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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3.09 12:58 조회 1,449 추천 0
2014년 3월 9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Mar_09)
그 길을 따라 나서다. 마태복음16:21~29

 길을 가도 이 길을 잘 가고 있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찾아오신 이 길은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 행복의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평안합니다. 잘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오신 성도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고 놀라우신 은혜와 은총을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옆에 있는 성도님들을 서로 축복하며 인사하겠습니다. “이 길을 함께 가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을 종종 깨우치게 하십니다. 손영애 장로님이 전국 여장로회 임원들과 
말레이시아 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어제 아침에 안전하게 잘 도착하셨는데, 말레이시아에서 거의 같은 시간대에 중국 
베이징 행 비행기를 탄 사람들은 추락사고로 아마도 239명 다 죽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거의 10시간 이상 교신이 
두절되어 행방이 묘연했는데, 안타깝게도 예상한대로 베트남 영해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기기의 고정이나, 운전상의 
실수이거나, 길을 잘 못 들어섰거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하늘에도 길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중에 길과 관련하여 공감이 되는 글이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를 하늘에도 길이 있다.
새에는 새의 길이 있다. 바람에는 바람의 길이 있다. 
별에는 별의 길이 있다. 
강에도 길이 있다. 바다에도 길이 있다.
물고기에는 물고기의 길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길이 있다. 

 이렇듯 길은 삶의 메타포, 은유로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어딘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어느 때는 우리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갈 때도 있고, 어느 때는 희미한 목표를 가지고 갈 때도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어느 누구도 어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시간의 불가역성’이라고 합니다. 제 아무리 어제의 기억이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는 오늘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거꾸로, 역발상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의 기억이 아무리 참담하다해도 오늘은 새 삶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길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임을 믿기에 우리는 
그 길을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주님이 가신 그 길로 잘 가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성회 수요일, 사순절의 시작>  
  지난 5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 수요일이었습니다. 우리교회 사순절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공포하는 의미로 제가 
설교하며 사순절의 의미를 정리하여 말씀으로 전했습니다. 

 이 성회수요일의 날자는 그 해의 부활주일을 기준으로 역산하여 주일을 뺀 40일의 시작일이 됩니다. 부활주일은 
음력으로 정하게 되는데, 춘분이 지난 다음 만월(음력 15일, 보름)이 지난 첫 번째 주일을 부활주일로 정합니다. 부활주일 
날짜를 정하는데 음력을 사용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의 영향으로 바벨론에서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랍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태음력을 사용하였고, 그로 인하여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역법으로는 날짜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해는 4월 20일 부활주일이고, 오늘이 성회수요일이 된 것입니다. 주일을 제한 것은 주일은 금식일이 아니었고,
 부활주일을 기념하는 날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은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되어 현재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3세기 전까지는 부활절을 앞두고 2~3일 금식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사순절은 말 그대로 40일 간을 뜻합니다. 40일은 대략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되는 날로 역사적으로 6세기에 
그레고리우스 대제는 1년의 십분의 일의 시간을 온전히 바치라고 적극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번 주 속회공과에서도 사순절에 관련된 말씀을 
나누었을 텐데, 사순절의 의미와 4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잘 요약해 주었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역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해석합니다.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서 40일을 지낸 모세, 40년간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 40일 금식기도로 공생애를 준비하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특별한 훈련의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설명일 될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영성훈련에 입소했다는 마음으로 안일하고 나태한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정해진 규칙과 규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경건을 위한 연습과 훈련을 하는 기간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이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묵상하고 하루하루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고, 이기심과 욕망을 
절제하고, 죄와의 결별, 나눔의 실천, 신앙회복을 위한 수련, 훈련의 기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더 이상 관광객, 구경꾼으로 
살지 않고, 순례자로 살겠다는 순례의 기간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교회는 참회와 경건을 뜻하는 보라색으로 강단을 장식합니다. 그리고 그 참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전년도 종려주일에 흔들었던 나뭇가지를 태워 재로 만들어서 머리에 뿌렸고, 초대교회 때는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으며 
회개를 시작하는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성회수요일을 참회 수요일,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사순절을 의미와 유래를 설명한 내용 중에 40일이 1년 365일의 십일조에 해당된다는 설명이 올 해는 마음 깊이 
남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마음으로 40일간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온전하게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40일 동안만이라도 그 분의 삶의 한절이라도 닮고자 감히 
그 길을 따라 나서는 저와 한서의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삶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신 곳은 대개 갈릴리 마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갈릴리에 머무르지 아니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신앙의 중심, 영혼의 고향,
 정신의 뿌리였기에 늘 예루살렘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가고 싶어 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영광을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길입니다. 가시 면류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죽는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죽음 자체를 달갑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때가 되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시기로 결단하시고,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설명하셨습니다. 
 이해를 못한 제자들을 대표하여 용감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례하게 항변을 하면서까지 그 길을 막습니다. 동기는 달랐지만 
사탄처럼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호히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내 뒤’라는 표현은 바로 이어 제자의 길에 관한
 말씀인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이라는 표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복음서의 구도에 따르면 언제나 참된 제자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 ‘뒤에’ 서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뒤따라가는 자들임을 뜻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뒤로 물러서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선 제자의 삶에 대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갈릴리에서의 영광뿐만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선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일종의 동의적 평행법인데, 자기부인은 금용적인 삶이나 자기 훈육을 
의미한다기보다 자기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그 직위를 버리고 
인간의 형상을 입으신 것이 바로 자기부인의 전형입니다. 
 자신에 대한 주권과 사탄이 지배하던 옛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처럼 어떠한 희생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입니다. 거기가 어디든 묻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자의 취향과 만족을 
따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걸음이 제자의 걸음을 결정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죽음의 길까지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대학생선교회)를 창립한 빌 브라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쓴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는 전 세계적으로 25억만 부 이상 배포되었습니다. 그의 협력으로 찍은 
영화 [예수]는 660개 언어로 번역되어 40억 명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국에는 C.C.C 김준곤 목사님을 비롯 그 분의 
제자들이 한국교계의 중심이 될 만큼 큰일을 하였음에도 그의 무덤의 묘비에는 단 두 글자만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 
글은 바로 “예수님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의 족적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요즘 조금이라도 이력을 보태려는 목사들 하고는 차이가 많습니다. 

