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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0월 27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10.27 14:06 조회 1,401 추천 0
2013년 10월 27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Oct_27)
개혁, 처음사랑의 회복   요한계시록2:1~5

 독일 색소니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마리아와 아기 예수 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앞에 헌금을 많이 드리면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가 방긋이 웃고, 적게 
바치면 외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에 넘치는 헌금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신상 
앞에서 의심을 품는 일은 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던 그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종교개혁 이후에 
용기를 내어 조사해 보니 아기 예수 상에 줄을 연결하여 농간을 부렸음이 밝혀졌습니다. 단편의 이야기지만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는지를 알게 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당시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반박하는 95개 
조항의 공개토론을 제기함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496주년이 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당시 
카톨릭 교회는 변질된 성화신학의 바탕 위에서 공로를 얻게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루터는 처음 사랑과 처음 정신을 잃어버린 카톨릭교회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진리를 외쳤습니다. 
온갖 방해와 위협, 협박,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섭리로 새로은 교회,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운동과 모든 사회운동, 
그리고 심지어 자신에게까지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신은 지금 이 
시대에 교회와 개신교회 그리고 성도인 우리 자신에게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일곱별은 교회의 
사자들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신다는 
것은 주님이 교회와 교회 사자들은 온전히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교회의 진정한 주인 되시는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칭찬과 책망을 하셨습니다. 선한 행위, 수고, 
인내,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자칭 사도라 하되 시험하여 거짓을 드러낸 것,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시며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하십니다. 칭찬받는 것을 더 살려 나가야 하고, 책망 받는 것은 고쳐나갈 때 건강한 교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5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처음 행위’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4절 말씀에서 지적한 ‘처음 사랑’은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처음 믿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처음’이라는 헬라여 
‘프로토스’는 시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첫째’ 또는 ‘최고’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첫째 자리로 모셨던 그 때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등’이라는 글을 소개한 것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내 삶에는 언제나 하나님은 3순위로 밀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 내 삶에서는 가끔 필요할 때만 찾는 손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고 사랑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진정한 신앙개혁입니다. 이 처음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루터가 당시에 외쳤던 종교개혁 정신을 배우고 후대들에게 영원히 
계승해야 합니다. 

 첫째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당시에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이 신앙생활에 중심이어야 하는데 조상들의 유전과 교리가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대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속죄권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과 교황에게 도전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려고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앙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운동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카톨릭교회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루터는 이것이 
다 성경과 대치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해 드린 롬 1:17의 말씀을 붙잡고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수행이나 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관입니다. 타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의 수행이나 공로로 구원이 가능할까? 대답은 한마디로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의롭다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내 죄에 대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회개를 뜻하는 단어 ‘테수바 teshuvah’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돌아섬’
이고, 다른 하나는 ‘대답’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돌아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소리는 부드럽지 
않습니다. 거칠고 차갑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품에 쓰러졌던 탕자처럼, 우리도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무정해진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상의 쾌락을 구하느라 팔아먹어 텅 비어버린 우리 마음을 고쳐달라고 애원해야 합니다. 
낮아져 엎드리지 않고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기도가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르치고 고쳐주시기 위하여 
슬픔으로 때려 상처를 내시며,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우리를 죽이십니다. 

 진정한 종교 개혁은 제도 개혁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생명의 방향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의로워진 자들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위하여 날마다 성결을 유지하고 변화되기 위하여 삶 속에서 성화를 이루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성령의 열매도 맺는 것이고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출발이 하나님의 전전인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앙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직도 모르거나, 자신의 종교행위를 통하여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교회 안에 불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은 신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신앙운동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신 분이지, 마리아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지요. 
이것을 만인 제사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2:5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러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카톨릭은 
지금까지도 이것을 믿지 않아요. 그 예가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부가 죄가 
사하여 졌다고 선포해야 죄 사함 받는 거예요. 이것도 카톨릭의 이단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목사한테 와서 고해성사를 하십니까? 아니지요. 여러분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와서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으시지요.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집례 하는 
목회자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이 자성이든 타성이든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모두 너를 향하고 있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개혁, 진정한 회개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을 3등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주문 외우듯 습관처럼 말하면서도 언제나 예수님을 객이고, 나그네고, 손님으로 생각했던 나부터 먼저 돌이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지난 심야기도회 시간에 서정자 전도사님의 전도 간증을 통해서 저 뿐만 아니라 기도회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말씀 중에 21살 젊을 때에 부흥회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그 날에 목사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받치라’는 그 말씀이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면서 
당시 쌀 7가마 정도의 값을 주고 샀던 미싱기를 선뜻 드리기로 기도 중에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가의 
기계는 자신이 쓰고는 있지만 부모님이 사 주신 것인데, 가뜩이나 교회 나가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집안 
어르신들이 떠올라 염려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 주셨답니다. “내가 네 마음을 받았다. 그거면 됐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기는 그 순수한 마음을 하나님이 이미 받으신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셨기에 40세에 
남편 목사님 먼저 하늘에 보내시고 4남매를 훌륭하게 키우셨고, 지금도 현역에서 은퇴하셨지만 한서교회에서 전도사로서 
남은 생을 드리고 있는 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우리는 감동으로 공감했습니다.  

 평신도 지도자 국내 성지순례 잊지 못할 감동과 은혜를 받고 잘 다녀왔습니다. 순교지를 방문하는 내내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한 교회 교인 전체 65명이 순교를 당했던 야월교회, 아주어린 아이까지 포함하여 77명이 순교를 당한 
염산교회, 한 평생 신안 지역에 100교회를 세우고 극기야 순교를 선택한 문준경전도사님. 한국에서도 변방이요, 오지인 
남도 땅, 그리고 남도 섬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있었음에도 지금에야 알았다는 것이 너무도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했고, 예수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신 이들이었기에 기꺼이 
소중한 생명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순례의 길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느낀 것은 저와 비슷한 고백이었습니다.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결심하고 왔습니다. ‘작은 순교, 밀알 신앙, 일상 감사’하기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수확을 다 마치고 창고에 들인 후 
1년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일상의 감사가 아니라 1년을 묶어 드리는 절기가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신앙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한 해 동안도 인도해 주셔서 드리는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개혁, 그렇게 하나님 향한 사랑을 최고로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을 언제나 1등으로 최고로 사랑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이 진정 나의 주인 되신 것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 뜨거웠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총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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