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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4.01.12 12:28 조회 1,585 추천 0
2014년 1월 1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4_Jan_12)
복이 있는 사람  마태복음5:1~10

 시골 한적한 길을 지나가던 등산객이 길 옆에 있던 쪽문에 한문으로 ‘多不有時’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있지만 많지는 않다는 뜻인가? 누가 이렇게 심오한 뜻을 문에 적어놨을까? 분명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하신 분일 거야. 그 분을 만나야 뵈야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는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옆집에서 러닝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오셨습니다. ‘어이 거기서 뭐하는 
거요?’, ‘아 예, 여기 사시는 분을 좀 만나 뵈려구요.’, ‘엥, 거긴 아무도 안 살아’, ‘여기 한자 성어를 적으신 
분을 뵈려 했는데...’, ‘그거 내가 적은 거야’, ‘아 네 그러세요. 할아버님 이 글이 대체 무슨 뜻인가요?’, 
‘여기 별거 아니야. 화장실이야.’, ‘네 화장실이요? 여기가 화장실이라고요? 그럼 여기 적혀있는 多不有時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 참 다블유시(W.C) 다블유시 몰라. 어떻게 젊은이가 W.C도 몰라’    

 가끔 성도님 중에 제게 좋은 글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 오늘 설교와 연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매일 아침 당신에게 86,400원을 입금해 주는 은행이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계좌는 그러나 당일이 지나면 잔액이 
남지 않습니다. 매일 저녁 당신 그 계좌에서 쓰지 못하고 남은 잔액은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당연히 그날 모두 인출해야죠. 시간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은행과도 같습니다. 매일 아침 86,400초를 
우리는 부여받고 매일 밤, 우리가 좋은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버려진 시간은 그냥 없어져 버릴 뿐이죠. 잔액은 
없습니다. 더 많이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하지 못하면 손해는 오로지 당신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새벽기도회 시간에 하루를 감사로 시작하면서 ‘오늘은 그 누군가가 간절히 살고 싶어 했던 하루’라는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숙연해 지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는 말씀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
는 말은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아끼라’고 번역된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건져 올린다’는 의미입니다. 인생 백수를 살아도 진리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건져 올린 
시간만이 우리 인생으로 남습니다. 때가 악할수록 인생에서 건져 올릴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더욱더 귀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을 보게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 전에 타계하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일 
것입니다. 27년간 옥고를 치르게 한 자들을 향한 용서와 화해는 사소한 일에 평생 원수로 지내는 우리를 참 많이도 
부끄럽게 했습니다. “진실을 고해하면 보복하지 않는다.”고 자기를 박해하던 정적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었습니다. 
그 외 그분은 많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 명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교훈과 공감을 갖게 한 것은 그가 살아왔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명언 중에 몇 가지를 더 소개하면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결코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우리가 삶을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인생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위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냈는가 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인생을 이끌어왔는지 말해줄 것이다.”

 복의 의미를 ‘인생을 건져 올린다’는 말씀과 결부시켜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 참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 위에서 가르치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산상수훈이 이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신 바가 있지만,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설교의 전문이 
나와 있는 예수님의 최초의 설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첫 설교의 주제가 바로 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복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복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람들도 복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도 역시 복을 물질적인 창대와 번영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잘 나간다거나, 
크게 된다거나, 물질적으로 부자가 된다는 말씀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피하고 싶은 가난, 슬픔, 
굶주림, 모욕, 박해를 받는 것이 복이라는 낯설고 비상식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상식을 파기하고, 반문화적인 정의가 
참된 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전쟁이 여호와의 손이 달려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재물의 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인자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을 추구하며 사는 자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어거스틴이 그 옛날에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당신 안에 거하기까지 나는 늘 불안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라는 
말이 공감이 되고 동의가 되는 사람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행복이, 지속적인 행복의 
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팔복의 말씀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복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한 예로 팔복의 말씀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를 의지하려는 마음을 비운 것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에게 절망한 사람입니다. 경제적인 빈부에 관계없이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사람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요 화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되지 않고 무산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야말로 나 자신에게 절망할 때이고, 그때야말로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만 의지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돈으로 다 해결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복된 삶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는 것을 감사하는 것도 좋은 믿음이지만, 내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더 성숙한 믿음입니다. 
내게 없는 그것이야말로 나의 심령을 가난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빈 심령 안에 언제나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고, 가난한 사람의 소망은 하나님나라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전까지는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모두에게 부족함을 주셨나 봅니다. 인간은 모두 잘 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많으면 사랑이 
부족하기고 합니다. 지식은 있는데 건강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은 잘 크고 있는데 돈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인격은 
있는데 실력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인격이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필요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인생을 더 아름답게 산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네 살에 겨우 말을 시작했고 
일곱 살에 겨우 글을 배웠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초등학교 시절에 성적이 맨 꼴찌였습니다. 토머스 에디슨은 담임선생에게 
“12동안 교편생활 중에 이렇게 둔한 학생은 처음”이라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신문사 기자로 취직했지만 
편집국장으로부터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신문기자로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6학년 
때 낙제해서 학교를 일 년 더 다녔습니다. 
 반면, 베토벤은 32세에 귀머거리가 되었지만, 그 후에 주옥같은 제9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최고 
작가 세르반테스는 전쟁터에서 왼팔을 잃은 상이군인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는 대학교의 
인기 강사였으며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다 채워야만 복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오히려 더 큰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로 팔복의 마지막인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가 왜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는 말은 이 세상이 불의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려움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예언자들은 박해를 받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분명 일반 상식으로 볼 때 손해 보는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기에 그 길을 가는 자의 끝은 
천국입니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의와 타협한 잠깐의 부귀영화보다 영원을, 천국을 사는 의의 길을 선택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며 복된 자입니다. 하늘에서 의를 위해 산 자들에게 주실 상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니 지금, 오늘 
신앙양심을 지키고 사는 자의 가슴에는 언제나 천국이라는 복을 이미 누리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여 
얻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의 자리가 결국 복이 아닌 화의 자리인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느 묘비에 새겨진 글귀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 핍박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여전히 악하고, 미쳐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쳐가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의를 외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부터 먼저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보태어서 진실을 왜곡하면 안 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비도덕적인 
사회 속에 도덕적인 인간으로 살면 당연히 냉대와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감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 건 질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세월을 아낄 
줄 아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 옛날 시편 기자는 시편 73편 28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했는데, 바로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福(복)을 한자로 풀어 보면 ‘示’(보일 시), ‘一’(한 일), ‘口’(입 구), ‘田’(밭 전)이지요. 한자로 ‘하나의 입’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복은 한 사람이 자신의 밭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재물의 밭이나 출세의 밭을 보여 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무슨 밭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밭이 세상 것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큰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삶, 
애통하는 삶, 온유한 삶,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 긍휼이 여기는 삶, 마음이 청결한 삶, 화평케 하는 삶,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삶입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으로 건져 올려 질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을 받는, 복이 있는 사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막 시작한 2014년 매일 하루하루의 
세월을 아껴서 건질만한 것들이 많은 복된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서의 성도들이 복을 소원하며 이제 막 시작한 2014년의 세월을 아끼며 살아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정한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복이 있는 한서의 성도들이 가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곳이, 그들도 복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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