 독일 나찌 정권에 항거하다 순교하신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을 아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1945년 4월 9일 독일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를 기억하며 옥중서신을 꺼내 읽다가 감동적인 대목과 만났습니다. 
그는 미국에 머물 때 프랑스 출신의 젊은 목사와 나눈 대화를 들려줍니다. 두 사람은 삶을 통해 정말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프랑스인 목사는 성인(聖人)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본회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신앙을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신앙을 
배우는 자리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배운 신앙은 우리의 의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품에 자신을 던지는 
모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우리 자신을 던지기 위하여 우리가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의 출세와 입신양명에만 관심했습니다. 자신의 안일과 자신만을 위한 행복, 축복에만 관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다가 그것이 한낮 부질없는 꿈이라 느껴졌을 때 미련 없이 예수님을 따르던 길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정녕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인가, 제자인가?]라는 책에서 이 책을 쓴 카일 아이들먼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을 
언급합니다. 이제 그 길을 따라 나선 우리, 사순절을 살기 원하는 우리, 40일 만이라도 1년의 십일조 드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는 저와 여러분의 질문이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는 아무런 고난과 희생도 없는데 과연 내가 십자가를 제대로 짊어지고 있는 건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뭔가를
 잃은 적이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진 적은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승진을 포기한 
적이 있는가?, 예수님 때문에 휴가를 반납한 적이 있는가?, 믿음으로 인해 조롱을 받은 적이 있는가?, 꼭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복음을 위해 한 끼를 굶었던 적이 있는가?,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면 과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고서 답해 보라.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희생한 적이 있는가?” 희생이 
없었다면, 최소한 약간의 불편함이라도 겪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진단했습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기꺼이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걷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예수님 보다 앞서 걷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에 따라가는 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예수님의 노에로 살기로 선언하였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이라는 의미로 
주님으로 부릅니다. 
 모든 것에 길이 있다면, 사람이 가야만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깔 때 보람과 의미와 기쁨과 감사를 발견합니다. 
진정한 행복이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많은 실패의 반복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이 사순절, 예수님이 가신 길을 우리도 깊이 묵상하고 그 길을 따라가는 절기입니다. 40일만이라도 온전히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더불어 사는 순례의 기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었던 우리를 살려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주인이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요, 
종과 노예로서 가신 그 길을 우리도 예수님처럼 따라가게 하옵소서. 이 사순절, 40일 만이라도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 
제발 삶의 한절이라도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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