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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설교 동영상입니다.

  • 글쓴이 최고관리자 날짜 2013.07.14 14:38 조회 1,597 추천 0
2013년 7월 14일 설교 동영상 입니다.
주일예배설교(2013_July_14)
말, 변화와 성숙의 잣대  야고보서3:1~12

<가벼운 입 무거운 입-일간지 에세이>
 최근에 실린 일간지 에세이에서 말에 관한 소재를 다룬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메시지를 대하면서 지난 세대가 고집했던 
소통의 지혜를 돌아본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입니다. 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톡 그리고 밴드라는 SNS가 거침없이 확산되어 소통의 시대에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소통을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지만 
오히려 그런 말들이 불통을 가중하고, 심지어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금언을 가슴에 담고 살게 했습니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며 
말 한마디의 가치에 대해 매우 무게 있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없다며 
가능한 입이 무거워야 한다고 어르신들로부터 배웠습니다. 말이 없어 고통스러운 것 보다 
말이 많아서 고통스러운 쪽이 더 크고 심각하다는 것을 지난 세대는 알았습니다. 말이 
없어 고통스러운 것은 답답함이 크지만, 말이 많아서 겪는 고통은 늘 답답함 이상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랜 옛시조의 시인은 스스로 입을 닫았습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그 가벼운 입 대신 무거운 입을 선택한 시인의 
지혜를 지금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화제가 된 가벼운 입에서 나온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축구계의 기성용선수의 
최강희 감독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국내파를 선호하고 유럽파를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았다는 불쾌감을 비아냥거리듯, 조롱하듯 어른인 최강희 감독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후에 사과를 했으나 축구협회의 징계수위에 대하여 솜방망이라는 일각의 
비난이 있는 상태입니다. 공인으로서 말의 책임성에 대해서 매우 큰 레슨비를 주고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방송계에서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에서 중국 여학생 2명이 사망한 사건에 관하여 
모방송사 앵커가 한 말입니다. 사고의 경위와 피해 상황을 보도하는 중 사망자가 중국인이서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의 분노를 샀고, 
그 분노가 점점 확산되자 외교부에서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박근혜대통령까지 직접 피해자 
가족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요즘 정계에서는 소위 ‘귀태(鬼胎)’발언 때문에 한바탕 여야공방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귀태라는 말을 소설에 나온 말을 인용하여 박근혜대통령을 비난한 것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여당에서 발끈했고, 극기야 이 말을 한 
야당 원내대변인은 사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가벼운 입으로 하는 말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우리는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배후에는 그 사람을 움직이는 언어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이 자주 
쓰는 언어가 있습니다. 그 언어가 지금 우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훌륭하게 산 
사람들의 배후에는 훌륭한 언어가 있습니다. 반대로 인생을 비참하게 산 사람들의 배후에는 
비참한 언어가 있습니다. 

 감옥에 있는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사람이 했던 많은 이야기 중에 뚜렷이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감자들 대부분은 어릴 때 자라는 과정에서 부모한테 
심한 욕설을 너무도 자주 들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들으면서 그들은 
그렇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으로 반응하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들은 
말에 반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축복하시고 사용하시기 위해서 먼저 언어를 
바꾸신다는 것에 오늘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언어를 바꾸심으로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은 인류를 흩으신 것은 언어의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자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언어를 하나로 다시 묶는 일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나뉜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된 사건이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 때 성령이 오심으로 
그곳에 모인 열방의 사람들이 한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새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어를 주심으로 교회의 기초, 
세계 복음화의 기초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늙어서 더는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 가정에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정성어린 대접을 받은 천사가 일년 후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선포합니다. 
그때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웃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고백합니다.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라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 찬 언어를 
입술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 사라의 입술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하나님은 지금 사라가 한 
말의 의미를 아시고 그의 언어를 바꾸십니다.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말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일 년 후에 말 그대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의 입술의 고백을 들으시고 사라의 언어를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생각을 사라의 마음에 넣어 주십니다. 그의 언어 체계, 말이 바뀌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갖게 되었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이삭이었습니다. 사라의 불신의 비웃음을 기적의 함박웃음으로 변하시킨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도 기적을 베푸실 때, 사람들의 언어를 바꾸신 후에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간질 귀신과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께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옵소서.”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언어를 바꾸신 후에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3~24)

