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방송

  • 서브 왼쪽

주일설교

12월 2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12.22 15:21 조회 1,472 추천 0
2013년 12월 22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Dec_22)
그 연약함의 신비  마태복음2:1~12

 진리와 평화와 기쁨과 희망으로 오시는 성탄의 은총이 사랑하는 한서의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 위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안녕하지 못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의 은혜로 온 누리에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유년시절 아련한 성탄절의 추억은 퇴색되어 버린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합니다. 풋풋한 사춘기 시절 성탄절 전야의 밤에 
나누었던 ‘선물교환’의 시간은 혹 마음에 두는 여학생의 선물이 걸리지나 않을까? 하는 기분 좋은 설레임을 갖게 
했습니다. 한 겨울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천사가 되어 부른 새벽 송에 이상하게 이 날은 잘 부르지 못한 찬양에도 
부르는 자들이 먼저 깊은 감동에 젖고, 천사를 기다리는 열린 마음으로 찬양을 듣는 성도들도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집 안으로 초대되어 따뜻한 음식과 선물을 받는 과한 대우를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탄의 추억 중에 백미는 바로 성극이었습니다. 매 해마다 성극에 어떤 배역을 맡느냐가 큰 관심 중에 
하나였습니다. 주로 저학년 때는 목자들 중 하나, 신하들 중에 하나, 그러다가 학년이 조금 올라가면서 조금 비중이 
있는 동방박사1,2,3 중에 하나의 배역을 맡게 되지요. 그러다가 고학년이 되면 주연급의 배역을 받게 됩니다. 그중에 
괜찮았던 것이 ‘헤롯 왕’의 역할이었습니다. 일단 대사의 양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연극의 역할이지만 왕이 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여봐라~’하며 사람들을 호령하고, 그의 말을 무서워 벌벌 떨려 지키려 하는 권력의 맛은 
꽤 달콤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상의 주연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연은 대사의 양도 적고, 힘도 없어 보이고, 늘 쫓기는 신세인 요셉과 마리아가 주연이었고, 대사 
한마디도 없고, 인형으로 대치되는 ‘아기 예수’가 진정한 주연이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첫 번째 성탄절의 풍경을 보면 당시에 주연으로 착각하며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헤롯왕이었습니다. 1절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셨다.”라는 간결한 이 한 마디 속에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이 주연으로 착각하고 그 권력을 마음껏 행세했습니다. 그는 
에돔 출신으로 로마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 왕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하던 권력을 가졌으니 행복해야 
했는데, 그의 삶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비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는 열등감이 
그를 늘 괴롭혔습니다. 자신이 권모술수로 왕까지 올랐기에 자신도 그렇게 권모술수에 왕위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늘 주변의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모두가 잠재적인 적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아내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들까지 죽인 것도 바로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 건축 광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가 남긴 건축물이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재건한 예루살렘 
성전, 마사다 산성, 궁전,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해 지중해 바닷가에 건설한 도시 가이사랴와 13킬로미터에 이르는 
수로교(水路橋)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을 때 그냥 지었을까요? 다 백성들의 고혈로 이루어졌고, 그 건축물을 
지을 때 당연히 백성들을 노역자들로 부렸을 것입니다.   
 헤롯왕은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 인물입니다. 권력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우리의 막연한 
통념을 깨고, 권력을 가진 자가 얼마나 남루하고 비루한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 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은 
음모, 술수, 비정함, 그리고 의심과 두려움입니다. 
  그런 자에게 별을 따라 새로운 왕을 찾으러 왔다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권력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헤롯왕의 자문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헤롯은 그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지를 캐묻습니다. 그들은 그 잔인하고 
교활한 헤롯의 심중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메시아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발적인 간신이 되어 헤롯의 
자문에 응합니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신학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들은 메시아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편에 섭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헤롯왕이 시대와 
역사의 주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은 권모술수로 살아온 
사람답게 은근한 말로 동방박사들에게 말합니다. “가서, 그 아기를 샅샅이 찾아보시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생각이오.”(2:8) 동방박사들은 이 겸손한 말 속에 숨겨진 비수를 눈치 챘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별빛의 인도를 받아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가뿐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이를 만난다는 기쁨에 
그들의 발걸음은 산들바람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아기 예수가 계신 곳에 이르러,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바치며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이 바친 선물의 의미를 캐묻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광경에 감동할 따름입니다. 나이 많은 이들이 갓난아기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세상의 유력자가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아기를 경배합니다. 물론 그들이 경배한 것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화육한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말구유에 누워있는 무력한 아이에게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보아내는 그들의 밝은 눈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성탄절 무렵의 풍경에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이 땅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만들어 나가는 연극의 주연은 세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자, 이방의 박사들, 힘없고 나이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가장 낮은 자로 오셔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의 형벌로 죽으신 연약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의 기생하여 신앙과 양심을 팔아먹은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약하지만 진정으로 
강한 자였던 놀라운 인물들은 출애굽기 첫 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십브라와 부아라는 히브리 산파들입니다. 이집트 
사회에서 불온의 낙인이 찍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반생명적 폭거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바로는 십브라와 부아를 자기의 음모를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합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잘 살펴서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라”(출1:16)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면전에서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인 태업을 눈치 챈 바로가 
그들을 소환해 “어찌 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고 다그쳤을 때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말합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권력에 아첨하는 간신뱅이가 되기를 거부하는 민초의 지혜와 용기를 봅니다. 대제사장들의 화려한 옷과 율법 
교사들의 권위는 히브리 산파들의 지혜 앞에서 빛을 잃고 맙니다. 

