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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4월 13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4.13 12:22 조회 1,858 추천 0
2014년 4월 13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04_13)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마태복음27:27~31
 오늘 설교제목이 궁금하실 겁니다. ‘에케 호모’는 그림의 제목입니다. 라틴어로 ‘이 사람을 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후 더 이상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고 당시 유월절 전례에 죄수 한 
사람을 풀어 주게 되었는데, 그렇게 예수님도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군중들에게 한 말이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 빌라도가 한 말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군중들 앞에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서 계신 모습을 
군중들이 지켜보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에케 호모’라는 그림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슈테른베르크입니다. 슈테른베르크는 교회 요청에 따라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담은
성화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돈을 벌겠다고 누드(나체)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방에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 놓여 있었습니다. 모델 아가씨는 "저 그림이 무슨 그림이냐"고 
물었고, 슈테른베르크는 별 생각 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는 장면"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 모델 아가씨는 얼른 그 말을 받아 "우리의 죄라고요? 선생님의 죄도, 나의 죄도 대신해서 죽으셨단 
말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렇고말고요." 라고 대답하는 순간 슈테른베르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묘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 그 먹먹해진 느낌이 가시지 않은 채 하루 일과를 보냅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보낸 그날 밤, 낮에 자신이 대답했던 그 말이 자꾸 생각이 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책장 한 쪽에 박혀있던 성경이 눈이 들어왔고, 성경이
 보고 싶어졌고, 성경을 보는 중 눈과 마음을 머무르게 한 말씀을 놓고 묵상했습니다. 묵상 중에 낮에 경험한
 느낌 보다는 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끄심에 따라 두 손을 들고 기도하게 하셨고, 
기도 중에 눈물이 났고, 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강한 확신이 들기를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었다는 것이 마음으로, 입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그는 붓을 들어 누구의 요청이 아니라 스스로 주신 감동에 따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눈물이 났고, 그 눈물로 탄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갔습니다. 그래서 완성한 
그림이 바로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감동을 받은 프랜시스 하버갈 양은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라는 유명한 찬송시를 썼고, 
그의 그림에 감동을 받은 또 다른 사람 독일의 경건주의 모라비안교를 창시한 진센도르프 백작은 평생 주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고 외치는 빌라도와 
슈테른 베르크의 소리에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우리는 예수님을 죄인 중에 한 사람으로,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바라보고 있는가? 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이 결정되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로부터 조롱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유다의 배반에 의해 잡히시고, 심문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가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까지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가 있었습니다. 모욕, 
모멸, 조롱, 희롱 그리고 고통이었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감은 창세기 3장에서의 선악과를 따 먹은 죄와 더불어 
왔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긴다는 것은 수치이며 모멸이었습니다. 홍포를 입인 것도 예수님을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자색 옷이라 했는데, 자색 옷은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옷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장군으로, 황제로 만들어 놓고 황제와 장군 노릇 한 번 해보라는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가시관을 씌우고, 왕의 입법, 사법, 행정적 권세를 상징하는 홀 대신에 갈대를 들게 했던 것은 왕 노릇도 
해보라는 비아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고 장난으로 
경배하고, 침을 뱉고, 주었던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칩니다. 그 모멸감이 느껴지십니까? 참 못된 
사람들입니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말씀을 묵상하는 중 너무 속상해서 열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그 병사들이 
여기 있다면 당장 응징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인간의 죄악 된 실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의 잔인하고도 
극악무도한 모습이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옛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울산과 경북 칠곡에서 의붓딸을 학대해 숨지게 한 계모들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10년이 선고된 것에 대하여 
국민들이 분노했습니다. 죄질에 비하여 형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울산 계모 경우 소풍을 앞둔 8세 여자 아이들 
주먹과 발로 무차별로 여러 차례 때려서 늑골 16개가 부러졌고, 폐 파열로 인하여 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일간신문에서 언급한 그대로 그 아이는 하늘로 소풍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학대한 사건들을 보면 정말 인간의 악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멍든 자국을 없애기 
위하여 반신욕을 하라고 욕조에 집어넣었는데, 거기서 숨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외 훈육이라는 
명분하에 아파트 계단에서 자주 밀었고, 세탁기에 넣어서 돌렸고, 밤새도록 손을 들고 벌을 세웠고,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하였고, 강제로 청양 고추를 먹였고, 화를 참지 못하여 목 조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이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이런 참 
