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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2월 15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12.15 13:33 조회 1,394 추천 0
2013년 12월 15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Dec_15)
선물, 하나님의 마음 에베소서2:1~10


 목사님이 정년이 되어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선교회에서 목사님께 은퇴선물을 사드리기로 했습니다. 
남선교회 회장은 목사님 모르게 사모님께 어떤 선물을 했으면 좋을지 여쭤보았습니다. 
사모님은 “발 디딤판이 있고, 뒤로 젖혀지는 안락의자가 좋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남선교회에서 
선물을 드리자 목사님은 무척 감격스러워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서 목사님이 남선교회 회장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 안락의자를 어디서 구입하셨죠?” 
회장이 묻습니다. “왜요. 목사님 혹시 그 의자에 무슨 이상이 있나요?”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너무도 기능이 좋아서 내가 쓸 것을 하나 더 구입하려구요.”

 기도를 많이 하는 어머니에게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세 아들은 모두 잘 되어서 생활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기도해 주신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여 어버이날에 선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어머니에게 비싼 외제 승용차를 한 대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둘째가 말합니다. “형은 쩨쩨해서 탈이야” 그리고는 강남의 아파트 한 채를 사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어머니는 별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셋째가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이 좋으신데 그건 걸로 
기뻐하시겠어?” 그리고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외우는 신통한 앵무새를 아파트 두 채 값을 주고 
사서 어머니께 선물로 보냈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께서 셋째에게 고맙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셋째야, 내 
소원을 아는 놈은 너밖에 없다. 내 몸이 요즘 허약해서 기운이 없었는데 어찌 알고 그런 선물을 보냈냐? 네가 
보내준 약닭은 푹 삶아서 잘 먹었다.” 