 이 세상을 치유하고 다시 살리고 구원하는 것은 가장 연약한 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진실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그의 조카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 못 채우고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정확히 910그램의 미숙아였습니다.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팔랑거리며 손바닥만한 크기로 세상에 나온 
아기,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던 이 여린 생명을 보며 그 신학자는 ‘세상의 모든 아기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구제금융의 한파로 언니가 운영하던 어린이집도 문을 닫고, 형부가 운영하던 회사마저 부도가 나 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생긴 아기는 복음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 같았다고 합니다. 낙태를 위해 병원 문 앞을 여러 차례 서성거렸지만 
언니는 차마 들어선 그 생명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렇게도 서둘러 세상에 나왔던 것입니다. 아이는 
미숙아들에게 올 수 있는 모든 합병증, 유리질막증이나 기관지 폐이형성증, 패혈증 등을 다 겪어내면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연단했습니다. 그 신학자는 말합니다. “우리 집안에 찾아온 복 하나를 대라면, 나는 주저 없이 ‘엄지공주’ 솔이를 
끌어당긴다. 솔이는 산산조각 날 위기에 처해 있던 언니 가정에 치유를 주러 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과 한숨에 빠져 
있던 그 가정에 화해를 주러 왔다.” 고 말입니다.
 그 연약한 생명을 돌보는 동안 솔이의 부모는 경제적인 위기와 정신적인 위기로부터 자신들이 치유되고 있음을 알았고, 
이러한 총체적인 위기는 부부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 갈라진 부부 관계에 화해의 새벽이 밝아 옴을 느꼈던 것입니다. 
물론 솔이가 건강하게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살다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현실에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솔이의 부모는 그 낯선, 그리고 두려운 현실을 용감하게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생명을 사랑으로 돌보고 보듬어 
안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결에 자기들을 사로잡고 있던 어둔 구름이, 그리고 비애가 사라졌음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 연약함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이들만이 그 귀한 것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우은영성도의 가정을 위해서, 얼마 전에 주신 새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임신 중독증으로 더 이상 나두면 엄마와 아기가 위험하게 되어 8개월 만에 태어났습니다. 정상적으로 엄마 뱃속에서 
8개월 자랐으면 괜찮지만 엄마가 아파서 영양을 제대로 공급이 안 되어서 870그램의 미숙아로 태어났습니다.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는데, 위에 말씀드린 솔이가 거쳤던 과정을 이겨내야 하는 숙제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이 솔이의 이야기를 전한 
것은 우은영성도의 가정에도 이 연약함의 신비의 은총이 동일하게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새 아가를 통하여 
우은영 성도의 가정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그동안에 잃어버렸던 소중하고 가장 귀한 것을 얻는 축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구원하는 힘이 세상의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것에 있는 것은 진정한 역사의 주연이신 
하나님이 그 연약한 것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세상의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부자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 세상의 주연이요, 주인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는 하나님을 찾는 자입니다. 겸손히 
두 손 들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순전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자와 
동방박사들과 힘없는 선지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들어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기적을 만들어 가십니다. 새로운 
드라마를 연출해 가십니다.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으려 했던 헤롯의 꿈은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방박사들에게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지시하셨고, 그들은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습니다. 주연은 헤롯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유는 진정한 주연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 3절의 가사가 부를 때마다 깊은 은혜가 됩니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연약한 나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역사의 주연으로 세우십니다. 역사의 주연으로 쓰임 받게 위해서 우리가 연약한 하는 일이란 경우에 따라서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겸손하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진정한 역사의 주연이신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와 함께 하시면 그 속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 연약함의 신비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이 주님이 오시는 자리 또한 연약한 자들 가운데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연약한 자의 삶의 한 가운데로 
오십니다. 연약한 나에게 오시는 주님, 그리고 연약한 이웃들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연약한 나를 겸손히 맡기시고, 
연약한 이웃을 찾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 너무도 황송하고 감사드립니다. 연약한 우리 더욱더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자와 함께하셔서 기적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시는 진정한 역사의 
주연이신 그 하나님이 연약한 나를 통하여도 오늘도 일하고 계심을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특히 이 성탄의 
계절에 연약한 자의 한 가운데 성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연약한 이들을 찾아 가게 하시고, 돌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e> 

 
▲ 이전글 : 12월 2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현재글 : 12월 22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다음글 : 12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