나쁜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구약에서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방법은 예배, 제사였습니다. 그 중에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용서받아 하나님과 소통하는 제사는 속건제, 속죄제, 대속죄제였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희생제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죽여 피를 내고 각을 떠야 했고,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는 부수어야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내가 죽을 것을 대신 제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신이신 하나님을 향한 화해를 요청하는 사건이 아니라 신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화해의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그 관계회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희생제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 
희생제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잡히시고, 심문 받으시고, 모욕과 고통을 받으셔서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이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참 나쁜 사람인데도 나쁘다 하지 
아니하시고 품어주시고, 용납하신 사랑입니다. 그것도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모욕,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사람이 죄로 인하여 고통 받을 수 있는 최악의 
십자가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당신 사랑에 스스로 지셨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위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신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끝장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을 사순절에 묵상하면서 참을 수 없었던 또 하나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무리들에 이어, 예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말없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벌써 신분을 밝히고, 십자가에서 멋지게 변화하여 뛰어내려 조롱하던 병사들을 한 명씩 응징했을 
것입니다. 복수할 리스트를 뽑아서 빌라도부터 군중들 그리고 제자들까지 멋진 반전으로 통쾌하고 드라마의 막을 
내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예수님이 겪으셨던 것 중에 아주 작은 일부의 모욕감을 느꼈던 일로도 소심한 
복수를 시작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도 할 것입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억지로 참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한 말씀으로 바다도, 바람도 꾸짖어 조용하게 
하셨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이 참으십니다. 말이 없으십니다. 몇 번의 반전의 
타이밍을 그냥 지나가십니다. 결국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습니다.    
 참 나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이 그냥 나쁜 사람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나쁜 
사람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삭처럼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모욕도 고통도 참으셨던 것입니다. 말을 아끼셨던 것입니다.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복음의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감동으로, 눈물로 바라본 슈테른 베르크는 복음의 사람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감동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진정성을 담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참 좋은 사람입니다. 참 신실한 사람입니다. 참 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감흥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 사람은 성화의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렸던 십자가
사건의 만남 이전의 슈테른 베르크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의무와 책임만 
앞서서 늘 예배도 사역도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하면 혼난다는 것을 알아 안 할 수는 없어서 억지로 하다 
보니 짜증도 나고 화도 납니다. 율법의 사람이지요. 
 슈테른 베르크처럼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할 때 율법의 사람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변화를 가져온 
십자가와의 만남, 참 나쁜 사람인 나를 그래도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종려주일을 지나 사순절의 절정인 고난주간이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가신 길을 우리도 걷는 중에 더 깊이 하나님의 사랑을 감동으로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고난주간 영성훈련과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마음으로 접고 있는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권합니다. 율법적 사람으로 머물러있기에 신앙생활이 공허가 메마르고 감동도 재미도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멀찍이 거리를 두고 있으면 우리는 내가 불리해지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나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속이는 가짜인 나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루라도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슈테른 베르크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안에도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기도>
 사순절,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참 나쁜 나를 보게 하시고, 그렇게 
참 나쁜 나를 용납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감동과 눈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은혜 받아 율법의 
사람을 넘어 복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찬양하며 살게 하시고, 그 사랑에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원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사순절, 한 주간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 가신 그 길, 섬김과 나눔의 길을 우리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새벽기도 하루라도 도전하라고 하시는 주의 종을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십자가 앞으로 한걸음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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