의 장례보고입니다. 우리 일행 중에 어느 한 교회에서 장례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행 중 내내 온통 관심은 장례에 있었습니다. 여행을 와서도 목사는 목사이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우리 교역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의 삶의 태도 혹은 결과는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 중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대전에 있느냐?, 부산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에 무엇을 두고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버스를 타고 있는 승객인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심이 강도이 굴혈이라면, 그가 거하는 곳아 아방궁일지라도
 그 공간 역시 강도의 굴혈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진리의 전으로 일구어진 자라면, 설령 그의
 처소가 초가삼간이라 해도 아름다운 성소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0~41)
마지막 날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두 남자는 같은 밭, 즉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남자는 데려감을 당하고 나머지 남자는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두 여인도 같은 공간에서 같이 
매(맷돌)를 갈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한 여인은 
건지시고, 또 다른 여인은 버리신다고 하십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록 공간은 동일할망정 그들의 중심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그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 사는가라는 문제가 
더 중요한것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가르키는 '하마르티아(hamartia)'는 본디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되어 있어야 할 
인간의 중심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원래 하나님을 향해 정조준되어 있던 인간의 중심이 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가?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의 중심은 도대체 어디를 
향해 무엇을 조준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사단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으라고 꼬드깁니다. 그것을 먹기만 하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유혹하면서 말입니다. 인간은 그 덫에 빠져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맙니다. 이유는 한 가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순간부터 하나님을 향해 있던 인간의 중심은 자기 자신을 정조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인간에서 자기 중심의 
인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즉 인간 중심이 지켜야 할 바른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그 직후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던지신 최초의 물음이 바로 자리에 대한 질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본문 8~10절 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손바닥만한 에덴동산 어느 공간 속에 아담이 숨어 있는지 모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공간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버린 아담의 중심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나를 향해 
정조준되어 있어야 할 너의 중심이 대체 어디로 향해 있느냐?" 
그러나 이미 바른 중심을 상실한 아담은 이 질문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결국 그의 답변을 공간에 국한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중심을 옮긴 것이 아담의 첫 번째 잘못이었다면, 그 중심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에 공간으로 답한 것은 두 번째 과오였습니다.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향한 자들의 상태에 대하여 일찍이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21절에서 23절 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의 중심엔 밝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온통 추하고 역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실종자들을 안전히 수습하지 못한 아마도 지금 동시대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을 잊지 못할 
사건이 되어 버린 이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요?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중심에서 벗어나 사단에게 그 중심을 빼앗겨 버린 결과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기본과 
원칙을 지켰더라면 이와같은 엄청난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본과 원칙을 몰라서 지키지 않았을까요? 아니지요. 기본과 
원칙을 무시해 버린 인간의 욕심과 욕망, 그리고 빼앗겨 버린 영혼 때문입니다. 
구원파에게는 죄의식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도 상관없습니다. 구원의 도를 깨달은 그들만 천국 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머지는 가족이라고 쓰레기 불과합니다. 
검찰의 조사 결과에 여전히 석연치 않고, 이해가 안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당연한 것은 그들은 미혹된 영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먼저 구하려고 하는 것이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들 중에는 의사자인 고 박지영 같은 사람들이 한 사람 정도는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담합을 
한 것처럼 한결같이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탈출했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이 
시대에 바른 복음을 전하여 건강한 영혼들을 세워야만 하는 사명과 책임이 더 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중심은 안녕하십니까? 지금 어디로 행해 있나요?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중에 '이빨사냥'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수형으로 사형당한 시체의 입으로부터 이빨을 뽑아내려는 
그림입니다.그림 속엔 죽은 사형수의 시체가 교수대의 줄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 앞에서 한 여인이 무서움에 떨며 시체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 팔을 뻗어 시체 입 속의 치아를 뽑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 그것도 교수형으로 사형당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시체라면 상상하는 것 조차 끔찍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왜 
무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한낱 시체의 치아를 사냥하려고 했을가요? 
고야가 살던 18세기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미신 때문이었습니다. 즉 사형당한 시체의 치아엔 신통한 힘이 있어 그것을 지닌 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미신이었습니다. 
고야가 그 미신의 내용을 소재로 '이빨사냥'을 그린 것은, 그처럼 하찮은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여인 한 명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당시에 모든 카톨릭 성도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당시 카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의 모든 
국민은 카톨릭 성도였습니다. 집집마다 성상으로 장식되지 않은 집이 없었고, 주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미사가 드려졌습니다. 
사람들은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자기들의 소원 간구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을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길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마치 시체의 이빨을 사냥하고 있는 그 미련한 여인처럼 말입니다. 고야가 
보기에는 그들이 참된 성도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중심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생가가하고 있으나, 
실상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 자기 욕망을 정조준하고 살고 있는 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즈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오늘 나에게도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진지하게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앞에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다고 생각하는 성도로서 우리가 다하지 못한 책임과 사명이 있다는 것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매고 있는 동안 사람들의 중심은 인간의 욕망과 사단의 미혹에 점점 침몰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되는 교회와 성도마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린 빠른 배는 더 빨리 파멸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중심, 자기 욕망을 정조준하고 사는 사람에겐 평강은 커녕 오직 불안과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그 끝은 파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느 공간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향하고 있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이 예배의 자리에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늘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십시요. 여러분의 중심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있게 
하십시요. 지금 내 중심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 중에 깨달아 지셨다면, 간단합니다. 돌이키면 됩니다. 
그 길을 가지 않으면 됩니다. 과녁을 다시 정조준하면 됩니다.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숨지 않고 당당하게 기쁨으로 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서교회와 한서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게 하시고,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일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기적인 욕망으로 기본과 원칙을 무시하여 파멸로 침몰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건져 주시옵소서. 우리를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을 떠나 욕망의 노예로 살다가 결국 파멸당할 저들을 살리라는 사명과 책임을 
주신줄로 믿습니다. 우리 먼저 바로 믿게 하시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살려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먼저 있어야 
자리에 있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한 주간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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