 우리 안에 언어,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들은 언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신과 끝없이 
대화한 언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의 언어가 있습니다. 어떤 언어인가요? 
부정적인 언어, 파괴적인 언어, 분노의 언어입니까? 긍정적인 언어, 적극적인 언어, 생산적인 
언어입니까? 언어, 말이 바뀌어야 미래가 바뀝니다. 언어를 바꾸면 한순간에도 놀라운 변화와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가슴에 희망이 생기고, 우리 몸에 치유가 일어나며, 우리 인생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이 쓰는 말을 보면 정말 우리의 미래가 염려가 됩니다. 가끔 동네 소위 
노는 아이들이 교회에서 놉니다. 제가 유심히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대화의 반 
이상이 욕이고, 다른 친구들을 향한 저주 비슷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페이스북에 친구로 맺은 청년의 글을 어쩔 수 없이 친구이니 보게 됩니다. 그 공개적인 
열린 공간에서 별 욕을 다 적어 놓습니다. 창피함이나 주저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저희 아들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보통 
정도라는 것입니다. 
 말이 미래인데, 참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서라도 좋은 말 쓰기 
운동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하고 있을 것인데, 힘을 모아 주어야 하고 우리부터라도, 
내 자녀부터라도 좋은 말, 바른 말, 고은 말을 써야겠습니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내일은, 미래는 우리가 쓰는 언어, 말에 달려 있습니다. 
내일의 기적과 미래의 축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바꾸어 주시는 말을 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옆 사람을 서로 축복하겠습니다. “기적의 말,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어, 말을 바꾸심으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시고, 그를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어를 다듬으시므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변화시키며 성숙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 말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성숙의 잣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말에 
실수가 많다면, 내 말로 인하여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공동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더 부수어 지고, 더 낮아지고, 더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3장에서 “네가 참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인지 알기 위해서는 
말의 습관을 살펴보라.”고 가르칩니다.   
2절에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저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다 말에 실수가 많습니다. 저도 누구와 
한참 얘기를 해놓고 뒤돌아서면, ‘그것은 안 해도 될 말이었는데 괜히 쓸데없는 얘기를 했구나.’
라고 후회가 되고, 뒤끝이 개운치 않은 경험을 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멀었다고 느끼고, 
침묵과 경청의 수련이 절심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랑이 차오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으시고 침묵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얼마든지 지금 당신의 결백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명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가벼운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으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렇게 무겁게 입을 여신 말씀은 빛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고 생명이 되셨습니다.  

 가벼운 입에서 나오는 말과 무거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 사람의 실체를 나타낸다고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무화과 열매를 맺었으면 우리는 그 나무를 무화과나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감람나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포도가 열렸으면 우리는 그 나무를 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무화과나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입의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합니다. 거짓말하고, 
나쁜 말하고, 거친 말을 하고, 늘 비난하고, 비판하고 불평을 쏟아내고, 쌍소리를 하는 사람의 인격이 
고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참말을 하고, 좋은 말을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됨됨이가 막 돼 먹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우리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 보인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 거룩을 이루는 것, 성숙해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신앙과 
인격의 지향이라면 언어,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혀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목회자였던 야고보는 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말 한마디에 성도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때려야만 폭력이 아니라 말에도 
얼마든지 폭력성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심각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교회의 심각한 위기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목회 경험을 통해 절실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은 불과 같다’
고 지적을 합니다. 불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작은 불이지만 그것이 한번 붙으면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5,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작은 불과 많은 나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의 힘이 얼마나 큰 영향과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불의 비유에 앞서서 말의 파급력에 대한 비유를 배의 키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큰 광풍이 밀려와도 사공이 배의 키를 조정하여 운행하는 것처럼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공동체를 움직이는 것도 말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나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이기 
때문이다. 말은 화살 같다. 그러나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방패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한서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새로운 반년, 올 한 해의 후반전을 막 시작했습니다. 이 후반전, 새로운 반년을 
성공적으로 매듭짓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갖고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부터 시작할까요? 
우리의 말, 언어부터 바꾸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년을 매듭지으면서 여전히 변화지 않은 자신을 보면서 깊은 회의를 느낍니다. 어쩌면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더 고집과 아집만 늘어가고, 처음 신앙보다 못하다는 자괴감도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는커녕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는 것만 같아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말, 언어부터 바꾸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로 쓰고 있는 말과 듣고 있는 말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언어, 생산적인 말, 사람을 세워주는 칭찬과 격려의 말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도 
변하고, 생활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인격도 변하고, 영성도 변할 것입니다. 말을 바꾸어 축복과 기적을 
경험하고, 변화되어 온전한 크르스천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길들이기 어려운 우리의 언어, 말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분노의 언어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이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말로 바꾸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기적과 
축복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점점 성숙해지고 온전해 지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의 언어를 바꾸어 주옵소서. 나 자신부터, 우리 
자녀부터 앞장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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