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2월 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2.02 12:47 조회 1,496 추천 0
2014년 2월 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Feb_02)
응답하라 2014  마태복음11:16~19
<축복>
  시작은 했지만 아직 발동은 걸리지 않았고 그새 어제의 결심이 가뭇해지는 것 같아 다시 자기 뺨이라도 후려쳐서 정신을 곧추 
세워야할 것 같은 2월의 첫 주입니다. 설 명절 연휴의 끝자락인 오늘 다시 일상의 리듬을 찾기 위하여 마음을 새롭게 다져야 
하는 한 주 시작의 첫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를 통해 분주했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정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힘차게 시작하여 승리하는 한 달, 승리하는 한 주간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오신 성도 
여러분 가운데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가끔은 아이들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웁니다. 설 명절을 맞이하여 반갑게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어색합니다. 이제 막 첫돌이 지난 어린 조카가 있습니다. 가끔 보니 자기도 어색한지 아는 척을 하면 오히려 더 피합니다. 그래서 
그와 소통하기 위하여 태블릿 피시로 ‘뽀로로’를 보여 주었더니 급 친해졌습니다. 왜 뽀로로를 아이들의 대통령인 ‘뽀통령’
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통해서 ‘응답하라 1994’라는 케이블 방송사의 드라마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2013년에 1994년을 
부른다는 의미로 ‘응답하라 1994’로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1994년을 배경으로 지방 사람들의 눈물겨운 상경기를 소재로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과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재미있고, 감동 있게 전합니다.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의 추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투박했지만 순수했던 사랑이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 잃어버린 첫 사랑의 풋풋함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는 평가입니다. 저희들은 잘 모르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당시에 입었던 옷이 다시 유행이 될 만큼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 시대 사람들이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에 제대로 응답한 것입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부르면 그 부름에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알고도 나를 무시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이해 못한 사람에게는 잘 설명해주면 되지만, 
의도적으로 내 인격을 무시한 사람에게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응답하지 않는 세대를 향하여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불순종의 태도가 문제라고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탁월한 교수법인 비유를 들어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진리를 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소통의 
달인이신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아이들의 놀이에 관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따라 시장에 갔다가 일을 보시는 동안 아이들끼리 
모여서 놀이를 했습니다. 주로 어른들의 생활상에서 자주 행하는 일들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에 행렬을 
이루어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을 응용하여, 그것을 놀이로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놀이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누군가가 결혼식을 풍자하여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들은 춤을 춰야했고, 반대로 장례식을 풍자하여 장송곡을 부르면 다른 
아이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에 아이들이 시장을 중심으로 가장 많이 했던 놀이였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의 놀이처럼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하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며 슬퍼해야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는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응답하라는 무전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비유를 설명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지나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심판을 선언하는 세례요한이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리나 죄인들하고 
자유롭게 식사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타락한 세속주의자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전통을 따르는 인물들이 아니었고, 자신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아에 대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도적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것에 상응하는 비유는 예수님과 
관련이 있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거나 울지 않는 것은 세례 요한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해도 그들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해석하는 율법의 기준, 그들이 세운 전통의 
기준들이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조금 안다고 하는 지식, 경험이 교만이라는 바리케이트를 쌓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지식에 만족을 주거나, 자기 기호에 맞는 것들만 취사선택하고, 심지어는 다른 것을 전하는 자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진리가 들어갈 틈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런 세대를 보시고 예수님이 탄식하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한국교회의 위기라는 말이 피부로 와 닿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그렇게 싫어했던 예수님 당시에 주류의 사람들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되 버린 것만 같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습니다. 영적인 체험도 이미 삼천 층의 하늘을 몇 번 다녀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 알고, 다 경험했다고 자위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진지하게 배우려는 마음도, 갈급함도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진지함도 사라져 갑니다. 예배 시간을 늦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공연 보러 오듯이 예배 시간에 커피나 차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다리를 꼬고 앉으며 순서마다 점수를 매깁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끝나면 나도 모르게 주보에 점수를 매깁니다. ‘내 점수는요?’하면서 말입니다. 설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기 입맛과 기호에 
맞는 메시지이어야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응답이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셔도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 종교지도자, 시대에 주류들처럼 예수님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은혜가 흘러갈 여지가 없습니다.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 불순종이 한국교회에 진정한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시에 주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는 이방인들과 비주류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돌들을 들어서라도 진리를 외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수하게 순복하는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을 
세우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십니다. 그 마음을 가진 자는 늘 눈과 귀가 열려있습니다. 수용의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순종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 이해하고 포용하고, 협력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명절을 맞이하여 가정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예배 순서 중에 갑작스럽게 저희 세대, 그 다음세대인 용준이 또래의 자녀들에게 특송을 
하게 했습니다. 갑자기 준비했지만 참 잘했습니다. 아이들이 준비한 찬양은 저는 목사여서 괜찮았지만 어른들은 조금 낯선 찬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 찬양이 그날따라 새롭게 느껴지고 있는 차에, 저희 아버님을 조심스럽게 살짝 뵈니 정말 감격해 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감격해서 심지어는 울컥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사실 그 찬양은 조금 리듬이 있어서, 그렇게 감성을 자극하는 찬양은 아니었는데, 
아버님은 눈물로 감동하셨고, 그 모습을 지켜본 저도 울컥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손자, 손녀가 부르는 찬양이니까, 열린 마음으로 찬양을 들으니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 자식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손들로 서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감격과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닫으면 눈도 멀고, 귀도 닫히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눈도 귀도 열려 모든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응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비전 트립’을 위해서 바자회를 했습니다. 순 이익금이 200만원이 넘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까? 우리 청년들이니까 마음이 열리니 지갑이 열린 것입니다. 저도 구두 닦으라고 해서 만원내고 닦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내 마음을 닫게 만들었던 교만과 불순종이라는 마음의 장애물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듣고, 제대로 보아서 제대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올 한해 나 개인에게, 우리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은 여전히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피리 불 때 우리는 춤을 춰야 합니다. 곡을 
할 때에 울어야 합니다. 조금 안다는 것, 조금 경험했다는 것 다 내어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고, 사역을 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진리를, 보석을 얻게 될 것입니다. 
 2014년에 예수님을 우리 모두에게 보내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에 응답하여,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써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열린 마음을 주셔서 예수님이 피리를 불 때 춤추고, 곡을 하실 때 함께 가슴을 치며 
우는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2014년 응답하라고 외치시는 주님의 메시지에 나와 우리 한서교회가 제대로 응답하여 새로운 축복의 역사를 써 나가는 한 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 2월 9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동영상에 음향이 저장되지 않아 설교문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 현재글 : 2월 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1월 26일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