 몇 해 전에 보았던 신문에 소개된 ‘선물의 사회학’이란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이 글에서 밝히기를 선물의 
조건은 세 가지라 합니다. 첫째는 전달의 의도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점유 이전이 이루어져야 하며, 셋째는 받는 
이가 수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의 기능 가운데 으뜸을 의사전달이라고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눈에 보이는 물체에 
담는 것입니다.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다이아몬드는 청혼, 카네이션은 감사, 거북 모양의 물건은 장수의 
의미를 내포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고귀한 선물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고귀한 
선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 ‘영생’, 
‘영원’입니다. 
예수님이 낮고 천한 이 땅과 우리 가운데 오신 것도, 십자가에 제물이 되셔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유월’하게 하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세례를 반드시 거치게 하신 것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신 것도, 
성령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 것도 우리 모두에게 ‘구원’, ‘영생’, ‘영원’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었던 인간에게, 살 길 그것도 영원히 살 길을 알려주신 것만큼 더 크고 가치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하는 어느 선교사님이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라고 설명하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고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며 계속 반문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냥 값없이 구원을 주셨어요.’라고 설명을 하니까 그제야 조금 이해하는 듯 
하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가 옆에 있던 한 자매가 자신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아, 그러면 
구원이 제 진주 목걸이 같겠군요. 저를 사랑하던 애인이 저를 위해 진주를 따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 
목걸이는 그가 남겨준 진주를 가지고 만든 거예요. 제가 애인에게 공짜로 받은 것이지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선물이죠. 하나님의 구원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선물이란 말이군요.”
 그 자매의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도 퍼뜩 깨달았답니다. ‘그래 맞아! 구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야.’ 이 선물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 바로 구원, 영생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이 주신 선물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주신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사도 바울은 증언합니다. 오늘날 
구원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오해는 구원을 단순히 개선이나 개역의 수준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 나가고 예수 믿더니 사람이 좀 나아졌어!’ 라는 ‘보다 나은 인간’(better person) 이 되는 수준에서 
구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한 인격의 개선이 아니라 ‘새 인간’(new person),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는 것, 새로운 
존재로서의 부활이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구원과 관련된 어떤 사람의 간증의 내용에 매우 공감을 했습니다. “친구가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에 들어오다 보니 그의 집 개가 집 앞에서 
하얀 동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기 개가 옆집에서 기르는 애완용 토끼를 먹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황한 그는 토끼를 얼른 빼앗아 집안으로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런 다음 토끼를 
부엌으로 가지고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비누를 묻혀 막 씻었습니다. 그리고 향수를 뿌렸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뒤 뒷문을 나와 옆집으로 갔습니다. 토끼장을 들여다보니 정말 토끼장이 비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이 집 토끼였구나! 휴우’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토끼를 놓고 돌아왔습니다. 밥을 지새우고 
일터로 간 그는 그 일이 어찌되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웃집 토끼장 
옆을 서성거렸습니다. 
 이웃집 주인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기에 ‘잘 지내시죠?’하고 인사를 건네면서 동태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 주인이 토끼에 관해서 이야기를 꺼내놓았습니다. “3일 전에 우리 집 토끼가 
죽어서 일단 임시로 뒤뜰에 묻어놓았는데 어떤 놈이 그 토끼를 파내어 목욕을 시키고 비누칠을 하고 향수까지 
뿌려가지고 토끼집에 넣어놓았지 뭐예요.” 
 그 간증 자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죽어 있는 
시체에 비누칠하고 향수뿌리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은 것은 살아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죽었던 자가, 영적 시체였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 주셨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성경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에는 단절에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말입니다. 허물과 죄는 비슷한 개념이지만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허물’이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붙여놓고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가는 
것이 허물입니다. 반대로 ‘죄’란 내가 명중해야할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할 것은 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가 된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를 살리는 데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들어와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시체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라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로 오신 것입니다. 내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오시기를 요청하여 구세주로 영접할 때, 예수님은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새롭게 창조하시며 부활의 존재로 다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소유하기 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 일방적인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본문 2,3절을 살펴보면, 
우리는 세상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철학, 주류의 사상, 유행, 이 세상의 가치 등에 맹목적으로 지배를 
받으며 살아 온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미혹하게 하는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보다는 알 수 없는 영들에 쫓기며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육체’는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부패성을 말합니다. 쾌락과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 주님을 알지 못했을 떼 우리는 세상의 지배, 마귀의 지배, 육체의 지배를 일방적으로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순간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있게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되어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하시고 죽었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 이 하나님의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둘째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입니다. 
 10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부활이며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구원은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이 새로운 생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생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순종의 아들이 되고, 전에는 세상에서 절망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보좌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구원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선한 일을 위해 애쓰는 아름다운 생활 속으로 들어갑니다.
 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를 표준새번역에는 ‘우리는 그의 작품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새로운 작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진 새로운 작품입니다. 작품은 헬라어로 ‘포이에마’(poiema)인데, 여기서 영어단어 
‘poim’(詩)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10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시(詩 )다. 
너희는 하나님의 노래이다.’ 구원받은 우리, 예수님을 영점한 우리를 하나님은 새로운 작품으로 간주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시(詩)다. 너는 나의 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구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단순히 지옥만 
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노래 같은 인생, 시 같은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두레박]이라는 시집에서 친구가 보낸 글을 읽다가 자신의 소명이 단순히 시를 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살아가는’자가 되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친구는 이해인 
수녀에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수녀님, 우리의 작업은 시를 쓰는 것보다는 
마지막 삶의 핵심에서 시를 추구하는
작업이 되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시가 되어야 하겠지요.
하나의 시가 망가지는 한이 있더라도
더 익혀두고 더 묵햐서
어느 날 인류의 가슴에 불을 댕기고 밝히는
하나의 시가 남기를,
땅 속 깊은 곳으로 가서
더 순수하고 투명한 물을 퍼내십시오.
하나님은 그 아름답고 고독한 작업을
당신에게,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시를 만드는 아름답고 고독한 작업,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구원은 그 작업의 시작입니다. 
시를 만드는 인생, 노래를 만드는 인생, 내가 하나님의 시가 되고 하나님의 노래가 되는 일의 시작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은 그날부터, 우리의 인생은 아름답고 착한 시를 
쓰는 선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선물은 준 사람의 마음을 고맙게 받고 잘 쓰는 것이 바른 예의입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 주신 선물인 구원을 소중히 받고, 아름답게 키워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도리입니다. 선물로 주신 구원, 영생 감사히 받고, 하나님의 시로, 하나님의 노래로 살아가는 한서의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너무도 귀하고 소중한 선물 감사하게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하나님의 시로, 하나님의 노래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오시는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다시금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시고, 그 마음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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