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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9월 8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9.08 13:30 조회 1,505 추천 0
2013년 9월 8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Sep_08)
생각하지 않은 날에 누가복음12:41~48

관심이 있는 성도들은 아실 텐데, 우리 교회가 정말 깔끔해졌습니다. 교회 정문과 후문 쪽에 쓰레기 집하장이 있어서 
늘 지저분하고 악취도 많이 났었는데, 정문에 있는 집하장은 다른 쪽으로 이동 요청을 했고, 후문은 어쩔 수 없이 
허용하여 사용 중인데 깔끔해졌습니다. 교회 마당 아스콘 공사로 전반적으로 깔끔해진 것도 있지만 평소에 성실하게 
청소하시는 정문모 관리권사님의 수고로 더 깔끔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몇 해 전 올림픽 경기에서 역도의 이배영 선수가 근육경련으로 
쓰러지면서도 바벨을 놓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지요.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일하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그 속에서 깊은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고진하 시인은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닦고 또 닦으시는 팔순의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그의 시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어머니는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 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그 광경이 절로 그려지지요? 이 시가 우리 모두의 공감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우리 가슴 한 켠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주한 눈으로 보면 팔순 어르신의 행주질은 부질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의 행주질은 마음을 닦는 수행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장독대는 
성소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마음 닦음의 기회로 삼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초대 교회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자 긴장이 풀려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로 앞부분에서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간에 깨어서 맞이하는 종의 행복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그런 경고가 열두 제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지, 다른 제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주는 대신, 제자들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42절 말씀입니다.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청지기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종들을 맡기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시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이 질문 속에 답이 있지요. 이 질문에 담긴 속뜻은 ‘너희는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자기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기 종들의 관리까지도 위임한 것으로 볼 때, 이 청지기는 대단한 신임을 받은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잠언 25장13절 
말씀에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는 말씀처럼 그의 성실함을 인정한 주인은 그에게 자기 권한을 다 위임해 줍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식의 의미는 영적인 양식이든, 육의 양식이든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을 고려하여 위로와 소망을 주며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청지기는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를 주인의 부재로 
보았습니다. 주인이 곁에 있을 때에 청지기는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주인이 
사라지자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기보다는 숨겨져 있던 그의 본성이 드러났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작가 윤홍길은 [완장]이라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권력 의지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동네 건달인 종술은 양어장 
관리를 맡아 달라는 최 사장의 말에 시큰둥하지만 감시원이라는 완장을 채워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노란바탕에 파란 글씨로 새겨진 ‘감시원’ 완장을 두른 종술은 권력의 단맛에 빠져 도시에서 온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기도 하고, 
동창생들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읍내에 나갈 때도 그는 그 완장을 두르고 거리를 활보합니다. 결국 그는 권력이 얼마나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이 소설이 나온 때가 제5공화국이 시작되던 80년대 초반이니까 작가가 [완장]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권력의 무상함이 요즘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지 않습니까? 남아 있는 
권력의 힘으로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텨보려 하다가 더 추한 모습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도 ‘완장’의 맛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는 주인이 올 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폭군으로 
변했습니다.그는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을 아시나요? 여우가 
호랑이의 권세를 빌어 위세를 부린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청맹과니’라는 말을 아시나요? 한자말 '靑盲'과 우리말 뒷가지 
'과니'가 합쳐진 말로 '청맹(靑盲)'이란 '눈 뜬 장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청맹과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눈.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리에 밝지 못하여 눈을 뜨고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권력은 청맹과니와 같아서 자신이 돌보고 섬기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종이면서도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합니다. 권력의 맛은 중독성이 있어서 한번 맛을 들이면 좀처럼 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일단 권력을 손에 잡으면 
그것을 자기의 유익과 탐욕, 그리고 야망을 실현하는데 사용합니다. 국회의원들이 선거에서 패하여 일반인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권력 금단현상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권력은 그만큼 달콤한 유혹입니다. 
신학자 앨버트 놀런은 예수님의 권위와 바리새인의 권위의 차이를 인상적인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고, 예수님은 진리를 권위로 삼는다.”고 합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은 늘 자기 
기준으로 해서 남들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텅 비우고, 늘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참다운 카리스마는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우리가 전에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지위가 높아져도 우리가 알고 있던 이전의 
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음이 참 흐뭇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곧 자신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청지기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더라면 주인은 
더 큰 일을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맡겨진 일을 소홀히 했다면 당연히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을 맡겨보면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은 대충대충 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몫만 계산하고, 한 눈이나 
팔고, 먹을거리나 찾고, 불평불만이나 쏟아 놓는 사람들은 당장에는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바보입니다. 누구도 
그 사람과 다시는 일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자기가 하는 일에 혼을 불어 넣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고 결국 그 소문은 알려지게 되어 있고, 최종적으로 중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박용전 권사(김인숙 권사)님의 아들이 지금 41세인데, 외국기업인 LIG 기획실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경쟁 속에서 
가장 젊은 나이로 차장이 되었다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실력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하는 그의 
성실성이 결정적인 승진 발탁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성실로 시간을 채우는 것이 더디고 오래 가는 것 같지만 그것이 
성공의 경쟁력이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지금 맡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를 예수님도 칭찬하시면서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청지기의 또 다른 어리석음은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권세를 누리는 시간의 
달콤함에 취해서,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졌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zum-Tode)라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죽음이 자기 실존의 한계임을 자각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죽음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고 재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4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런데 조심스러운 말입니다만 지금이 
아니라고 누가 보증합니까? 요즘 유행하는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면 단언컨대 죽음의 시간을 그 누구도 확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정말 뜻밖의 시간에 우리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주인이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음을 자각하는 청지기는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인이 있는 듯 단정하게 처신하는 사람이 참 일꾼입니다. 

지난 심야기도회 시간에 어떡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적어도 기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성도라면 우리는 권세와 권능이 있는 기도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한마디의 기도로 일어나 걷게도 하고 뛰게도 하고 하나님을 춤추며 찬양하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비밀은 경건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성경은 능력과 경건이란 단어를 늘 묶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있는 기도는 바로 평소 경건하게 사는 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인데 합성어로 ‘유’(좋은)+‘세베이아’(두려움)가 합쳐진 것으로 ‘기분 좋은 두려움’, 
‘바람직한 두려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두려움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늘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리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의식’ 이것이 경건의 핵심입니다. 이런 의식을 갖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위해 나날을 성실과 신실로 채워가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지나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여전히 배고픈 
사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사람, 속에 있는 가슴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원하는 사람, 마음을 나누는 동무가 필요한 사람, 삶의 의지를 
상실한 사람, 배움에 목이 마른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으로 양식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이고, 
이 경건한 사람의 기도의 한 마디는 앉은뱅이도 일으키는 위대하고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성도들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설교하지만 이렇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하는 것 보다 내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마음을 담아 감당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사람의 하루를 보면 그의 한평생이 보인다고 하지요. 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다같이 골로새서 3장22~23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지니라.”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필요한 때에, 제 때에 적절한 것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자에게 걸 맞는 사명을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뭔가 줄 것이 다 있습니다. 벳새다 광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한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셨습니다. 없는 것을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생각하지 못한 날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까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갖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청지기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생각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저와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이 땅에 우리가 생명으로 존재하는 것은 명이 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불러 주셔서 청지기로 세워 주신 것에 감사하고 경건을 유지하며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옵소서. 생각하지 않는 날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덤덤하게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대할 수 
있도록 오늘을 보람 있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인생의 어둔 밤을 만나기 전 일 할 수 있을 때에 힘써 일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대에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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